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결과를 용서하고 넘어서기 - <<성경적 비판이론>> 14장을 읽고
많은 경우에 우리는 삶의 실패를 맛보고, 그 실패를 해석하는 데에도 실패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실패를 걱정하지 않는 데에도 실패하고, 실패의 원인과 결과를 이어주는 실을 찾아내려고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해수욕장의 온 모래사장을 뒤지고 다니기도 한다. 아, 모래사장을 뒤지고 다닌 이야기는 실제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아내와 해질 무렵 해수욕장을 걷다가 해가 완전히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이 뒷주머니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밀려오는 파도를 피하려고 뛰는 와중에 핸드폰이 빠져나갔다고 생각한 우리는 핸드폰 불빛에 의존해 만조로 물이 점점 들어오고 있는 해변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잃어버렸을지를 안다면 어디서 찾을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파도는 거세졌고 모든 것을 삼켜서 저 컴컴한 바다로 끌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30분여의 수색을 끝으로 핸드폰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 자체를 잃어버린 것보다, 그 안의 아이 사진을 잃어버린 것이 더 슬펐다. 아내는 깊은 한숨과 좌절로 신음하다가 잠이 들었다.
여기에서 드는 의문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그 상황에서 무어라 기도할 수 있을까? 내가 부주의하여 잃어버린 핸드폰이 그 검은 바다와 파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아있기를? 바다에 쓸려간 핸드폰이 제대로 작동하리라는 기대는 헛된 것으로 보였다. 결국은 우리의 실수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아, 다시는 핸드폰을 가지고 해변가에는 가서는 안되고, 핸드폰의 모든 사진은 백업을 잘해두어야 한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사람의 심정은 마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사람의 심정이 되는구나. 참으로 애석하다." 정도가 우리가 그 사태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음날 새벽 그 핸드폰 번호로 전화가 온 것이다! 새벽 아직 미명에 우리는 슬리퍼만 걸쳐 신고 달리고 또 달려서 핸드폰을 받으러 갔다. 달려가면서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건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런 고백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그 핸드폰을 찾아주신 분은 사례마저 받지 않겠다고 하시고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무언가 쪽지를 주시고 가셨다. 핸드폰은 정말 멀쩡하게 작동했고, 지금까지도 아무런 문제 없이 작동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기쁘고 놀라서 어디에서 핸드폰을 찾았는지도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분이 주신 쪽지에는 어느 '사이비 종교'의 '인생에 도움 되는 말'이 들어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참 기묘하다. 우리의 탓인지, 이 일을 통해서 기적을 체험했다고 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찾게 해 주신 것인지, 마지막의 쪽지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지 원인과 결과를 알기 어렵고 우리의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이런 혼란스러움은 삶에 대한 해석, 즉 모델링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든다. 한 가지 모델만으로는(예컨대 인과관계의 법칙) 어떤 삶의 사건과 우리의 경험을 다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삶은 복잡하다.
그래서 우리는 저자가 "다관점주의(multiperspectivalism)'이라고 부르는 성경의 한 특징에 대해서 고민해 보게 된다. 성경에도 무언가 상호 대조적인 관점들이 "축소할 수 없는 긴장, 곧 생에 대한 긍정적 비전과 제거할 수 없는 그 반대 증언"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성경 중 동일하게 '지혜서'로 분류되는 잠언과 전도서가 그렇다. "좀 더 자자, 좀 더 눕자 하면 가난이 도적같이 온다"는 잠언의 말처럼, 잠언은 "우리가 지혜로운 결정을 하면 우리 일이 잘 풀릴 것이고, 어리석은 결정을 하면 일을 망칠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성경이다. 인과관계, 노력과 배신하지 않는 결과에 대한 이야기는 현대인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내용이기에, 우리는 잠언을 특히 시험을 앞두고 읽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전도서는 "우리가 지혜로운 결정을 하든지 어리석은 결정을 하든지 실제로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악한 자들은 번성하고 지혜로운 자들은 고통당할 것이며, 우리 모두는 늙어서 곧 죽게 될 것이므로, 우리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즐기며 사는 편이 낫기 때문이며, 인생은 결코 잡을 수 없는 바람을 잡으려는 거대한 무언극과 같기 때문이다."
잠언의 체계와 형식, 명료성은 전도서의 예외성, 모호성, 이론으로 잡을 수 없는 모순성과 같은 것들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먼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진짜 문제는 세상이 불합리하기 때문이거나"(전도서) "심지어 합리적이라는 데 있지 않(잠언)"고, "가장 공통된 문제는 세상이 거의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모델화된 것은 항상 모델을 넘어선다." 즉, 모델의 대상인 삶은 항상 모델을 뛰어넘는 복잡성을 보여준다.
