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다음 상품이 나타나기 전까지만-<<성경적 비판이론>> 13장을 읽고
최근에 나는 한 노트북에 말 그대로 푹 빠지고 말았다. 아는 사람들끼리는 그것을 '서피스병'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 약 1년 전에도 같은 병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나온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멀쩡히 잘만 작동하고 있는 (5년 전 내가 보기에 예뻐서 샀던) 노트북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면서도 여러 가지를 따지며 살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포기하기를 여러 차례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렇게까지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 사실 잘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냥 내가 보기에 너무 예쁘기 때문에 사고 싶은 것이다. 막상 그것이 왜 '필요한지'는 두 번째 문제가 된다. 첫 번째 문제는 내가 그것을 원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우리는 한 상품에 확 마음을 빼앗길 때가 있다. 시나브로 그것만 사면 내 삶이 좋아질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가 생겨난다. 그리고 어느새 그게 없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이 다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나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줄 것만 같은 바로 그것! 그것을 바로 살 능력이 없는 나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게 되고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그것을 가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끝끝내, 나는 그것을 쟁취하고 '결제' 버튼을 누르는 자유를 행사한다.
그래, 이 자유는 내가 누려 마땅한 자유이지 않은가? 고생하고 고민한 나에게 주는 '상'으로, 어떤 때는 나를 더 나아지게 해 줄 '투자'로, 나는 나에게 그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무나 설렌다. 택배가 오는 날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도착했는지 문 밖에 나가 확인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졌을 때의 황홀함이란! 아니 사실 그것이 나를 가졌을 때의 쾌감인가? 아무렴 어떠한가, 나는 지금 도파민의 절정을 맛보고 있는데. 나는 마침내 내가 바라던 더 나은 내가 되었는데. 그리고 한동안은 그것을 '향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다음 상품이 나타나면 도돌이표가 나를 이 갈망이 연주하는 악장의 첫 소절로 돌아가라고 지시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살펴보겠지만, 사실은 이러한 갈망은 아무런 자극 없이 저절로 생겨난 것도, 내 안에서만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무언가 "먹음직스럽고 보기에 아름답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으로 보이는 현상은 어떠한 대상과의 '상호작용'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위와 같은 경험을 할 때, 나는 어떠한 '마성'을 지닌 물건(혹은 특정 사람이든, 아이돌이든 무엇이든) 앞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마성'은 실제로 작동하는 현대판 '신과 귀신의 마력'이다. 우리는 마치 과학시대에 살면서 모든 주술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처럼, 즉 '탈주술화'된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지만(물론 우리나라는 그렇지도 않다. 수많은 샤먼과 점술과 사주풀이를 위해 길거리에 늘어선 점집을 보라), 그 어느 때보다도 커진 불확실성 앞에서 붙잡을 것이 없는지를 끊임없이 찾는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시대가 보통 상상하는 것보다 탈주술화가 훨씬 덜 되었거나, 혹은 탈주술화가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막스 베버는 1917년에 쓴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탈주술화'에 대해서 설명한다.
"우리는 고대인들이 신과 귀신의 마력이 아직 상실되지 않은 세계를 살았던 것처럼 산다. 단지 다른 방식으로 살뿐이다. 그리스 문명의 사람들이 때로는 아프로디테에게 제물을 바치고 때로는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쳤던 것처럼, 무엇보다 모든 사람이 자기 도시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역시도 그렇게 한다. 다만 인간의 태도에서 신비주의적이면서도 내적으로 진정한 유연성이 마력을 상실하고 벗겨졌을 뿐이다. ---오늘날에는 판에 박힌 일상이 종교에 도전이 되고 있다. 많은 옛 신들이 무덤에서 올라왔는데, 그들은 마법을 벗은 상태에서 비인격적 힘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베버가 보기에, '많은 옛 신들'은 지금에 와서는 체계화된 합리성의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경배받을 준비를 하고 돌아왔다. 그에게 있어서 '탈주술화'란 자연, 사회, 인간의 경험을 설명할 때 마법, 주술, 신비 대신에 이성적 설명, 계산, 규칙, 절차로 다루게 되는 합리화의 과정이다.
'탈주술화'가 나타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번개, 질병, 풍년을 주술, 신의 뜻이 아니라 과학적 인과의 결과로 보고, (2) 위험 관리와 상품의 판매는 기우제와 같은 제의의식이 아니라 통계, 보험, 수요예측으로 이루어지며, (3) 카리스마나 전통 대신 합리, 관료제에 따른 정당화를 따르게 되고, (4) 종교, 과학, 정치, 예술, 경제와 같은 각 영역이 각자 고유한 규범과 목표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우리가 '가치의 다신교'라고 볼만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신비의 영역은 줄어들고, 많은 신들의 이름이 잊힌 것처럼 보이나, 시장, 국가, 법, 데이터, 알고리즘 같은 '비인격적 힘'이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고, 우리는 거기에 시간, 에너지, 주의력을 '제물'처럼 바친다. 여기에 '탈주술화'의 아이러니가 있다. 우리는 또 다른 주술을 스스로에게 걸고 말았다. 바로 우리 스스로가 '탈주술화'되었다는 주술이다.
