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근 전 동해해수청장 '구술' 비화!

5. 브런치스토리 매거진 구술사 여행

by 조연섭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프로젝트에 구술자로 참여한 홍근 전 동해지방해양수산청장“기억 속으로 사라질 뻔 한 묵호항의 역사를 생애사 기록하듯 삶을 돌아보는 소중한 기회였다.”라고 했다. 구술자와 인연은 필자가 근무하는 동해문화원 지역학 아카데미 <문화학당> 강사로 참여 강의에서 보여준 <묵호항 역사와 변천사에 대한 특별한 경험과 지식> 강의였다.

세계명작 소설, ‘큰바위 얼굴’로 꿈 키워

김은정 기록가가 기록과 진행을 담당한 이번 구술에서 구술자는 6.25 사변 중인 1952년 동해 송정에서 한학자인 홍순휴 춘부와 김월계 어머니 사이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고 했다. 전쟁 중에 태어났지만 유난히 유연시절 고향의 기억이 선명했다. 살던 집은 400년 집성촌이며 택호는 <질가집>이다. 집안 중간 종손집으로 제사도 많고 명절에는 집에 찾아오는 할아버지 문하 유생들도 많았다고 기억하신다. 구술자는 어린 시절부터 큰 꿈이 있었다고 한다. 미국 호손의 세계명작 소설 <큰 바위 얼굴>을 읽고 구술자는 지역의 명산 두타산이 <큰 바위 얼굴>처럼 들어왔다며 그때부터 가진 꿈이 있었다. 그 꿈은 바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7월 21일 오후 동해문화원 청운실 가설 스튜디오에서 묵호항을 주제로 구술을 마치고 오종식 동해문화원장 요청으로 지인이 참석한 식사자리에서 합류하게 됐다. 자리에서 구술자는 <내 평생 잊지 못할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며 기회를 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동해문화원 관계자에게 감사의 의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필자는 실무 책임자로 구술에 참여한 부분도 고맙고 사회적 성과에 해당하는 구술자의 구술 소감 과정도 중요하다는 판단에 추가 인터뷰를 약속 했다. 며칠뒤 성장과정을 시작해 소감중심 인터뷰를 진행하게 했다. 도착된 30쪽 넘는 분량 답변 중 질문내용별 주요 답변을 요약 정리한다.

Q1. 구술자님 성장과정이 궁금합니다.
구술자 홍근 전 동해해수청장

어릴 적 송정국민학교는 삼척비행장옆, 송정해수욕장 옆에 있었는데 3층짜리 일본식 건물이었어요. 학교 벽면에는 붙임나무 풀 들이 얽혀있는 건물 안에서 공부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5, 6 학년쯤 가을에 여느 때와 같이 겨울 준비를 위한 나무를 하러 북평읍 용정리 뒷산에 어머니와 함께 갔어요. 우리 집 산에는 나무가 거의 없는데 옆집 산에는 나무가 무성하여 그곳에서 나무를 해서 지게에 지고 내려오는데 그 옆집에 사는 어르신 한분이 오셔서 내 나무며 지게며 모두 잘라버리고 나를 지게 잣대기로 마구 때렸지요. 울면서 내려오면서 다짐을 했어요 앞으로 내가 커서 그 집에 원수 갚을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기로 했지요. 후로 그 집 뒷산이 우리 조상님 산이라 성묘 갈 때마다 돌을 던지고 지붕이 함석인 그 집에 돌이고 나무고 시간 날 때마다 던지면서 쨍한 소리에 희열을 느꼈지요. 그리고 그 집에 악귀가 들어가기만을 기도 했지요.

원수, 결혼으로 갚다. 홍근 전 동해해수청장

어느덧 세월이 흘러 제가 결혼 적령기가 되었는데 아버님이 맞선 보라기에 누구 집 규수냐고 물으니 바로 내가 원수로 삼았던 그 집 딸로 셋째 딸이라고 하더군요. 이 무슨 일이랍니까. 그전 일은 어머님과 나만 아는 일이라 이것도 나의 운명인가 보다 하고 선을 보고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 선보고 다음 만날 날을 약속하고 헤어 젔는데 저는 그만 깜박하고 그 약속날 친구들과 술 마시다가 그 장소에 못 갔지요. 그 색시는 그냥 바람맞은 거였어요. 핸드폰도 없는 때라 만남은 불발되었고, 다음 날 그 처녀가 우리 어머님께 일반 전화로 연락해 왜 약속 안 지켰느냐고 항의하는 바람에 날자를 정해 다시 만나게 되어 정중하게 사과하고 인연인지 필연인지 그날 이후 데이트가 시작됐어요.

