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실험체입니다

나를 연구하는 인간의 보고서

by 청안

자발적 사회 실험체입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사회문화 과목을 제일 좋아했다. 유학 준비를 하느라 내신보다는 영어 공부와 포트폴리오 준비가 최우선이었지만, 사회문화 수업 시간만큼은 정말 몰입해서 들었다. 사회 현상, 계급, 집단 등의 개념에 노출되면서 평소 막연하게 궁금했던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풀 수 있었다. 사회문화 담당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사회 실험을 여러 가지 진행하고 계시다고 하셨을 때, 그땐 사실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나 자신을 실험체로 삼아 여러 가지 사회 실험을 해보고 있다.


왜 그런 짓을

내가 하는 행동을 관찰자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꽤 재미있다. 나는 내가 새로운 상황에서 어떤 말과 행동을 할지 정말 궁금하다. 마치 <전지적 참견 시점>이나 <나 혼자 산다> 같은 관찰 예능 프로그램에 내가 출연자 겸 PD로 참여해 촬영하는 느낌이다. 새로운 에피소드와 행동 양상을 보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움직여서 어딘가로 가야 하므로 여러 장소를 자주 돌아다닌다. 물론 새로운 환경에서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관찰 일지 : 성대 바꾸기가 가능합니다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내가 왜 장소마다,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를까?’ 그때 깨달았다. 나는 발성법과 단어 선택을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이런 걸 보면, 아마도 스트레스 상황에서의 생존 본능일지도 모른다.


1. 가족이나 친구와 이야기할 때

가까운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문장을 끝맺지 않고, 다소 가볍게 말한다. 단어 선택도 유아 수준이거나, 쓰려던 단어와 결만 맞으면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사용한다. 매우 직설적이며 비성을 쓴다.


2. 회의할 때

공적인 단어를 사용하지만, 장시간 진행되므로 일상 대화의 틀 안에서 단어만 바꾼다. 조금 크게 말하고, 발음을 정확히 구사한다. 잘 웃지 않고, 이견이 존재할 수 있음을 전제하며 쿠션 워드(cushion word)를 쓴다. 비성과 흉성을 섞으며, 강하게 의견을 펼쳐야 할 때만 직설적으로 말한다.


3. 질문할 때

질문은 나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분께 하는 것이므로 예의를 갖춘다. 회의할 때보다 더 단정한 톤으로 말한다. 비성과 흉성을 섞어 사용한다.


4. 마이크를 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의견을 펼칠 때

이때는 톤이 완전히 달라진다. 흉성을 주로 쓰며, 청중의 배경에 따라 흥미롭게 들릴 단어들을 배열해 시나리오를 짠다. 비유나 유머가 필요할 때는 도입부를 가볍게 구성하고, 그 뒤에는 청중이 익숙하게 들었을 법한 단어를 배치한다. 공적인 자리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공적 언어만 사용하며 단어의 중복을 피하고, 발음에 가장 신경 쓴다. 말끝은 반드시 내린다.


윤리적 문제에서 자유롭습니다

대개 실험을 진행할 때는 연구 대상자를 둘러싼 윤리적 딜레마가 발생한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실험체로 삼아, 혼자만의 실험을 하므로 자유롭다. 아마 홀로 지낸 시간이 길어서, 나를 관찰하는 것이 습관이 된 것 같다. 동기가 어찌 됐든, 이렇게라도 열심히 살 수 있다. 그게 곧 좋은 일 아니겠는가.


목표가 뭡니까

나는 꼭 들어가 보고 싶은 특정 집단이 있다. 그 공간 속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가 궁금하다. 내가 중심에 설까, 주변을 맴돌까, 혹은 외톨이나 관찰자가 될까-상상한다. 외톨이가 된다면 조금 서글프겠지만, 그 상황 속에 나를 꼭 넣어보고 싶다. 과연 나는 그 상황을 볼 수 있을까?


몰입은 금지

나의 최종 목표가 ‘내가 관찰하고 싶었던 나를 그 상황에 투입하는 것’이라면, 사는 동안 모든 게 너무 부질없을 것이다. 이 관찰 카메라 놀이는 취미로만 둔다. 지금 내 앞에 놓인 레몬차를 마시고, 휘낭시에를 맛있게 먹고, 크리스마스트리를 바라보며 행복을 찾는 것으로 충분하다.

매거진의 이전글가시성의 형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