09. 텔아비브 표류기, 인턴십이라는 합법적 빌미

이스라엘 텔아비브(Tel Aviv)에서의 3개월

by tautFLUID

살아가다 보면 과거의 어떤 순간이 ‘찰나의 모험’처럼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다. 특히 다시는 쉽게 마주할 수 없는 경험이라면, 비현실적인 ‘꿈’처럼 더욱 강렬하게 마음속에 새겨지곤 한다. 2018년 여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의 3개월은 나에게 그런 기억으로 남아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예측 불가였고, 새로웠으며, 그래서 특별했다.


현재는 비극적인 전쟁으로 인해, 그곳의 좋았던 모습만을 떠올리는 것이 가끔은 철없는 그리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평범한 개인들이 겪었거나 지금도 겪고 있을 공포와 슬픔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지만, 7년 전 내가 마주했던 사람들과 공간, 그리고 그들이 꾸려가던 삶은 나에게 여전히 따뜻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남아 있다.



01/ 텔아비브를 선택한 이유


인턴십을 할 곳을 추리기 위한 내 기준은 단 하나였다. 네덜란드가 아닌 ‘이국적인 나라’ 일 것.


인턴십 딱 1년 전이었던 2017년 여름, 3주에 걸쳐 베를린을 시작으로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 그리고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Skulptur Projekte Münster)를 홀로 여행했다. 그것이 나에게는 첫 단독 여행이었을 만큼 나는 상당한 겁쟁이였다. 10년 주기로 겹쳐지는 카셀 도큐멘타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가 아니었다면, 나의 첫 홀로 여행은 훨씬 더 늦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그 여행을 계기로 나는 홀로 여행하는 재미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관찰자’로서 여러 도시에 로컬 사람처럼 머물러보는 것이 나의 시야를 얼마나 넓혀주고 영감을 주는 일인지를 온전히 깨달은 것이다. 베를린에서는 체류 기간을 연장하고, 동서남북으로 에어비엔비를 옮겨 다니며 도시 곳곳을 샅샅이 훑기도 했다. 하나의 도시 안에서도 동네마다 분위기가 달랐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우연히 발견하는 장소와 순간, 그리고 사람들을 관찰하는 과정은 나를 백지상태로 비우고 그 위에 새로운 경험들을 쌓는 시간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몇 개월에 걸쳐 이어질 인턴 생활이라면 무조건 ‘새롭고 이국적인 곳’이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가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 도시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거니와, 단지 내가 관심 있게 지켜보던 디자이너 에레즈 네비 파나(Erez Nevi Pana)가 그곳에 스튜디오를 두고 있다는 정보 덕분에 도시의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 그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기억은 선명하지 않지만, 나는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독특한 캐릭터와 색깔에 매료되었다.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떻게 일하고 살아가는지 곁에서 들여다보고 싶었다.


on-the-lowest-point.jpg Erez Nevi Pana, Salts, 2016
Dead-Sea-Salt-leg-under-water.jpg Erez Nevi Pana, Salts, 2016


그는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에서 석사를 마친 뒤 고국으로 돌아가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었다. 특히 사해(Dead Sea)의 소금을 이용한 그의 대표작들을 보며,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문화적·지리적 배경을 활용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텔아비브의 사진들을 찾아보다 보니, 해안선을 따라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겹쳐진 이국적인 풍경, 밀집된 특유의 하얀 건물들, 그리고 휴양지 같은 풍경 속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여유로운 바이브가 눈에 들어왔다. 그 장면들을 마주하는 순간, 내 마음은 이내 확신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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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조건은 ‘비건(Vegan)’


에레즈를 떠올리면 드래곤볼의 ‘거북도사’나 반지의 제왕 속 ‘해그리드’ 같은 이미지가 중첩되곤 한다. 때로는 카리스마 있고 전략적이며, 어떨 때는 아이처럼 살짝 유치하다가도, 때로는 모성애와 같은 따뜻함으로 나를 챙겨주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IMG_1903 2.jpg Erez Nevi Pana


그 특유의 캐릭터를 어떻게 설명해야 정확할지 모르겠다. 모든 상황을 드라마처럼 만든다기에는 무게감이 있고, 항상 과장된 것 같다기에는 또 진중하며, 그저 특이하다고 하기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그런 묘한 존재다.

