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인권, 종교 - <<성경적 비판이론>> 11장을 읽고.
방학이 되면 아이들은 학교 수업으로부터 해방되는 기쁨을 느낀다. 수능이 끝나면 대학이라는 '자유'가 찾아오나, 금세 '취업'이라는 다음 장벽을 뚫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어렵사리 취업에 성공하면 이직이라는 해방을 꿈꾸고 이직을 전전하다 보면 소위 파이어족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누군가는 세금으로부터 해방을 원하고, 누군가는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한다. 이처럼 우리는 현대사회를 살면서 고대의 파라오와 같은 명시적인 압제자가 없는 것 같은 삶을 살면서도 끊임없이 해방을 원하고, 해방을 원하는 것을 넘어서 여기저기에 압제자가 있다는 목소리를 낸다. 나는 어디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것일까? 그리고 어디까지 해방되어야 하는 것일까?
저자는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가 그의 저서 <<포스트모던의 조건>>(The Postmodern Condition)에서 현대 세계의 두 가지 커다란 메타 내러티브 중 하나를 소위 "해방 서사"라고 이야기했다는 점을 설명한다. '메타 내러티브'(Metanarrative)란 특정 사회의 주요 이념, 경험, 지식이 적절하다거나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하는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또는 '거대 담론'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삶을 방향 짓고 세계관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는 세상의 지배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서사"에서 인간은 자유를 쟁취하고 자유를 불러오는 영웅이다. 즉, 과학과 기술 문명의 발전이 우리를 점점 더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러한 해방 서사의 원조격인 이야기는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이다.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로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을 모세가 홍해를 가르며 해방시키는 이야기는 압제자로부터 벗어난 해방감을 맛보게 하는 이야기이고, 우리나라와 같이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에는 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이다. 반면에 현대성 안에서 해방은 점차 주도적인 문화적 내러티브가 되어 "모든 상황을 압제자와 피압제자의 관점으로 해석해-피압제자의 투쟁을 구속 도구로 해석하는 경향을 갖는" 사회적 전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듯이, 해방 서사를 품고 사는 사회는 모든 것이 해방되어야 할 억압적 상황으로 보일 것이다."
정치 문화에서는 좌파와 우파가 모두 그들의 정책을 해방이라는 언어로 포장한다. "우익의 자유주의와 좌익의 해방 정치학은 모두 동일한 출애굽이라는 우물에서 물을 긷는다. 우파는 거대 정부와 높은 세금, 규제와 관료주의의 형식적 절차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고 싶어 한다. 좌파는 사회적으로 불공정한 편견, 오랜 불평등과 억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파는 "규제와 정부로부터 해방되면, 개인과 기관은 시장의 가혹하고 잔인한 지배의 먹이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좌파는 "역사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종종 종교재판과 같은 종교적 열정을 강요"하여 "그들이 허물고자 하는 낡은 구조와 마찬가지로 잔혹한 배제와 추방을 수반"하면서 이뤄진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즉 '해방'을 약속하는 그들의 언어에는 늘 허점이 존재한다.
"해방 서사"의 뿌리를 잃어버리고 나면, 모든 것이 압제와 피압제의 구조로 해석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특정한 왜곡현상을 불러오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참혹하게 파괴된 세계질서 속에서 선언된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 제1조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와 평등한 권리와 존엄을 가지며, 이성과 양심을 가졌다."라고 선포하면서 현실과의 깊은 괴리에도 불구하고 해방의 가능성, 자유의 가능성을 이야기하였다. 당시에 자유와 평등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음에도 그러한 선언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분명히 기독교 및 계몽주의의 원시적인 진리라는 뿌리가 있었다.
그러나 "1966년 유엔이 제정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과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이후, 교육, 고용, 사회복지 프로그램과 그 외 공공생활의 각종 형태와 장에서의 인종, 종교, 성별에 대한 차별을 목표로 하여 각종의 국제 및 국가 문헌들이 발행되었고, 다양한 국가들 안에서 고유한 인권운동이 일어났다." "인권은 불과 한 세대만에 전후 세계질서의 새로운 '시민신앙'(civic faith)이 되었다."(<<권리와 자유의 역사>>, 존 위티 주니어, IVP, pp. 535.)
