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성과 보편성 사이의 조화-<<성경적 비판이론>> 15장을 읽고.
지난 글에서 제시한 근대성의 편견들은 다음과 같다.
1. 궁극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몰(沒) 역사적이어야 한다. 즉 그것은 모든 시대에 동등하게 유효하며 어떤 특정의 역사적 순간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2.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즉 그것은 어떤 특정 문화의 편을 들 수 없다.
3. 궁극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추상적이어야 한다. 즉 그것은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존재에 대한 이론이다.
4. 궁극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비인격적이어야 한다. 즉 그 추상적인 순수성은 인간의 어떤 편견으로도 오염될 수 없다.
이번 글에서는 두번째 편견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스도가 1세기 팔레스타인 시골의 아람어를 쓰는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은 매우 자주 등장하는 스캔들이다. 우리가 대체 '이스라엘'의 신을 왜 믿는가? 조금 더 세련되게 표현해 보자면, 1세기 팔레스타인 시골의 아람어를 쓰는 목수의 아들(특정성, 즉 시간, 장소, 몸을 가진 구체적인 실재)이 어떻게 "천지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알파와 오메가요,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어 마땅한 분"(보편성, 즉, 경계를 넘어 모두에게 열려 있는 차원의 진리)이 될 수 있는가?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칸트는 "복음의 거룩하신 분조차도 [하나의 모범]으로 인정되기 전에 우리의 도덕적 완전성 관념과 비교해 봐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특정성보다 보편성을 우선시한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의 모범'이 될 수는 있다. "칸트에게 그리스도는 특정성이라기보다 추상적 개념의 구현이며, 칸트는 이것이 더 근본적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기독교에는 기독교 자체보다 더 깊은 것이 담겨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특정한 사람인 그리스도는 어떠한 보편적 진리로서 '완전한 도덕'이라고 불릴만한 것의 하나의 구체적인 예시이자 모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역적이고 특정한 기독교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보다 더 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와 같이 특정성보다 보편성을 우선시하는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철학이 우리에게 "기독교 이전"의 개념들을 제공했고 그 개념들은 "순수히 이성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으로 기독교는 기껏해야 그 개념에 대한 불순하고 지엽적이고 제한된 반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델에 따르면, "기독교 철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존재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네모난 원'(square circle)이다." 철학이 신학을 교정할 수는 있으나 그 역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철학은 보편적이지만 신학은 특정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근대성과 포스트모더니티 모두에서 "추상적 구조는 특정 사례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다."
그러나 "특정성에 대한 이러한 의심들은 어떤 한 특정의 장소와 시간에 갇히는 것을 막아 주는 건강한 본능이 될 수 있으나 그것은 또한 시간이나 지리적으로 특정된 것(그리스도를 포함하여)은 단순하고, 편협하며, 시야가 좁은 것일 수밖에 없다는 편견으로 증폭될 수 있다." 성경은 정확히 그 반대의 사실을 말하고 있다. "현대 세계가 사소한 흔적들처럼 간주하는 신화적인 특정한 사건들이 신앙의 본질이며, 근대성이 진리로 받아들이는 추상적인 명제들은 다만 그 그림자일 뿐이다." 성경의 언어는 그리스도를 더 깊은 비인격적 실재를 위한 중개자 내지는 그것을 담는 용기로 설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진리이다(요 14:6).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만물을 창조하신 분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가 바로 그분이시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특정성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그의 보편성의 효력을 상실시키지 않는다. "기독교 관점에서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초월적'인 입장은 한 사람의 특정한 1세대 유대인에 의해 제공되었다."
올리버 오도너번은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이 관계를 맺을 때, '특정성'이 신적인 것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반적인 신이 아니라 언약의 야웨로서 특별하고 독특한 신"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편성'은 신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특수성은 그의 신적 본성에 속하고, 그의 보편성은 그의 인간 본성에 속한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서 그는 대체 불가능하지만 새로운 인간으로서 그는 우리 자신이 본받을 수 있는 모범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는 추상적인 진리를 드러내주는 창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진리 그 자체이시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추상적인 명제들을 파악해내보려고 노력한다. 근대성의 편견은 추상적 보편성만을 강조하는 편견 속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심오한 통찰을 파악할 길이 없다(<<성경적 비판이론>> 576p.).