시작부터 그는 범상치 않았다. 나의 인턴쉽 지원 메일에 불과 40분 만에 ‘마무리 인사’조차 없는 답장을 보내온 것이다. 추후 영상 통화에서 그는 사실 운전 중에 메일을 썼고, 임시 저장을 해두려다 방지턱을 넘는 순간 실수로 ‘전송’을 눌렀다고 해명했다. 진실은 여전히 알 길이 없다. 농담이라기엔 그 이야기를 두세 번이나 반복했고, 정말 실수라고 하기엔 메일의 내용이 꽤 기승전결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예상치 못한 빠른 답변에 내가 고마움을 표하자, 이를 에레즈식으로 조금 더 ‘프로페셔널하게’ 보이려 희석했던 마음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운명적인 방지턱의 의도였거나.


어쨌든 에레즈는 우리의 만남이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것이 에레즈의 매력이다. 만화나 영화 속에서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기는 캐릭터처럼, 속을 알 수 없어 보이다가도 투명하고, 투명한가 싶다가도 다시 두루뭉술해지는 어느 지점에 서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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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실수’로 보낸 메일에서 나의 Retroact 작업이 인상적이라 뽑고 싶다는 의사와 함께, “내가 비건(Vegan)인 건 알지?”라며 나도 비건 여부를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당시의 나에게 비건은 생소한 개념이었고, 그것이 디자인과 연결된다는 사실 또한 익숙지 않았다. 내가 비건이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곧바로 제안을 보내왔다.


“네가 비건이 아니라면, 인턴십 기간 내내 비건으로 살아볼 것”


에레즈는 텔아비브에 거주자의 30%가 비건이기에, 실천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만약 내가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인턴십 막바지에는 일주일에 두 번 개인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배려해 주고 나의 작업을 디벨롭하는 과정도 돕겠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왕복 비행기표를 제공하고, 네덜란드 디자인 위크 기간에는 전시를 볼 수 있도록 휴가까지 약속했다. 결정적으로, 매일 점심으로 본인이 직접 만든 비건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덧붙였다.


당시 졸업 전 인턴십은 무급이 대부분이었기에 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조건보다도 나를 잡아끈 것은 에레즈 특유의 화법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카리스마와 괴짜스러운 면모였다.


처음 메일을 주고받을 때, 그는 뉴욕의 ‘프리드먼 벤다(Friedman Benda )’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축하 인사와 함께 그곳이 내 꿈의 갤러리 중 하나라고 답하자, 그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만약 내가 그저 떠오르는 신진 디자이너와 작업해보고 싶은 것이라면, 이번 인턴십은 기대와 정반대가 될 것이라고. 본인은 ‘사색가(Thinker)’이며 프로페셔널의 영역에는 버킷 리스트가 없고, 오직 영적인 영역에만 관심이 있다는 선언이었다. 한국식 예의와 이스라엘식, 아니 에레즈식의 엉뚱한 카리스마가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묘한 케미스트리는 이상하게도 나를 홀리고 있었다.


마지막 조건은 그의 주된 재료인 ‘소금’을 앞으로 절대 사용하지 말라는 요구였다. 애초에 타인의 작업을 모방하거나 겹치는 것을 지극히 꺼리는 나였기에, 그 조건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조건이 주는 매력보다 에레즈라는 인물이 풍기는 아우라에 이끌려, 나는 텔아비브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03/ 비건에 더해진, 요기(Yogi) 룸메이트


에레즈는 나름 치밀했다. 그가 찾아준 내 숙소의 룸메이트 파즈(Paz)는 수리공이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요가 애호가인 ‘요기(Yogi)’였다. 그는 비건은 아니었지만 베티레리언이었다. 즉, 에레즈는 내가 좀 더 확실히 비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파즈라는 ‘서브 캐릭터’를 반 감시자 역할로 붙여둔 셈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파즈는 에레즈조차 감당하기 힘든 진정한 자유 영혼이었다. 훗날 에레즈가 그를 경계하며 연락을 피하게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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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0191.jpg 내가 3개월 동안 머물렀던 집


