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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May 07. 2023

아니 되옵니다, 소통의 시작!

동해학 아카데미, 문화학당_하나

동해문화원이 2023 동해학 아카데미 <문화학당>을 지난 5월 4일 개강했다. 4일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2시 총 20강 운영하는 이 학당은 16개 강좌와 4곳의 현장답사로 진행될 예정이다. 4일 첫 강의에 <왕의 소통>을 주제로 나선 이흥재 전, 추계예술대학교 교수는 왕의 권력으로 본 우리나라 사회문화적 소통의 뿌리를 강의하면서 <아니 되옵니다>가 <소통의 뿌리이자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이흥재 전 교수는 이날 강의에서 "우리 사회는 전환기, 지식정보사회, 4차 산업혁명기술, 코로나 생명공동체, 기후변화와 인구소멸에 따른 사회디자인이 필요하다. 지금 그 바탕을 세우는데 백밀러, 현미경, 망원경 같은 세 개 거울이 필요하다.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면서 발전된 자본주의 생태에서 우리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데만 힘을 쏟고, 사회공공성을 외면하는 게 걱정이다. 이런 행동을 적당주의보신주의라는 말로 멋지게 표현하니 위험하다. 더 늦기 전에 미래를 담보 랄 <벼루줄>을 단단히 잡고 투망을 던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대한 반동>과 <미래에 대한 낙관>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지식국가 조선시대

우리 사회는 소통을 잘하고 있는가? 개인소통을 할 때는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약자를 배려 존중해야 한다. 공공소통에서는 특정 가치에 집착하지 않고, 다양한 가치를 내포하며, 온화해야 한다. 유학적 사고 때문에 소통이 어려운가? 유학은 소통 자체를 인간의 기본적 자질이며, 인성과 심성을 그대로 발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지성은 일단 유연해야 하며, 널리 쓰임새가 있어야 하므로 기본적으로 소종을 중시한다.


소통은 교육학습과 연관된다. 교육과 소통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문물교화, 즉 오늘날의 문화이다. 우리가 쓰는 문화라는 말은 남쪽에서 올라올 때는 쿨투라는 개념의 교육지원이었고, 북쪽에서 내려올 때는 문화교류 개념의 문물교화였다. 두 말의 뿌리는 모두 다 교화였다. 여기서는 사회적인 소통, 국가권력과 사회문화를 함께 보면서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소통했는가를 살펴본다. 조선시대는 왕부터 사회문화를 부지런히 학습하고 실천하여 지식을 갖췄다. 신하들과 함께, 공식 제도와 절차를 만들어 두고 실천했다. 현대사회 기준으로 보더라고 매우 차원 높은 소통이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논의된 문화학습활동들이었다.

신하를 스승으로 삼아

왕의 교육학습을 지도한 스승은 전문지식이 뛰어난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직책상으로는 신하였지만 교육자로서 제왕학, 성학을 먼저 스스로 학습하여 왕의 자질향상을 책임진다. 왕과 관리들이 앞장서서 그런 사회생태계를 만들어 가니 문치주의에 바탕을 둔 조선사회가 학습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왕은 학습과정에서 신하와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함께 학습하면서 주요 이념에 대하여 공동인식을 하는 것이다. 왕과 관리들 학습은 공동시동을 거치면서 창의적 소통을 이뤄갈 기본두조를 갖추 게 되었다. 결국 왕과 정책 관리들 사이 소통구조는 민본 중시 권력구조, 언론 활동 조직화, 전문성을 존중하는 분권화 등으로 이루어졌다.

사회문화 뿌리가 된 유학

유학은 조선에 들어와서 조선유학으로 자연스레 문화접변을 이뤘다. 조선건국과 연관되어 사회의 특징을 결정지었다. 그러나 유학이 중시하는 이상적인 의사소통 인식이 지식계층인 왕과 고위 관료층에 중심사상으로 먼저 퍼지게 되었다. 지식경쟁에 뛰어든 사림 양반들도 점차 유학의 가르침을 학습 실천하면서 지식공동체를 활성화시켰다. 그런 조선 유학이 결굴 점차 사회문화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유학에 바탕을 둔 사회소통 방식은 사회문화의 근간,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는데 기본 논리, 그리고 정당성 논리로 활용되었다. 사회를 보는데 중요한 사회소통 환경으로 유학을 살펴보는 것이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지역의 사회적 윤리

지역사회의 사화활동과 질서유지 윤리활동은 세심하게 갖춰진 셈이다. 인륜의 기본으로서의 효도, 부자관계, 어른에 대한 존경심을 지역사회 공동운영의 질서원리였다. 가족공동체의 혈연윤리나 혈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구성원의 상부상조는 농업생산에서 <협력>을 이끌어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역공동체의 자연윤리에 바탕을 둔 단결이나, 부드러운 대인관계, 귀속집단 우선 대우, 도덕의 형상화로서의 예절 등이 모두 공동체 운영 원리로 역할을 다 했었다. 한마디로 <연대성을 회복하는 소통>을 촉진시키는 활동이었다고 본다. 오늘날 사회윤리는 세계경제 흐름까지 전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학자들이 서구자본주의와 다른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연구한 결과, 유학문화가 새삼 주목받게 된 것이다. <사회문화의 힘>이 해당 국가들의 제도, 시대적 가치관, 역학 관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열린 하의상달 제도

일반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윗선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청원, 상소, 고발을 하거나 신문고를 쳐서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백성들이 삶에 어려움이 있어 해결이 필요할 때는 청원을 한다. 의견을 건의코자 하면 먼저 정부에 청원을 올리고, 이것이 왕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신문과를 이용하게 되어있다. 신문고는 이처럼 고발을 할 때 최후의 항고를 위한 시설이었다. 고발의 경우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음모가 생기거나, 종친이나 공을 세운 종친훈구를 모함하여 화란을 일으키려는 자가 있으면 아무나 직접 와서 신문고를 두드리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억울한 일이 있거나 사회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는 사람을 고발하는 형식으로 왕에게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길은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이때 절차는 <억울한 일이 있어서 상소하는 이는 소장을 올리는데 중앙이면 주로 관장하는 권원에게 제출하고, 지방이면 관찰사에게 제출>했다.