찰스 테일러에 따르면 이러한 근대성의 편견은 '초월'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와 맞물린 '세속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세속화'의 핵심은 종교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건이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생각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1) 오늘날 서구 사회뿐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도 신앙이 자명한 선택이 아니게 된 시대가 되었다.
(2) 이는 근대로 오면서 인간이 '초월(Transcendence)'을 전제하지 않고도 이-세계 안에서 충분히 의미를 구성할 수 있다고 믿게 되면서 이루어진 변화이다. 이와 같은 세계에서는 초월의 이야기가 없이도 이 세계 내부의 질서와 번영, 행복, 도덕이 설명 가능하다는 프레임이 사회의 기본 틀이 된다.
(3) 그 결과, '삶의 중심'이 무엇인가에 대한 다원적 옵션들이 폭발(Nova deffect)하게 된다. 각종 인본주의, 자연숭배, 과학적 자연주의, 영성 등 다양한 중심들이 폭발하고 서로의 확신을 약화시키면서 경쟁한다.
(4) 그 과정에서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공적 공간에서 하나의 두꺼운, 즉 내용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세우기가 어렵다. 대신해서 현대인들은 형식적 덕목(진정성, 성실성, 열정)을 최소 공약수로 삼아 그러한 보편적 가치의 대체재로 삼고 싶은 유혹에 넘어간다. 왜냐하면 믿음의 '내용'에 대한 비판과 합의에는 큰 충돌이 따르지만, '내가 열심히 믿고 있다는 사실'은 합의하기도 관찰, 평가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신앙과 가치는 사적 의식과 경험의 영역으로 남고, 형식 기준이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틀이 된다.
(5) 그래서 현대인들은 특정성보다 추상성을, 그리고 내용보다 형식을 선호한다. "우리가 신과 연결되는 방식은 열정의 강렬함을 통한 것이므로, 당신이 온 마음으로 그것을 믿고 있는 한 무엇을 믿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6) 그리고 근대는 미신을 제거하고 중립적이고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것만 남아있다는 신화를 신봉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현대인들은 교리를 전부 '죽은 독단'으로 취급하는데, 이는 근대의 도덕 이상들이 '깊은 원천들', 예를 들면 기독교적 가치에 빚지고 있음을 스스로 망각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자기 원천 망각의 또 다른 '독단'이 된다(나는 여기에서 '도덕 이상'이라는 보편성이 '깊은 원천들'이라는 특수성의 그림자에 해당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이러한 현대의 보편주의는 철학자 미셀 셰르가 "최고의 현대 신화"라고 부르는 것, 즉 "과학에는 아무런 신화가 없다는 생각"을 판매하고 있고,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가 근대성에 대한 "편견에 대한 편견"이라고 부르는 것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다. "일반적인 가치나 보편적인 문화라고 하는 것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역사를 톺아보면, 최고의 현대 신화인 과학조차도 특정 문화권에서 다양한 행위자들을 매개하여 발전해 왔으며, 그 자체로 자명한 진리이거나 모든 진리가 거쳐가야만 하는 진리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G. K. 체스터턴이 말했듯이, "나는 한 민족에게만 빛을 비춰 주고 나머지 다른 모든 사람은 어둠 속에서 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일상적인 조롱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동시에 과학과 진보가 한 민족의 발견이며, 다른 모든 민족은 어둠 속에서 죽었다는 것이 그들에게 특별한 자랑거리임도 깨달았다.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가장 큰 모욕은 실상 그들 자신에 대한 가장 큰 칭찬이었던 것이다."
특정성에 대한 저자의 통찰을 보면서, 나 또한 근대성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다시 깨닫게 된다. 무언가 불편하게 느끼는 지점들, 예를 들면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불러서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가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 특정성 안에서 보편성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또한, '삶의 중심'에 대한 합의를 잃어버린 것은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적인 현상이고, 그것은 세속화의 전세계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는 초월을 잃어버린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고의 보편성이 '생에 대한 열심'으로 귀결되는 현실을 설명해 준다. 사람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유리하고 있다. 너무 많은 목소리들이 서로를 약화시키며 폭발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어떠한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편린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이상(예를 들면 American Dream과 같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특정한 한 사람'인 예수로부터일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성이 보편성과 조화를 이루는 지점은 '초월'과 그 '초월'의 성육신을 통한 역사로의 삽입이 이루어지는 지점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