내가 살아오면서 본 가장 자유로운 영혼인 파즈는, 자연 곱슬머리에 예수님을 연상시키는 장발을 하고 있었다. 한량 같으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영적인 아우라와 물처럼 흐르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숙소에 처음 도착한 날, 그는 우유 없이 만든 초콜릿을 냉장고에서 꺼내주었고 친구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들려주었다. 화려함보다 소소한 낭만을 선호하는 나에게, 그 순간은 마치 영화 속 한 순간 같았다.


넝쿨이 가득한 거실의 큰 창은 항상 활짝 열려 있었고, 파즈는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기대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집은 울타리 있는 사적 공간이어야 한다는 나의 고정관념은 자연스레 팽개쳐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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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 되면 파즈는 요가 센터에 가곤 했는데, 어느 날 나에게 함께 가자고 권했다. 나는 유연하지 못한 몸을 걱정하며 따라나섰지만, 막상 도착한 그곳에는 요가 매트 하나 없었다. 단지 남녀노소로 구성된 30-40명의 사람이 반반씩 나뉘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서너 시간 동안 그 누구도 요가는 하지 않았다. 벽에는 ‘스승님’이라 불리는 분들의 사진이 크게 붙어 있었고, 사람들은 줄을 맞춰 앉아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한 뒤 마지막에 다 함께 식사를 했다. 양반다리를 오래 못 하는 나는 저린 다리를 꼬집어가며 그 시간을 견뎠다.


공적이면서도 사적으로 보이는 그 공간에 대해 파즈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다. 그저 약간의 경계심을 남긴 채, 종종 그곳 사람들과 어울렸을 뿐이다. 그곳의 모든 이들은 따뜻했고, 최소한 위선적이거나 가식적이지 않았다. 지금 되돌아보면, ‘따뜻함’이 가장 먼저 떠오를 만큼 때 묻지 않은 온기가 그곳에 있었다.



04/ 오묘하게 내려앉은 기억들


하루는 요가센터의 한 가족, 그리고 파즈와 함께 유대 광야(Judean Desert)와 네게브(Negev) 사막의 경계에 있는 아라드(Arad) 지역으로 별을 보러 갔다. 아라드는 인공적인 빛공해가 적고 하늘이 맑아 별 관측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베두인(Bedouin) 스타일의 천막에서 대기했는데, 거대한 텐트 구조의 열린 창밖으로는 광활한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도 동물도 보이지 않고 바람조차 불지 않는, 마치 정지된 시공간 같은 풍경 속 모랫빛 하늘은 오묘했다. 영화 <듄>의 배경 같은 풍경을 뒤로하고, 천막 내부의 형형색색 카펫과 기하학적 문양의 텍스타일, 가구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요즘의 Bode(보디) 매장이 추구하는 미학의 ‘더 날 것 같은 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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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느긋하게 쉬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식사를 마치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랜턴도 없이 밖으로 나가 특별한 장비 없이 맨눈으로 올려다본 하늘은 별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 없이 어둠으로 이어진 공간에서 마주한 별들은, 나조차 하나의 별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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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떠올리면 날카롭고 뾰족한 자연의 형상보다는, 수평선처럼 길게 늘어진 풍경이 떠오르곤 한다. 하루는 파즈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에 가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잔 적이 있다. 그곳은 정돈된 해수욕장이 아닌 가공되지 않은 바다 그대로였기에, 임시로 설치해 둔 텐트 몇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커다란 텐트 안에서 밥을 해 먹고 노래를 틀어둔 채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쉬는 것까지는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샤워 시설을커녕 화장실조차 따로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문제’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오직 나뿐인 것 같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던 한국 군대 훈련소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나는 모든 편안함을 포기하고 모래가 버석거리는 텐트 바닥 위에서 잠을 청했다. 솔직히 말하면 축축하고 꺼끌꺼끌한 바닥에 누워 자는 것이 켤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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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음 날 아침, 일출을 바라보며 나는 아무도 오지 않을 만큼 멀리 갈대숲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웅크리고 앉아 용변을 해결했다. 주인 없는 갈대숲에서 괜히 도둑처럼 은밀하게 움직이는 와중에, 키 낮은 갈대숲 너머로 푸른 해변이 보였다. 그 순간 마주한 해방감은 방구석에서 머리로만 좇던 그 어떤 원초성보다 훨씬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05/ 밖으로 나가라