C. S. 루이스는 다층적 설명의 가능성에 대하여, 먼 산들의 푸르름은 빛의 산란 현상이며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푸르게 보인다고 설명한다. 이는 폴 리쾨르가 말하는 소위 "일치적 부조화", 혹은 "불일치적 조화"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이때 "세계에 대한 관점을 평가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이 실제의 다중적 측면, 곧 경험적, 역사적, 상상적, 철학적, 정서적 측면을 효과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지, 아니면 다른 모든 관점을 몰아서 하나의 탯줄 안에 집어넣으려고 하는지 점검해 보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점이 실제로 파편화된 것인지 아니면 조화 속의 부조화에 해당하는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까다로운 일일 수 있지만, "동일한 것을 설명하는 정당한 방식이 하나 이상 있을 수 있다"라는 믿음은 기독교의 근본적 확신이다. C. S. 루이스는 말한다. "다른 모든 설명을 배제하지만 않는다면, 프로이트식 설명을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나는 아무런 반감이 없다."
저자는 그와 같은 통찰을 '다관점적(multi-perspectival)'인 것이라기보다는(즉, 다양한 관점이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상호배타적으로 공존하는 상태라기보다는) '통관점적(transperspectival)'인 것이라고 부른다. 이는 복수성만이 아니라 복수의 관점 가운데 유기적 통일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어떤 학문 관점도 모든 좋은 아이디어가 반드시 거쳐 가야만 하는 유일한 관문이 될 수 없다." "잠언과 전도서는 세상에 대한 두 개의 중요한 전망을 보여 주는데, 각각은 다른 하나 없이는 불완전한 지혜가 될 것이다."
다행히도 핸드폰을 찾았지만, 결말부는 미묘하다. 나에게는 여러 가지로 그 해수욕장 핸드폰 사건을 해석할만한 도구들이 있으나,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 우리가 '일치적 부조화' 또는 '불일치적 조화'가 이루어지는 삶의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삶은 절대 인과관계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가 반드시 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주장을 조금 완화해서 '확률적으로' 더 결과를 가져온다거나, 조금 뒤로 물러서서 '어찌 되었든 노력이 전혀 없었다면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었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노력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힘 때문인가? 설령 그 결과가 나에게 오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실패'한 것인가? 삶에 대한 일원적 해석은 과도한 집착과 보상심리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내가 원하는 그 결과 또한 결코 잡을 수 없는 바람과도 같이 지나가고, 나는 또 다른 매일을 살아내야 하는 굴레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반대로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과거를 용서하고 돌아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 결과를 이룬 사람(예를 들면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니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것은 또다시 결과주의라는 단일 관점(mono-perspective) 안에 상대를 가두는 꼴이 된다고 생각한다. 변호사가 되어서도 죽을 만큼 힘든 사람들은 '변호사'라는 관점에 갇혀 고통을 호소할 길이 영영 사라진다. 누군가에겐 배부른 소리일 수 있으나, 어떤 이는 정말 심각한 병을 얻고 병마와 싸우고 있을 수 있다. 숲만 봐서는 결코 나무에 붙은 해충을 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조화다. 노력을 할 때, 나는 왜 노력하는가? 두려움 때문인가, 혹은 열정을 일으키는 다른 대상이 존재하는가? 결과를 볼 때, 나의 노력이라는 원인과의 인과관계는 얼마나 투명한가? 나는 그것을 진짜로 투명하게 읽어낼 수 있나?
한 책에서 인생의 성취의 50%는 그 사람이 어느 나라에 태어났느냐에 따라서 정해진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그 사실이 곧장, 나의 노력의 가치를 무력화한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잠언과 전도서의 조화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태어난 국가가 차지하는 비중에 관한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노력을 왜 했는가, 노력의 대가는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인가, 혹은 누군가를 위해 그것을 사용할 하등의 이유가 나에게 있는가이다. 생계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여과 없이 하는 것 또한 다시 한번 조화에서 벗어난 일이 될 터이다. 오히려 생계를 고민하는 그자와 나는 함께할 수 있는가를 자신에게 묻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삶이 정말로 우리가 세운 어떤 모델보다도 복잡하다고 믿는다면, 통관점적인 지혜를 얻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한 인격체와의 관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