다음 해인 1979년 1월 6일 결혼하고 현재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원수는 제대로 갚고 살아가고 있는 거지요. 처가는 북평읍 용정리에 사시는 최순철 장항아 님의 2남 5녀 중 넷째인 최정희였어요. 결혼 후 장인님과 장모님은 저에게 많은 사랑을 주셨는데 특히 버섯과 누에고치를 많이 주셔서 제 몸이 약체였는데 많이 좋아지게 되었어요. 저는 슬하에 딸 둘을 두었는데 모두 결혼하여 아들들을 모두 낳고 서울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저의 어린 시절은 없었어요. 모든 게 없어요. 기억에서 없는 것 같아요. 부유하던 집안이 아버님 회사의 부도로 하루아침에 핍박한 생활이 시작되었지요. 국민학교는 정상적으로 졸업했지만 중학교는 1학년 중반 경 입학금 미납으로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지요. 집에서는 학교 간다고 나와서는 갈 곳이 없었어요. 기차역전에 다니거나 해수욕장 주변도 다니기도 하면서 방황생활을 하던 어느 날 송정국민학교 5, 6학년 당시 담임선생님이셨든 정광성 선생님을 만나 송정국민학교 6학년에 청강생으로 다시 학교에 다니다가 그다음 해에 겨우 중학교에 입학시험에 3등 이내까지는 등록금이 면제였다. 저는 그것을 못해 등록금을 어떻게든 내고 입학하게 되었고 방황 속에서도 무사히 졸업하게 되었지요.

저는 등록금 낼 돈도 없이 주변 도움으로 겨우 학교 갔으니 교과서 책 한 권 살 돈도 없고 수학여행 한번 못 가보고 휴일에는 농사짓고 농산물을 시장에서 싸게 받아 10㎞ 정도 떨어진 송정에서 묵호시장까지 리어카를 끌고 장사하면서 살아왔지요. 아쉬운 건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었지요. 그 후 삼척공업고등전문학교(5년제) 토목과에 입학하게 되었지요. 제가 현재에 있기에는 부모님 외 당시 북평읍장 하시던 삼촌(홍순혁)과 초등학교 교사이신 큰 형님(홍완식)의 도움으로 삼척공업고등전문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지요. 다행히 삼척공전 4학년(1971년) 어느 날 총무처에서 5급(지금의 9급) 건설부 토목직 채용 시험 공고가 있어 공채 시험에 응시하게 되었고 이때 시험공부하면서 처음으로 문제집을 사 공부하게 된 것이 적중하여 운 좋게 시험에 합격하게 된 것이지요.

1972년 7월 1일 건설부 태백산 국토건설국 묵호축항사무소에서 묵호항 항만건설분야 계획과 설계 및 공사감독 업무를 하는 공무원이 되었어요. 저는 취미로는 바둑을 자주 두곤 합니다. 군에서도 두었고 지금도 시간 나면 두곤 합니다. 운동은 뭐든지 좋아하지요. 겨울에는 스노 스키 타고, 봄가을에 수상스키, 여름에는 동해안에서 가끔 파도타기도 하지요 물론 테니스와 골프도 즐기고 있고요.

Q2. 구술자 선정 과정과 구술 소감?

처음 구술이라는 용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어요. 그 내용도 몰랐어요. 인터뷰로만 생각했었으니 준비라는 것도 없이 사실만을 얘기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면서도 이런 구술은 일정한 지위도 있으시고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으신 분들이나 하는 것이지 저 같은 사람이 이런 구술에 참여한다는 것이 조금은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관계자 분들을 만나 보니 촬영 장비며 조명이며 녹화 장치며 준비사항이 많은 것에 놀랐어요. 질문사항도 저 자신에 대한 출생부터 성장과정까지 다양하게 구술하게 되었어요. 구술한 결과는 저 자신에 대한 인생과 지역의 발전상에 대한 한 시대의 영상을 되돌려 보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구술하는 동안 저 자신의 70여 년 세월을 몇 번이나 되돌아보며, 저 같은 사람도 한 시대 일원으로 열심히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매슬로우의 “욕구이론”에서 5단계 “자아실현”이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라고도 생각되었어요. 한편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어요. 구술에 대한 준비는 제가 평소에 항만과 해양의 역사에 대한 자료를 그동안 국가기록원, 국회도서관, 해양수산부 도서관, 해양수산부 각 지방청 자료실 등에서 꾸준히 발굴하고 조사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기록도 남기고 후배 공무원에게도 자료를 남기고 한 자료가 있어서 그 자료를 중심으로 묵호항의 발전사에 대하여 준비했습니다. 구술자로 선정되는영광은 문화원 문화학당 강사로 초빙한 오종식문화원장의 추천으로 선정된 걸로 압니다.