에레즈는 항상 나를 밖으로 나를 내몰았다. 그는 인턴십 업무를 떠나 내가 텔아비브를 온전히 느끼길 바랐고, 나의 틀을 깨길 원했다. 그는 내가 매일 메고 다니던 힙색을 제발 좀 벗어두라고 잔소리했고, 퇴근 후에는 클럽이라도 가보라며 부추겼다. 어느 날은 열린 스튜디오 창 너머로 들려오는 희미한 음악 소리를 추적하더니, 저쪽에서 전시 오프닝 행사가 열리는 것 같으니 어서 짐을 싸서 가보라고 등을 떠밀기도 했다.


작업과 관련한 출장을 갈 때도, 그는 항상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사해’였다. 에레즈가 데려간 곳은 일반적인 관광객이 찾는, 호텔 앞의 잘 정돈된 사해가 아니었다. 그는 닫힌 철조망을 지나 비밀스러운 길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우리뿐이었다. 거친 소금 지형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 소금기를 머금은 듯 희뿌옇게 드리운 하늘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발을 잘못 디디면 날카로운 소금 결정에 긁혀 다칠 수 있으니 조심히 뒤를 따라오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나는 한순간 발을 잘못짚어 다리가 푹 빠졌고, 거친 소금에 긁혀 피가 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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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바로 에레즈가 작업을 하는 장소였다. 그는 나무틀로 형태를 디자인한 뒤, 몇 달에 걸쳐 사해에 담가두어 자연스럽게 소금 결정이 맺히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물속에 잠겨 있는 가구 오브제를 보여주겠다며 함께 물에 들어가자고 했지만, 소금 결정이 엉겨 붙어 무거워진 오브제를 둘이서 들어 올리는 것을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우리는 포기한 채 사해에 둥둥 떠서 달빛을 바라보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사막 언덕 너머로 마주한 달은 내가 살아오며 본 그 어떤 달보다 비현실적으로 거대했다.


또 어느 날은, 네게브 사막에 새로 짓고 있던 리조트에 에레즈의 텍스타일 작업을 설치하러 가기도 했다. 그곳은 2021년에 오픈한 ‘식스 센스 샤하루트(Six Senses Shaharut)’였는데, 내가 방문했던 2018년 당시에는 완공 전이었음에도 이미 많은 것들이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사막 언덕 위, 고요한 리조트 안에서 쳇 베이커(Chet Baker)의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을 설치하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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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1967.jpg 식스 센스 샤하루트(Six Senses Shaharut)에서 바라본 뷰


