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하는 인간

은둔형 외톨이의 리더십 기록

by 청안

1. 리더랑은 상관이 없었는데요

나는 어떤 그룹에 속하든 리더의 역할을 맡게 된다. 패턴처럼 작용한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이상하게, 어느 그룹에 있든 나에게 리더 역할이 맡겨진다. 이상한 현상이다.

초등학생 때 부반장으로 한 번 선출된 이후로는 30대가 될 때까지 이끄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관심도 없었고, 대표나 회장을 보면 늘 힘들어 보여서 고맙다고 생각은 했지만 ‘절대 내가 할 일은 아니다’라고 단정 지어 두었었다.


2. 은둔형 외톨이 시절 회고

20대 초중반부터 후반까지, 약 5년간 고립되어 지냈던 것 같다. 정확히 몇 살부터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시절엔 달력이나 시계를 보지 않고 살아서 시간, 날짜, 계절 감각이 전혀 없었다. 항상 누워 있던 건 아니고 가끔 외출했다. 뭔가 배우러 나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움직임이 매우 적었다. 강아지를 반려했기에 동네 산책은 자주 나갔지만, 타인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잘 나가는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절대 따라잡을 수 없을 거야’라는 생각에 아예 삶을 포기해 버렸다. 점점 초라해져 가는 나를 내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시기엔 자기혐오가 극심해서, 나를 깎아내려야 하는 일이 생기면 견디지 못하고 동굴로 숨었다. 그때의 나는 누군가 나를 꺼내주길 바랐다.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사는 거 별거 아니네’ 싶다가도, 침대에 누우면 세상에 서 있을 자신이 없어졌다. 그 고리를 끝내 끊지 못했다.


3. 유서를 썼던 20대

내가 세상에 흔적을 계속 남겨서 ‘아줌마, 할머니’라는 호칭으로 불릴 날이 올까? 확신이 들지 않았다.

휴대폰의 작은 화면 안에 나를 가두며 안구건조증을 달고 살았다. 주로 유튜브 영상이나 웹툰을 봤다. 어느 날, 모든 콘텐츠 소비가 끝나버리자 삶이 더 지루해졌다.

지루함에 몸부림치던 나는 노트북을 켜고 충동적으로 공인중개사 강의를 결제했다. 그리고 강아지를 안고 하루에 최소 8시간씩 공부에 매달렸다. 2년 동안 공부한 끝에 제33회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했다. 구청에서 자격증을 발급받고 나니, 내가 제법 ‘쓸모 있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4. 사건의 발단

자격증을 땄다고 세상이 달라지진 않았다. 그래도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자존감을 끌어올렸다. 여러 가지를 시도하다가 영어 회화 학원도 다니고, 프로그램도 들으며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구성원들이 나보다 사회 경험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리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었다. 처음엔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하라니까 한다’는 태도로 임하다 보니, 동시에 다섯 개 그룹의 리더로 기능하고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이유를 찾다가 ‘아, 내가 이 그룹들을 매일 운영하고 있었구나’를 깨달았다. 구성원들의 배경과 성향이 다 달라서, 그룹마다 규칙을 만들고 그에 맞춰 행동하고 있던 것도 그제야 알았다.


5. 은둔형 외톨이였던 내가 리더로 기능하는 이유

아마 은둔형 외톨이 시절이 내가 리더 역할을 하게 되는 큰 원인일 것이다. 그때의 나는 너무 보잘것없어서 나 자신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누가 날 사랑해 주길, 내가 소중하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때 내가 타인에게 받고 싶었던 말과 행동을, 지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한 번쯤은 묻고 싶다.

“나 같은 걸 왜 믿어?”
하지만 이 말을 내뱉는 순간 신뢰를 깨뜨릴까 봐, 혼자 삭인다. 그래도 정말 궁금하다.


6. 나의 리더십 유형을 분석해 보기

리더십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고 한다. 카리스마형, 서포트형, 방목형 등등… 나는 서포트형에 가깝다. 리더는 잘나서 이끌 권한이 생기는 게 아니다. 구성원들의 의견을 듣고 종합해 타협점을 찾는 사람이다.