Q3. 묵호항 변천사 기억이 궁금합니다?
묵호항은 작은 포구였다.

묵호항은 일반 해안의 작은 마을이었어요. 1929년 강원도의 요청으로 조선총독부에서 1930년부터 1932년까지 방파제 214m를 축조해 어항 기능이 시작되었어요. 그때 처음 등대가 설치되었는데 철탑등대가 설치되었지요. 그 후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총독부 경성토목출장소에서 방파제 550m를 국내 최초로 케이슨식 방파제를 삼척철도주식회사에서 시공하게 됐어요. 케이슨 무게가 200여 톤급으로 그 당시 장비로는 시공이 어려운 공법이 적용되었지요. 케이슨은 원산항에서 제작 예인되었다고는 전해지고 있으나 그 근거는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 묵호항 개발계획은 항만개발 목적이 아닌 총독부 조선군참모장(조참비 제245호)과 진해요항부사령관(해군대신 통첩)에게 1937년 4월 8일 통첩한 자료에 의하면 부산항, 여수항, 묵호항, 청진서항의 개발계획을 통첩한 것으로 보아 군사시설용으로 개발된 것으로 조선총독부 자료(군사회계자료) 조사 결과 밝혀진 것이지요.

그러나 방파제 마루높이가 (+) 2.5m로 낮아 큰 파도가 오게 되면 월파는 기본이고 파랑의 처오름 높이가 100m 정도 올라가는 등 관광객에게는 볼거리가 되지만 인근 선박과 어선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고 살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도 파도가 없는 날이 더 많아 항만운영은 계속되었지요. 그때는 석탄반출부두 2 선석과 중앙부두가 접안시설의 전부였지요. 그래서 부두 확장을 요구하게 된 것이지요

Q4. 대통령 참석 행사가 있었다면서요?

당시 삼척군 북평읍 삼화리에 있는 쌍용시멘트 공장에서 생산되는 시멘트를 수송하기 위한 묵호항에 항만시설 축조공사가 1968년 착공하여 1971년도에 제3부두 시멘트부두 10,000만 톤급 선박 2척이 접안하는 시설이 준공되어 준공식이 있었는데 그 행사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참석하는 행사였어요. 그만큼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가장 큰 부두가 탄생하는 뜻깊은 날이었지요. 당시 공사 감독하는 공무원들은 허리에 거리 측정용 스틸테이프를 차고 행사장 검문소를 통과하다가 큰 봉변을 당하곤 했지요. 그 정도로 항만출입이 일반인에게는 어렵지요. 항만이란 개항장의 경우에는 해외로 분류되기 때문에 허가받지 아니한 자는 출입할 수 없는 지역이기 때문에 지금도 일반인 들은 항만에 출입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당시 묵호항은 외국 선박들이 많이 들어와 선원들은 육지에서 필요한 선용품을 구입하고 식용품과 쇼핑을 하는 경우가 많아 경제가 좋았어요 묵호에는 백화점도 있었고 영화관도 많았고요 홍등가도 있었지요.

Q5. 묵호항 당시 모습과 분위기가 궁금해요?

묵호항 환경의 문제는 이제부터였어요. 석탄 하역 시 묵호항역 하치장의 위치가 높아 높은 곳에서 하역하면 석탄가루가 날려서 묵호항 인근마을 전체가 석탄가루로 뒤 덮여 저요. 마을에서는 빨래를 널어놓을 수 없다고 하고, 장독대를 열어놓지 못한다고 하기도 하고 건강문제도 대두되었어요. 석탄작업 시뿐만 아니라 석탄야적장에서 바람에 의한 비산이 심각하게 되었어요. 노천에 석탄을 야적했으니까요. 그래도 국가가 하는 업무라 일반인으로서 감래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조선시대 부임해 온 묵호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 옹 부사>도 검은 호수가 되리라는 것을 누가 미리 알았을까요. 이후 석탄부두 야적장의 무연탄의 비산 방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시 동해항만청(지금의 동해지방해양수산청) 기술직 공무원들이 각종 제안으로 결정한 것이 건물을 지어 천장을 설치하기로 했어요. 예산을 확보하고 공무원들이 직접 구조계산과 건물배치 응력계산 등을 하여 상옥을 설치하여 운영함으로써 묵호항에 날리던 검은 무연탄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어요.