다음 날, 텔아비브로 돌아오기 전 에레즈는 구리광산 리서치를 제안했다. ‘팀나 계곡(Timna Valley)’이라 불리는 그곳은 네게브 남부 아라바 사막에 위치해 있었다. 실제로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 사용한 엄청난 양의 구리 출처로 추정되어 ‘솔로몬 왕의 광산’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바람과 물의 침식 작용이 빚어낸 독특한 붉은 사암 지형은 그 자체로 압도적이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뜨거운 날이었지만, 한정된 시간 안에 그 경관을 눈에 담기 위해 이리저리 뛰며 돌아다녔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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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2099.jpg 팀나 계곡(Timna Va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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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집에서 스튜디오까지 30분 남짓한 거리를 걸어 다녔다. 뜨거운 햇살과 평화로운 사람들, 그리고 주차된 차 위에 볕을 쬐며 늘어진 고양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었다. 퇴근길에는 매번 궁금했던 장소나 가보고 싶었던 식당을 들르기 위해 일부러 길을 돌아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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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처럼 드나들던 곳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셰프 한 명이 직접 생면을 뽑아내어 대여섯 가지 메뉴만 선보이던 파스타 집이었다. 시장 근처의 간판도 제대로 없는 작은 가게였는데, 흥미로운 점은 오직 그 시장에서 구한 제철 재료들만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화려한 맛이 아니었지만, 육수를 진하게 우려내어 투박하게 만든 칼국수처럼 슴슴하면서도 속이 알찬 맛이었다. 내가 다닐 당시 이름은 그저 ‘Pasta Bar’였으나, 지금은 ‘The Pasta At Levinsky’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별점이 4.9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 고집스러운 맛은 여전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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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은 각종 후무스(Hummus)와 팔라펠(Falafel) 가게들이다. 수제만두나 칼국수, 국밥의 로컬 맛을 따라잡기 힘들듯, 텔아비브에서 마주한 후무스와 팔라펠은 질감과 풍미부터가 달랐다. 길을 가다 가볍게 한 그릇 비우는 잔치국수 같은 포지션이었는데, 투박하게 담아낸 푸짐한 후무스를 먹고 있으면 마치 내가 진짜 이곳의 로컬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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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퍼포먼스나 공연을 즐겨 찾는 편이라 텔아비브에 머무는 동안에도 몇 가지 공연을 관람했다. 그중 가장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오래된 지하철역의 숨겨진 공간을 따라가며 퍼포먼스를 감상하는 이벤트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남대문 시장의 상가처럼 후미진 역에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모이면, 다 함께 이동하며 각 장소에 맞는 퍼포먼스를 보는 방식이었다.


역사 뒤편에 이런 공간이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마치 비밀스러운 통로를 따라가는 기분이었다. 나무 책장으로 구역을 나누고 카펫을 깔아 둔 아늑한 공간에 앉아 공연을 관람하기도 하고, 광장 같은 트인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 퍼포머가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런 ‘날것의 예술적인 생명력’은 내가 텔아비브를 떠올릴 때마다 되살아나는 가장 강렬한 인상 중 하나로 남아있다.



06/ 예루살렘


개인적으로 무교이지만, 지인들을 따라 절이나 교회, 성당에 가본 경험은 있었다. 나는 영적인 영역에 대해 편견 없이 열려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마주한 에너지는 사뭇 달랐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세계 3대 유일신 종교 모두에게 가장 신성한 성지로 여겨지는 곳답게, 수천 년간 쌓여온 믿음과 소망이 시공간의 틈새마다 층층이 퇴적된 듯한 인상을 받았다. 구시가지를 걷는 내내 발걸음은 절로 조심스러워졌고, 두 손은 어느새 공손히 모아지곤 했다. 여느 종교 시설들도 신성한 공간이지만, 금빛 석재로 뒤덮인 예루살렘 구시가지 전체가 발산하는 특유의 아우라는 독보적이었다. 마치 ‘영혼의 정거장’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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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을 떠올리면 ‘과연 여행자로 잠시 스쳐 지나갔어도 똑같은 감흥을 느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예루살렘은 기도하고, 텔아비브는 춤춘다(Jerusalem prays, Tel Aviv plays)”라는 말처럼, 두 도시는 경건과 세속이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텔아비브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다가 방문해서 그런지, 나는 시공간의 격차를 더욱 선명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예술과 디자인에 있어 ‘현장감’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07/ 금요일 저녁


이스라엘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금요일 저녁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요일 저녁이 되면 유대교의 안식일인 ‘샤바트(Shabbat)’의 시작을 기리려 부모님 댁에 모여 다 함께 식사를 한다. 나는 종종 에레즈와 파즈의 부모님 댁을 초대받아 방문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한국의 가족 문화가 떠올라 마음이 뭉클해지곤 했다. 따뜻한 환대는 언제가 감사했고, 맛있는 식사는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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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주말이면 가족들과 모여 TV도 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던 그 따뜻한 풍경이 이스라엘에도 있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디저트와 과일을 먹던 시간들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온기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 두 가족은 타지에서 온 나를 진심으로 챙겨주었다. 한 번은 에레즈의 어머니께서 “우리 아들이 문제”라며 몰래 내 그릇에 고기를 밀어 넣어 주셨는데, 에레즈는 안 된다며 그것을 다시 집어가기도 했다.