나는 나를 ‘돌쇠’라고 부른다. 속칭 뒷바라지를 잘하는 게 특기다. 모든 사람은 공평하며 상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하지만 리더로 기능할 때는 항상 나를 아래에 두고, 구성원들을 최대한 떠받든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라면 희생은 필수다.

희생이 좋아서 하는 건 아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충성과 보답을 해야 한다는 부채감이 작용한다. 타인의 사회적 지위나 무게를 계산하면서 행동하는 건 내가 가장 혐오하는 사고방식이다. 게다가 그런 계산 자체가 굉장히 귀찮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한다.


7. 여성 리더에 대한 인식

성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해 봤다. 보통 리더는 남성이 맡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은둔형 외톨이 출신의 여성이다. 심리검사에 따르면 남성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래서 내가 과연 여성으로 분류되는 사람인가, 스스로 의문이 든다.

나는 내재된 모성애와 남성적 리더십이 결합된, 중성적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성별에 따라 성향을 나누는 건 시대착오적이지만, 분석의 편의를 위해 구분해 보았다.

-여성적: 의견을 잘 듣고, 포용하며, 부드럽게 말하려 노력하고, 강압적이지 않다.
-남성적: 필요할 땐 강하게 의견을 말하고, 그룹이 방향을 잃지 않도록 추진한다.


8. 리더 역할을 하면 좋은가?

모르겠다. 리더는 겉으로 보면 멋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도 편하지 않다. 내가 아닌 타인이 항상 1순위다.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게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이 행복한 게 좋다. 점보다 작은 내가 희생하고 고생해서 타인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며 내 존재 가치를 확인한다.


9. 나는 보잘것없다.

그러나 소중하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무시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 대통령도 거지도 모두 공평하다. 내가 리더 역할을 한다고 해서 구성원들보다 잘난 건 하나도 없다. 나는 앞에서 오는 공격을 잘 견디고, 뒷바라지를 잘하는 사람이다.


10. 저도 인간인지라

가끔은 ‘내가 혹시 재능이 있나?’ 싶을 정도로 자신감이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럴 땐 봉사활동이 특효약이다. 봉사를 하면 나를 끝없이 깎아내리는 일들을 마주하게 되고, 자만심이 저절로 사라진다. 나는 그냥 ‘사람 1’이다.


11. 안 힘든가?

엄청 힘들다. 때로는 무게에 짓눌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내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구성원들이 불안해할 것이다. 일반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싶어서 조용히 있어 봤지만 결국 리더 자리를 맡게 되는 패턴이 적용됐다. 이 패턴에 대해서는 포기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버티게 만드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여러 가지를 시도한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걸 보면, 내 한계 안에서 버티고 있는 듯하다. 웨이트트레이닝에서 중량을 늘려가듯, 들 수 있는 무게가 조금씩 늘어나는 느낌도 든다.


12.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

언제 죽을지, 언제까지 리더로 기능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래도 지금 내게 맡겨진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싶다. 나는 다시 심리적 동굴을 만들고 침대에 누울 권리가 있다. 그러나 나를 신뢰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저버릴 권리는 없다. 그래서 기능할 수 있는 한 계속 기능해야 한다.


13. 두려운 건

내가 다시 침대에 눕는 일이다. 나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경계한다. 세상엔 두려운 게 없다고 말할 만큼 대담하지만, 정작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다시 모든 걸 포기할 나 자신’이다.


14. 나에게 남기는 응원

너는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잘 기능하지 않아도 괜찮다. 너의 안전과 행복이 최우선이며, 어디서 무엇을 하든 너의 가치는 똑같다. 산속의 다람쥐처럼 살아라. 도토리도 먹고, 나무 위에서 놀다가 때가 되면 생명을 다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면 된다.


15. 구성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

저를 믿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신뢰는 한순간의 제 그릇된 행동으로 무너질 수 있음을 압니다.

여러분이 주는 사랑과 믿음이 당연한 것이 아님도 알고 있습니다. 그대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저는 저를 발전시키겠습니다.

저를 이타적인 사람으로 오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저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대들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 이유는, 그게 곧 나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제 곁에 있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볼품없어서 애정을 받으신다 한들 이득을 취하실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많이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