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성의 스캔들 - <<성경적 비판이론>> 15장을 읽고.
아기를 키우다 보면, 가장 사랑받는 아이가 가장 잘 살아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아이는 전적으로,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이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먹는 것도 스스로 찾을 수 없어 그저 울 뿐이다. 그 울음의 의미를 민감하게 알아보고 적절한 반응을 주는 것은 부모의 몫이다. 그래서 아이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고 힘없는 존재였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부모 또한 우당탕탕 아이를 길러낸다. 어떻게 길러내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지만, 디테일한 부분을 빼고 접근하면 아이와의 애착관계 형성이 가장 핵심을 이룬다. 부모의 아기에 대한 헌신적이고 일관된 반응은 아이가 이 세상을 신뢰할만하다고 여기게 하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조건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기의 모습을 보다 보면 성육신, 즉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역사 속에서 아기로 태어났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특히, 예수님이 자신이 '진리'이고, 자신을 통해서 '아버지', 즉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대목에 다다르면, 우리는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과 '궁극적 진리'라는 표현 사이에서 무언가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저자는 이를 '근대성의 편견들'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우리 모두는 '근대성'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근대성'이 제공하는 사고의 틀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게 되기 마련이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성은 우리가 '궁극적 실재'라고 부르는 것, 실재를 이루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준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근대성은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세계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찰스 테일러는 이처럼 초월이 없는 세계 경험을 "내재적 틀(immanent frame)"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이해는 계속해서 살펴보겠지만 단순히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해석하는 틀을 제공한다. 그리고 저자는 근대성이 형성한 아래와 같은 기준들이 근대성이 제공한 "편견"이라고 주장한다.
1. 궁극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몰(沒) 역사적이어야 한다. 즉 그것은 모든 시대에 동등하게 유효하며 어떤 특정의 역사적 순간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2.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즉 그것은 어떤 특정 문화의 편을 들 수 없다.
3. 궁극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추상적이어야 한다. 즉 그것은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존재에 대한 이론이다.
4. 궁극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비인격적이어야 한다. 즉 그 추상적인 순수성은 인간의 어떤 편견으로도 오염될 수 없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우리가 궁극적인 실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해가 반드시 저렇게 형성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성'이 제시하는 편견들이 우리의 표준이 된 이유는 그것이 "명백하거나 상식적이거나 항상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던 길목에서 만나는 여러 갈림길 중에서 어떤 길을 택"하는 과정에서 도달하게 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꼭 그렇지 않을 수 있었고 다른 것일 수도 있었다. 아래에서는 그중 첫 번째 편견에 대하여 다루어보고자 한다.
니체는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가리켜 지칭한 '인자'라는 단어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인자'라는 개념은 역사에 속한 어떤 구체적인 사람, 어떤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영원한 사실성, 혹은 시간 개념으로부터 벗어나 환치(換置)된 심리학적 상징"이고, 성육신한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당신이 기다리는 어떤 것이 아니고, 그것은 어제나 내일, 모레가 있는 것이 아니고 '천 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속의 경험이므로 어느 곳에든 있거나 아무 데도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후벼 파는 비판을 마구 해댄 니체처럼 하이데거는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데살로니가 전서 5장 2절) 경고의 말씀을 재해석하려고 하면서 동일한 결론에 이른다. 즉, 주님의 날이 온다는 것은 어떤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실존적 결단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바울의 유대-기독교적 사상의 역사적, 시간적 용어를 몰역사적, 비시간적 그리스 용어로 바꿔 놓은"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주장하고 있는 성육신의 역사성은 철학과는 다르다. 성경은 '달력의 역사'안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12월 25일은 분명히 아니지만) 몇 월 며칠에 특정한 시간에 이 땅에 오셨다. '인자'는 역사에 속한 어떤 구체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기독교는 역사를 중요한 것으로 존중한다. 역사는 단순히 "끝없이 반복되는 사건들의 순환이거나 혼돈"이 아니다. 역사는 의미가 있고 선형적이다. 길처럼 그것은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가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가 어떤 방향이 있고 그냥 원으로 맴도는 것이 아니라는 개념은 보편적인 사고가 아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사고다."
또 한편으로는, 역사 자체가 전부는 아니다. 즉, 역사 바깥에서, 초월하는 이야기가 역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올리버 오도너번은 "역사가 모든 의미와 가치를 대변하는 단정적인 틀이 되어 버리면 그것은 역사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야기는 특정한 것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 모든 것이 이야기가 되면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 몰라 그 존재 이유가 없어져 버린다."라고 설명한다. 즉, 성육신은 "역사를 존엄하게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역사를 초월하는 이야기 또한 존엄하게 만든다."
위와 같은 성육신이라는 역사적인 사건, 예수님이 한 아이로 역사 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1) "한편으로는 역사를 순수하고 영원한 이론화에 중요하지 않은 방해물로 취급하는 태도"(니체와 하이데거의 태도)를 비판하고, (2)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동일한 땡처리 대상으로 취급해 버리는 태도"(초월적 이야기를 배제하는 태도)를 모두 부정한다.
(1) 이론가들은 몰역사적이고 몰시간적인 이론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체계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역사에 충분히 몰입하여 보게 되면 "이론가들이 세워 놓은 고상한 범주들"에 여러 "어려운 난제"를 던질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가 가진 이데올로기를 정직하게"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2) 반면에 "역사가 전부라면 역사의 흐름 밖에서 동일한 이데올로기들을 판단하고, 불의하거나 착취적인 정권들을 심판할 수 있는 아무런 척도나 권위가 전혀 없게" 된다. 기독교는 역사 바깥의 관점을 긍정하고 역사에 대한 비판과 심판의 틀을 제공한다.
글을 읽으며 나에게도 근대성의 편견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도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이론이란 시대를 초월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럴수록 구체적인 시간에서의 나의 행동이나 분투, 고민 등에 대해서는 부차적으로 여기게 되고, 나의 경험에 대해 충실하지 못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나의 경험에 충실하지 못할 때, 나는 또 남의 경험에 온전한 공감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특정한 이론과 특정한 이데올로기, 또는 교리의 측면에서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보다 '추상적인' 차원의 답변에 만족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나는 위 (2) 보다는 (1)에 가까운 사고를 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끊임없이 역사 안으로, 구체적인 시간과 관계와 내가 여기에 있고 어느 누구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지는 의미를 충분히 음미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인 틀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삶에서 적용될 것인가를 같이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달력의 역사'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을 누리고 충만하게 삶을 살아내는 것. 그러면서도 내가 사는 삶이 마치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 않고, 역사 바깥에서 역사 안으로 지금도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는 진리의 조각을 붙잡고 보다 대담하게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 이 둘이 성육신의 '역사성' 안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진리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