얼마 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였어요. 겨울에 많은 눈이 내려 지붕에 내린 눈이 일부 녹아 물이 되어 흐르다 얼어붙어 지붕 위에 얼음이 가득하여 건물이 무너지는 것이에요. 이를 다시 보완 시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지요. 당시 묵호항의 위상은 강원도에서 생산되는 무연탄을 전국의 항만에 운송하고 쌍용양회에서 생산하는 시멘트를 국내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국가에 수출하기 위한 국내외 선박이 입출항이 많았던 무연탄 최대 수출항이었지요. 묵호항은 1940년도에 축조한 방파제로 단면높이가 낮아 월파가 심하여 한내 정온도 유지가 어려웠고 항로가 너무 넓어 여름 태풍철이면 항내 피해가 많아 항만 운영에 지장이 많은 상태였어요. 방파제 연장사업과 방파제 단면 증고가 필요했고 무연탄 부두 확충과 시멘트 부두 확충 사업이 중요하게 대두되던 시기였죠. 이때 묵호항의 중요도가 높아 집중 개발이 시작됐어요.

국내 최초로 1976년 IBRD 차관 자금을 도입하여 부산항 1단계 컨테이너 부두 개발사업과 묵호항 방파제 보강, 석탄반출부두 자동화 시설 설치 사업이 국내 최초로 진행됐어요. 묵호항은 “묵호지방해양항만청 묵호축항사무소”라는 새로운 조직이 탄생하여 묵호항의 방파제 788m를 마루높이 DL(+) 2.5m에서 DL (+) 5.0m 보강하게 되어 월파에 의한 항내정온도를 확보하고, 석탄반출부두를 기존 3,000톤급 선박 2척의 접안능력을 6,000톤급 2척으로 부두의 수심을 증심하고, 선적은 리크레이머 장비로 자동으로 벨트컨베이어에 적재 운송하면 쉽로더 장비로 선박에 자동으로 선적하게 되는 시설을 설치하게 됐어요.

이로서 하역능력은 무연탄이 140만 톤/년에서 300만 톤/년으로 증가하게 된 것이죠. 또한 방파제를 보강하게 되어 시멘트부두 1만 톤급 부두 2척을 동시 접안 가능하게 되어 전체 접안능력이 450만 톤/년에서 650만 톤/년으로 증가하게 되었어요. 이 사업은 1976년부터 1979년도 까지 시행하였으며 설계는 미국의 라이언 회사에서 하고 감리는 미국인 감리자가 있었고 묵호축항사무소에서 감독을 하게 되었고 저는 방파제 보강, 석탄반출부두 확충 등의 감독업무를 담당했어요.

Q6. 묵호항 미래를 예측한다면?
관광항으로 변화를 기원합니다.

묵호항은 당초 어항으로 발전해 왔었지요. 이 항은 어황이 좋을 때 강아지도 만원 권 돈을 물고 다닌다고 했고요. 묵호항이나 묵호역 앞 등에서도 생선을 연탄불로 구워 팔고 했었지요. 그때는 모든 어획물이 많았던 시절로 기억합니다. 그 후 상업항 중심이 되었다 이제는 묵호항 기능은 축소되고 그 기능이 동해항으로 이전되어야 합니다. 묵호항은 항만 재개발 1단계 사업이 완공되어 어항과 관광 중심항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2단계 재개발 사업이 조속히 추진되어 명실상부한 관광항으로 변해가도록 기원하겠습니다.