존 위티 주니어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종교의 특별한 역할과 권리에 대한 무시는 오늘날 법과 인권에 대한 공통적 이론에서 왜곡 현상을 초래했다(같은 책, pp536-538).
1. 종교를 무시하는 것은 많은 권리들이 그 근원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종교를 개인이 믿을 권리는 필연적으로 집회의 권리, 발언의 권리, 예배의 권리, 전도의 권리, 교육의 권리, 자녀양육의 권리, 이동의 권리, 또는 자신의 믿음에 따라 이런 것들을 하지 않을 권리를 수반한다. 종교적 권리들을 무시하는 것은 다른 많은 개인 및 집단 적 권리들의 개념적, 역사적 근원을 간과하는 것이다.
2. 종교를 무시하는 것은 인권제도가 무제한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결과를 초래한다. 고전적인 경전의 종교들은 종교적 의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권을 채택하고 옹호한다. 종교적 권리들은 권리와 의무, 주관적 권리와 객관적 권리 간의 유기적 연결고리의 가장 좋은 예를 제시한다. 이 연결고리가 없으면 권리는 추상적이게 되고, 그 행사와 확장에서 명백한 제한이 사라지게 된다.
3. 종교를 무시하는 것은 국가에게 인권 보장의 과장된 역할을 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많은 근대 인권 이론에서 보이는 단순한 국가 대 개인이라는 논증법은 국가에게 모든 종류의 권리를 보호할 역할을 부여한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국가는 그렇게 전능하지도 않고, 전능할 수도 없다. 국가와 개인 사이에는 많은 '중재 구조'가 필요하며, 종교기관은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종교기관들은 권리를 배양하고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오늘날 해방되어야 한다고 믿는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세력화되기도 하고, 양 정당은 서로를 해방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여기면서 자신을 압제자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올 존재로 묘사하고 자유를 약속한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에 관하여, 그리고 그 목적인 인권에 관하여 우리는 또한 근본적으로 아무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상태를 추구함으로써 끊임없는 대립상태를 가져온다. 홉스가 이야기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는 현재도 지속되고 있고, 대립과 억압의 주체도 너무나 다양해져서 위와 같은 서양의 해방 서사 이야기나 인권에 관한 뿌리를 돌아보는 일이 낡고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되어버리기도 하였다.
각자도생의 시대에서 '자유와 평등한 권리와 존엄'을 가졌다는 말은 '내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다로 대체되었다. 해방의 주체도, 객체도 모호해진 세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AI를 위시한 기술과 그 기술 및 기술을 둘러싼 윤리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전체 인류의 판도를 바꾸는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해방 서사든, 인권제도든 무제한적인 해방, 무제한적인 확장은 권리와 의무, 주관적 권리와 객관적 권리의 연결고리를 약화시키고 해체시킨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마치 보이지 않는 세계 대전의 와중에 있는 상태와도 같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과학기술의 발전이 유토피아를 가져올 것이라는, 혹은 인간의 혁명이 유토피아를 가져올 것이라는 신념이 팽배했으나, 인류가 보여준 전쟁과 분열은 그 모든 믿음을 한 순간에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술의 진보가 우리를 더욱더 자유롭게 하리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하여 '각자' 논의하는 시대를 지나 '공통'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서, 나만 잘 살면 장땡인 사회에서 누군가를 걱정하고 포용하는 사회로 가기 위해서, 어쩌면 우리는 "근대의 권리제도에 대한 계몽주의적 자유주의의 기본적인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또 계몽운동보다 수백 년, 심지어 1000여 년 전부터 내려온 종교적 문헌과 전통들에서 많은 근대 권리 규범들의 깊은 근원과 정신들 또한 보아야"하지 않을까? "오랫동안 전통적인 종교원칙들에서 제거되었으나, 회상해 보면 오늘날 이 전통이 가질 수 있는 권리의 역할을 예견했던 반대론의 선지자적 목소리들"로 돌아가보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되지 않을까. 다시 한번,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은 나와 그들 사이가 아니라 나와 그들을 관통하여 지나가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