에레즈의 형의 결혼식에 초대받았던 날도 기억에 남는다. 특이하게도 식장 중앙에 DJ 부스가 있었는데, 코스 요리가 나오는 중간중간 음악이 시작되면 하객들이 일제히 나가 춤을 추었다. 내성적인 나에게는 다소 곤혹스러운 순간이었으나, 그런 나를 알아챈 에레즈의 아버지는 슬그머니 나를 부르시더니 옆자리에 앉히셨다. 나이 드신 분들이 둘러앉은 원형 테이블에 젊은 동양인 청년이 혼자 앉아 있던 그 풍경은,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지독히 불편하고도 다정한 기억이다.


반면, 파즈의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고 세라믹을 굽는 예술가 기질이 다분한 분이셨다. 내가 떠나는 날 건네주신 하트 모양의 세라믹 오브제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나에게 ‘금요일 저녁’이란 말속에는 그분들이 보여주셨던 모든 사랑과 감사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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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에레즈의 제안


인턴십이 끝나갈 무렵, 에레즈는 언젠가 마주할 것으로 예상했던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계속 비건으로 사는 건 어때?”


그는 내가 계속 비건의 삶을 유지하며 관련 작업을 이어간다면, 본인과 함께 새로운 디자인 영역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제안했다.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가 건네는 파트너십 제안은 쉽게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실제로 텔아비브에서 비건 옵션의 다양성과 미식적 즐거움을 경험하며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기에, 진지하게 고민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확신이 없었다. 평생 텔아비브에서 살 것이 아니라면, 내가 과연 이 약속을 떳떳하게 지킬 수 있을까? 한국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행위는 단순한 식사를 넘어 사교적인 ‘리추얼(Ritual)’이자 큰 즐거움인데,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가능할까? 무엇보다 나는 ‘맛’을 좇으며 미식이 주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기에, 단지 커리어를 위해 비건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나의 ‘Retroact’ 작업은 채식주의의 선언이라기보다, 우리 존재를 위해 희생된 것들에 대한 ‘위로와 감사’를 잊지 말자는 본질에 가까웠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느 한 극단에 머무는 것을 경계한다. 세상은 이분법적으로만 해석될 수 없는 복잡한 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 거절을 어려워하는 성격이지만, 에레즈가 보여준 신뢰에 대한 예의는 확실한 내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의 제안에 대해 솔직한 나의 입장을 전했다.



09/ 비트리나(Vitrina) 치킨버거


오늘의 글은 마지막 고해성사로 끝이 난다. 나에게는 어릴 시절의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학교에서 다 같이 어린이대공원으로 소풍을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옆을 보지 말고, 옆 사람 손을 꼭 잡고 걸으라”라고 당부하셨다. 그 후 나를 지켜보신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나는 정말로 옆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오직 앞만 보고 걸었다고 한다. 나는 융통성이 없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선생님의 말씀만큼은 반드시 따라야 하는 신성한 영역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자아가 강해진 나는, 에레즈와의 약속을 몇 번 깰 수밖에 없었다. 시작은 산책 중 50m 정도 떨어진 가게에서 풍겨오던 버터 향과 치킨 튀긴 냄새의 조합이었다. 냄새를 따라가 보니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텔아비브에서는 줄 서서 기다리는 식당이 드문 데다, 구글 맵 사진만으로도 맛집을 선별하는 안목이 쌓여 있던 내게 그곳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성지였다.


어깨에 메고 있던 빨간 프라이탁 배낭이 혹시나 눈에 띌까 싶어, 나는 가방을 조용히 내려 손으로 가린 채 줄을 섰다. 그렇게 마주한 버터향 가득한 번에, 육즙 가득한 치킨튀김, 그리고 레몬 제스트가 뿌려진 감자튀김은 내가 그동안 먹어본 치킨버거 중 가장 맛있었다.