언제든 신의 자리는 절대로 공백으로 남아있지 않는다. 그 공백은 다른 무언가로 채워지게 된다. 따라서 "신이 전혀 없는 상태가 되고자 하는 시도는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일이고, 아무것도 경배하지 않을 수 있는 자기 능력이나 자기 절제 또는 무신론자로서의 미덕을 경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올리버 오도너번의 지적에 따르면, "다신교 사회는 응집력이 없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부과할 수 있는 여러 주장을 협상해 결국 자신의 주권을 집행한다. 후기 자유주의는 '복수주의'(pluralism)의 깃발을 치켜들고 스스로 자의식적으로 다신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리처드 보컴에 따르면, 신의 자리를 채운 것은 바로 '우상'(Idol)이다. 모든 우상은 그들 고유의 제의가 있다. 말하자면, 우상은 우리에게 "그들의 가치와 바라는 것을 매개해 전파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현대의 우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목소리가 크다. 그 우상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를 제도적으로 관리할 수단을 많이 갖추고 있다. 그 우상은 우리의 정보를 우리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상은 스스로를 광고한다. 이때 광고는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파생된 정체성을 접붙이기 위해 이 상품, 저 상품의 아우라에 의존해 재포장된 우리 자신을 우리에게 파는 것이다."
"광고가 생산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게 된 지는 오래되었다. 이제 광고는 상품과 상품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모든 종류의 희망하는 목표, 곧 자신감, 무결함, 기분 전환, 사랑, 안전, 능력, 자연스러움, 재미, 지위, 위안, 평화, 행복한 가족, 낭만적 사랑, 우정, 흥분, 스트레스로부터의 자유, 성적 매력, 개인적 매력, 건강, 젊음, 행복, 평온함을 연계시키는 기능을 한다."
<<슈퍼 브랜드의 불편한 진실>>(No Logo)의 저자인 나오미 클라인은 제품에서 브랜드로의 이동이 어떻게 회사가 제조한 실제 물품에 대한 강조를 제품이 구현해야 할 "영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삶의 방식, 태도, 가치관, 외양, 관념"으로 옮겨 가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브랜딩이란 사실 제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아의식을 회사 브랜드에 종속시킴으로써 '의미'와 '관계 설정'을 하는 것이다. 즉, "강력한 브랜드를 가진 모든 회사는 소비자의 자아의식에 전적으로 울림을 주는 관계를 구축하려 시도하며, 이로 인해 소비자는 브랜드라는 영주를 섬기는 농노가 되기를 선망하거나 최소한 그렇게 되는데 동의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탈주술화된 세계는 영적인 것을 의식하는 세계만큼이나 그들 나름의 우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일한 차이는 탈주술화된 세계는 자신이 그러한 미개한 미신으로부터 풀려났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숭배하는 것의 본질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택배가 도착하고 나서의 흥분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진다. 특히 그 물건이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못할 때는 더 심하다. 나는 이것보다는 더 큰 것을 바라고 돈을 지불하였건만, 그 물건은 나에게 약속한 무지갯빛 찬란한 약속을 지킬 힘이 없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애당초 무엇을 기대하고 갈망했던 것일까? 나의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단순히 '나의 자유'의 행사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점은 수많은 마케팅 업체 직원들의 폭로와 다큐멘터리에서 이미 보도된 바 있다. 그런데 그것이 일종의 '영적' 현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눈감는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이미 '탈주술화'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후기 근대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시대가 얼마나 파편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불안과 갈망과 과학과 샤먼과 광고를 엮어서 생각해 볼 틀이 필요하다.
찬찬히 심호흡을 하고 일관된 해석의 틀로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해보자. 명상을 하면서 내면으로 들어가 보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외부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우리를 종속시키려는 '우상'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최근에 손화철 교수님의 기사 글을 보다가 외주화와 종속화의 구별에 대해서 새로운 배움을 얻었다. '외주'는 '퀄리티 컨트롤'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내가 만들 수도 있지만 네가 만들어 더 싼 값에 만들어', 그리고 '잘못 만들었으면 너 이거 잘못됐으니까 다시 만들어' 이렇게 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외주라고 볼 수 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맡기는 것은 '종속'이다. 예를 들면 기술이 발전하면서 동시에 사람이 지니고 있던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디스킬링'(Deskilling)이라고 하는데, '종속'의 대표적인 예로 AI로 인해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이 디스킬링되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상품에 대한 저항성도 광고로 인해 디스킬링된 지 오래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상품을 구매한다고, 그리고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품하고 버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외주를 맡길 능력마저 박탈당하고 종속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옷을 사지만, 옷에게 나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외주를 맡기다 보면 나는 그것 없이는 아름다울 수 없는 종속된 사람이 되고 만다. 대안은 내가 나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먼저 발견하는 것이다. 나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줄 능력이 없는 '우상'에게 더 이상 값을 지불하지 않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도돌이표의 굴레에서 진정한 자유의 2악장으로 옮겨가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