Q7. 묵호항의 특별한 추억이 있을까요?
동해항 3단계 미래설계도 참여

중학교 때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 구경하러 묵호극장에 가게 되면 우리는 송정에서 10㎞를 걸어서 극장 갔다가 걸어서 송정까지 가고, 농산물 장사하러 묵호까지 리어카를 끌던 놈이 바로 이곳 묵호항에서 공무원이 되었다는 것은 저로서는 대단한 성공이라고 봅니다. 저는 묵호에서 공무원의 첫발을 디디었고 묵호항 신혼예식장(묵호역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묵호 은행 앞 로터리옆 동산의원에서 큰딸 작은딸 출산하고 10여 년을 살았기 때문에 특별한 추억의 장소 일뿐만 아니라 황금 시기에 살았던 곳입니다. 또한 저는 국가공무원으로 묵호항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하여 서울에서 근무하다 다시 과장으로 승진하여 동해항에서 근무하고 또다시 부산항만청, 마산항만청, 제주항만청, 여수건설사무소장, 인천시청 경제협력관, 해양수산부 건설과장을 보임한 후 다시 2003년도에 동해지방해양수산청 청장으로 부임하여 2005년까지 근무하게 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영광된 위치에 근무하게 된 것이지요. 특히 강원도 전반의 항만과 어항의 개발, 항만의 운영 및 어촌에 대한 지도 등의 업무를 하게 되었지요. 특히 항만 운영선사, 대리점, 화주 등과의 대화, 강원도내 각 항만의 등대시설 증설과 개량, 항내 어항시설 확충, 강원도 각 어항의 어촌계원 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어민들의 애로사항을 많이 듣고 조금씩이나마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것들이 기억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중앙부처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고향 동해시에 소제한 동해지방해양수산청에 모두 3번 근무하게 된 것이지요. 저에게는 고향 발전을 위한 업무에 기여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공직을 마치고 인천항만공사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기존의 인천항 발전과 인천신항만의 새로운 사업의 개발을 위하여 3년간 근무하고 공직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항만기술자로서 항만설계 엔지니어로써 활동하고 있으며, 동해항 3단계 개발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용역은 엔지니어로 참여하여 동해항개발을 위한 미래설계에도 참여한 바 있습니다.

08. 구술 총평을 하신다면?
자서전을 능가하는 영상기록에 감사

본인은 공학도로서 평소 고향의 동해문화원의 발전을 쭉 지켜봤습니다. 특히 묵호항을 배경으로 조성한 문화재생사례 <논골담길>은 지역문화원이 보여주기 힘든 사회적 성과라고 생각해요. 이외에도 다양한 사업의 결과로 2015년 대한민국문화원상 대상 수상에 빛나는 내 고향 동해문화원의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에 참여하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꼈어요. 다른 분들은 자기 자서전을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시는데 저는 이번 구술을 하면서 제가 자서전에서 하고 싶었던 모든 내용들을 다 이야기한 것 같아 제 개인적으로는 매우 영광 일 뿐만 아니라 <지역 N문화>, 포털과 국가기록에도 실린다는 영상으로 제 개인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개인이 사비를 들인다고 하여도 이렇게 까지는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을 받아 매우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이번 구술 행사를 주관하신 분 들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김은정 기록가, 홍근 구술자, 구술 영상 캡쳐
다음은 기록과 진행을 담당했던 시민 기록가 <김은정> 씨의 기록 소감입니다.

선생님께서 아주 적극적이고 능숙하게 구술을 진행해 주셨습니다. 자료 준비도 얼마나 많이 해주셨는지 미쳐 정리를 못 할 정도였어요. 면담 전후 자료에 대한 설명도 자세하게 해 주시고 굉장히 호의적이셨습니다.

또 재차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면담 준비와 나중에 결과물 영상을 보면서 구술자가 얼마나 이 면담에 진지하게 임해 주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나가는 말
힘든 여정이었지만 체계적인 프로그램은 사회적 성과!

구술자로 참여해 주신 <홍근 전 동해해수청장님>과의 구술이야기와 공개 못한 일부 뒷 이야기를 정리했다. 이 프로젝트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지원하고 동해문화원이 주관하며 정혜경박사(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와 김선정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정보실장)등 구술 1세대와 아카이브 1세대가 컨설턴트로 참여하는 시민기록가 양성 중심의 국고공모사업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이다. 함께 수고해 주신 연합회 김태현 팀장, 김지은 주임, 동해문화원 오종식 원장님, 김정숙, 강경자, 곽영경, 김은미, 김은정, 박은미, 이재경, 이현주, 최은경, 허지원 10명의 시민기록가, 20여 명의 구술자와 담당 직원 윤계주 부장, 전담 최진석 PM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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