양심상(?) 총 세 번에 걸쳐 이 일탈을 즐겼다. 처음 맛본 이후 한 번은 포장해다가 건물 뒤 골목에서 먹었고, 마지막 한 번은 네덜란드로 돌아오기 전날 ‘이건 꼭 먹고 가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다시 방문했다. 문득 스스로 위선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나는 과거의 나처럼 앞만 보고 걸었어야 했을까? 아니면 때로는 곁눈질하는 것이 삶의 당연한 섭리일까? 인간은 영원히 배움을 좇아야 함을 느끼는 동시에, 치킨 버거를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다는 모순된 생각 속에서 그렇게 인턴십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한편 에레즈는 나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해왔다. 본인이 곧 바나나 섬유 작업을 시작할 예정인데, 내가 이미 1년 전에 그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지만 본인의 작업이 공개될 때까지는 바나나 섬유를 쓰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미 다뤘던 재료를 다시 쓰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데다, 표현 방식이 다르면 상관없다는 주의였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속으로는 그가 요구한 ‘바나나 섬유 금지령’의 부당함을, 내가 몰래 먹은 치킨 버거 세 개에 대한 달콤한 면죄부로 삼기로 했다.



10/ 실존했지만, 신기루 같은 추억


반농담을 섞어가며 글을 이어왔지만, 에레즈는 나에게 진심을 다해준 멘토였다. 스튜디오에 머무는 동안 그는 디자이너로서, 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끊임없이 조언과 가르침을 건넸다. 나는 중요한 사주 풀이를 들을 때처럼 그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되새겼고, 틈날 때마다 휴대폰에 키워드를 적어두었다가 집에 돌아와 노트에 빼곡히 기록하곤 했다. 매일 점심 도시락통을 열어주며 생대파 한 줄기를 툭 얹어주고는 "이스라엘 사람처럼 씹어먹어 보라"며 웃던 그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항상 만화 속 주인공의 곁을 지키는 단짝 친구처럼, 파즈와 함께 여행하고 산책하던 순간들도 여전히 선명하다. 에레즈와 파즈, 그리고 그들의 곁을 채우던 가족과 친구들. 그 모든 인연이 보여준 환대는 나에게 하나의 문화였고 그 자체로 거대한 영감이었다.


디자이너는 자칫 실내에 머물며 데이터 리서치에만 몰두하기 쉽다. 물론 무궁무진한 정보 속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콘셉트를 도출하고 스토리텔링을 이끌어내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생소한 땅에서 보낸 3개월은 나에게 디자인이 왜 삶과 직결되어 있는지를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도시를 구성하는 재료들의 색감과 질감, 기후와 환경의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와 방식. 그 모든 것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방구석에 앉아 단순히 레퍼런스를 수집하고 테크닉이나 에스테틱만을 차용하는 방식의 한계점을 명확히 느꼈다. 진정한 레퍼런스를 얻기 위해서는 ‘오감을 통한 경험’으로 대상의 본질과 뿌리를 온전히 이해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함을 배운 것이다.


또한, 낯선 타지에서 홀로 보낸 시간은 내 안의 생각들을 밖으로 꺼내어 마주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 주었다. 방 안에서 묵묵히 써 내려간 글들은 당시의 경험과 고민이 응축된 순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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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얻은 3개월의 흔적들은 여전히 나에게 영감이 되어 흐르고 있다. 1학년 시절 수없이 들었던 “컴포트 존(Comfort Zone)에서 나와라”라는 말은, 어쩌면 나를 온전한 백지상태로 만들어 새로운 세계를 흡수하고 재해석하여 다시 표출하라는 진심 어린 조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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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로 드나들던 텔아비브의 한 빈티지 샵에서 구매했던 세라믹 오브제들



[tautFLUID Soundscape] : Lola Marsh - Only For A Moment

“과거의 어떤 순간은 영원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아름답게 간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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