현대적 계승과 공진화
강한 사회문화력

근세조선 소통제도와 관련해 뜻깊은 것은 <역할에 대한 존중> 의식이 바탕을 다져주는 사회문화력에 있다. 제도화된 역할을 존중하며 활동하게 한 것이다. 소통을 이끌어가는 언관이 왕을 불편하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왕은 이 역할이 소중하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언론활동 관련 제도를 존중했다. 더구나 관리와 권력을 나눠 갖고 나라를 이끌어 가는 왕이 부하 관리들에게 역할을 주고 그것이 지켜져야 한다고 스스로 노력했다. 왕의 성격, 기질 등에 따라서 비록 소통방식에는 왕마다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 뿌리는 튼튼했다.


왕이 소통을 강조하면서 실천하려고 특별히 애쓴 것은 지식국가 조선의 국정운영 기조였다. 단순하게 권력집착적인 것이었다면 무력을 동원해 편하게 집행했을 터인데도, 문인중심의 문화력을 바탕으로 삼았다. 무인 아닌 문인들이 펼치는 다툼은 겉으로는 권력쟁취  투쟁으로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지식논쟁>이었지.

건강한 짝춤

경연, 홍문관, 유생 등의 활동은 집단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왕에게는 위협적이었고 크게 주목을 받았다. 관리나 대간들의 집단활동은 우선 자율적이었고 행동방식이 매우 건강했다. 싸움이 건강할 수 있었다면 그 배경은 무엇인가? 싸움의 언저리에서 제고, 환경, 사람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다. 참여자들의 가치관으로 면면히 내려오고 있는 것들은 사실상 조선시대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가치들이다. 혁명으로 세운 조선 초기에는 그 당시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중요했다. 혁명 <의미의 공동인식>을 바탕으로 국가사회 발전의 <공동시동>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는 국가전략상으로서도 사회문화적인 소셜디자인이 중요했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써 문화가치를 활용했으니 얼마나 건강한가. 정치 목정이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벌이거나 세력장악을 위한 원시 투쟁이 아니었다. 공동체 문화가치를 확산시켜 혁명으로 세운 땅에서 뿌리내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회관계자본의 디딤돌

주요 소통제도는 전반적으로 근세조선의 권력과 사회문화 순화에 기여했다. 혁명으로 일으킨 전환기 소용돌이 환경에서 무엇보다 공공성을 중요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정운영 안정을 위해 건강한 비판과 상호 관계를 창의적으로 제도화했다. 오늘날 서양사회에서 이혼화 한 <사회적 자본>은 이미 그 당시 조선에서 훌륭하게 구축되어 있었던 터이다. 신뢰, 호혜성, 네트워크와 같은 사회적 자본은 현대적 관점으로 전환하면서 미래사회 공진화로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가능성도 있다. 우리 사회가 지속발전하는데 공진화는 중요한데, 이는 근세조선 이후 우리 사회나 구성원들의 DNA로 잘 형성되어 있다고 본다. 지역사회 문화활동, 교육학습활동으로 이를 잘 키워나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조선왕조실록 '아니 되옵니다' 6만 5천 번 등장

우리는 역사드라마를 볼 때 '아니 되옵니다'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듣는다. 늙수그레한 원로대신이 한 발 앞으로 나서서 근엄하게 임금에게 진언을 한다. 그러고 나면 신하들이 벌떼처럼 함께 따라 외치는 모습이 넓은 화면을 채운다. 오늘날은 듣기조차 힘든 이 말을 그 당시 언관들은 입에 달고 살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아니 되옵니다'가 6만 5천 번 이상 등장한다. 성종이 '언관들이 나를 손도 마음대로 놓지 못하게 할 정도'라고 투덜거릴 정도이다. <성종실록 95권, 성종 9년 8월>

지적 토론 즐긴 '아니 되옵니다' 왕의 품격

서슬 퍼런 근세조선의 관리들이 절대왕권에서 할 말을 다 하면서도 자기 자리를 지켜 냈다는 사실을 오늘날 받아들여야 할까. 무지막지한 권력을 갖는 왕의 면전에 외쳐대는 '아니 되옵니다'는 매우 위험하지만 통했고 뒤탈도 적었다. 관리들은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을까. 서둘러 답을 내리자면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왕이었다. 그들의 외침은 왕을 인격적으로 통제하려는 것도, 관리집단의 정치적 항거도 아니었다. 원로들의 외침은 왕이 <왕답게> 국정을 이끌어 가게 하여는 순수한 절규였다. 책임 있는 지식관리인들이 자기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것뿐이었다. 이것이 왕명에 거역하는 것이 아니기에 왕은 그들의 외침을 어여삐 여겼다. 무엇이, 왜 아니 되는지를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지적인 토론 마당이었기에 왕도 같이 즐겼다. 이것이 <왕의 품격>이었고 당시 <사회의 문화>였다.

참고문헌_ 동해학 아카데미, 글 이흥재(전 추계예술대학교 교수), 기획 조연섭
문화학당_둘 : 동해시의 선사 및 고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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