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사랑의 공동체로 - <<성경적 비판이론>> 17장을 읽고
https://youtu.be/LRrsW8-TkQ0?si=VVY7ngBWmDBKWxH4
길 없이 걷고싶어 잠자리를 따라서
나의 발자국이 그곳에 처음 찍히도록
돈 없이 살고 싶어 온 세상을 가지며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두 손을 비우고 싶어
대학교 1학년 첫 교양 수업 중 하나로 들었던 현대정치와 이데올로기 수업에서,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유명한 자유 구분에 대해서 배웠던 것이 생각난다.
이사야 벌린에게 자유는 '소극적 자유', 즉 다른 사람들의 간섭이 없는 상태와 '적극적 자유', 즉 정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자기 통제로 나누어진다. ~로부터의 자유와, ~로서의 자유. 개인 및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위와 같은 구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날 정치 스펙트럼의 측면에서 볼 때 지배적인 것은 ~로부터의 자유, 즉 소극적 자유이다. 대게 좌파의 경우에는 가난, 억압,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며, 우파의 경우에는 규제, 관료주의, 큰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소극적 자유의 개념은 자유와 사랑에 의해 발생되는 귀속과 헌신(attachments and commitments)을 대립시킨다. 저자는 프랑스의 소설과 미셸 우엘백(michel Houellebecq)의 <어느 섬의 가능성>(the possibility of an Island)에서 묘사되는 '섬'을 들어 소극적 자유와 사랑의 대비에 대해서 설명한다.
『어느 섬의 가능성』에서 주인공 다니엘은 프랑스의 냉소적인 스타 코미디언이다. 그는 중년에 접어들며 오래 함께한 이사벨과의 관계가 마모되어 가자, 젊은 모델 에스테르와 휘몰아치는 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다니엘과 에스테르의 나이 차이로 인해 욕망과 애착의 속도가 어긋나게 된다. 어느 날 다니엘은 클럽과 파티에서 에스테르의 또래들이 살아가는 생태계를 관찰하다가, 그들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랑 자체를 제거한 세대라는 통찰에 도달한다. 그래서 파티 한복판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원하는 목표에 도달했다. 그들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사랑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유하니까.” 이 소설의 디스토피아적 미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애착에서 벗어난 훨씬 더 큰 자유를 추구했으나, "애착과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사랑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반면에 "사랑한다는 것은 섬이 되는 자유, 자기의 선택지들을 열어 놓는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포기하는 자유는 "자기 정당화의 좁은 범위에 갇혀 버린 무정한 자유"이지, "자신을 타자에게 완전히 쏟아 부음으로써" 누리는 참 자유가 아니다. 사랑은 항상 "자발적인 종살이를 수반"하는데, 그것은 자기 포기 또는 자기 내어줌이다. 그리고 자기 내어줌이 사랑의 본질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크 엘륄은 사랑이란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 "자유에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몇 해전 고려대에서 열렸던 베리타스포럼을 통해서 알게 된 제임스 스미스는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다(You are what you love)"라는 문구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저자는 이를 좀 더 정확히 말해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된다"라고 표현한다. 사랑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인간은 "의지와 동기의 진원지를 지성적 사고에 두지 않고 마음의 목적과 욕망"에 둔다. 마음은 "지성뿐 아니라 의지와 감정의 발원지"이고, "인간 실존의 종교적 뿌리"이며, "우리 사랑의 실존적 내실"이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지향"이므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존재들"이다. 파스칼은 "마음은 이성이 전혀 모르는 그 나름의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호모 라티오날리스'(homo rationalis, 사고하는 자로서의 인간)가 아니라 '호모 아도란스'(homo adorans, 사랑하는 자로서의 인간)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어떤 사랑은 그 자체로 항상 좋고 다른 사랑은 항상 나쁜 것이 아니다(물론 어떤 사랑은 항상 나쁠 수도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자기 파괴적 사랑과 같은 사랑은 항상 나쁠 수 있으니까). 오히려 "우리의 사랑은 우선순위가 잡혀 있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할 뿐이다" 즉, 우선순위의 질서가 잡혀있지 않은 사랑은 우리 자아 자체를 바꾸거나 변형시킨다. 우리 자신의 자아는 "우리 가운데 있는 지배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이에 따라 형성되기 때문"이다. 여러 형태의 중독처럼, 무질서해진 사랑은 여러 형태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병리를 낳는다. 이를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형태의 무질서해진 심성에 대한 벌은 그 자체의 무질서다"라고 날카롭게 진단하였다.
내면세계의 무질서한 사랑은 전체 사회의 무질서와 연결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사회가 공통된 사랑에 의해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한 사회를 "옳은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공통된 의견을 가진 친교적으로 연합된 회합이며 공유된 관심사의 공동체"라고 본다면, 사회가 분열에 이르는 이유에 대해서 정확한 분석을 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사회를 하나로 결속시켜 주는 접착제를 찾아낼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홉스는 사회를 결속시켜 주는 접착제를 '폭력적 죽음에 대한 공통된 두려움'이라고 보았고, 루소는 '일반 의지'라고 보았으며, 장뤽 낭시는 접착제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사회란 "공통의 물질로 축소될 수 없는 공통적 존재"라고 보면서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공동체"라고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찰스 테일러는 "사랑은 정치적 사회의 구조를 결정하고 정의하는 집단적인 기능인데 그것은 그 사회의 통일성과 조직화의 열쇠가 된다"라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도성에 대해서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이 각자 다른 사랑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도성을 세우는 사랑은 일차적으로 서로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즉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랑의 대상을 기초로 하여 세워져 있는 것이다. 만일 이 공동체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공유하려고 한다면, 공동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에티엔 질송(Etienne Gilson)이 말했듯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사랑이며, 마음이 일치되려면 생각의 일치가 수반되어야 하므로, 사랑과 진리로 쉽게 나누어버리는 이분법은 설 자리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돌아선다는 것은 보편적인 것, 곧 "그 모든 것의 공동선"으로부터 돌아선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공공의" 사랑(public love)이다.
반면에 지상의 도성은 '사적인' 사랑을 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사랑할 자아가 많고, 이들 자아 각각은 선에 대한 자신만의 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의 힘을 기뻐하며 각자의 선을 이루고자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더 높고 복된 선에서 떨어져 나와 사적인 선을 끌어안았다. 사랑의 일치를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열심으로 바꿔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는 불화, 경쟁 그리고 갈등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서로 충돌하게 되는 사적인 사랑의 확산이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리비도 도미난디'(libido dominandi), 즉 지배욕을 배양하는 사회이다. 지상의 도시는 섬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고 교만의 끊임없는 메아리 속에 자기 자신을 가둔 채 닫혀 있다. 그것은 폐쇄회로로서 바닥부터 천장까지 거울로 덮인 좁은 감방이며, 안팎으로 신선한 물이 흘러들거나 나가지도 않는 짭조름한 물웅덩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성이 "흐르는 강"이 되어 더 낮은 이에게 흘러가는 것과는 대조된다.
우리가 섬으로만 남을 때,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사랑을 받아들일 어떠한 매개도 남겨놓지 않는 것이 자유라고 믿을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 아니 정확하게는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자신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랑에 의해 지배를 당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종종 "어떻게 자신의 시간을 떼어내서 연애를 할 것인가", "결혼을 하게 되면, 혹은 자녀를 낳게 되면 포기하게 되는 나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될 때면 질문 자체가 어떤 틀에 갇혀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곤 한다.
질문하는 사람은 지금 나의 시간과 너의 시간이 있고, 우리는 그 한정된 시간 안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쥐어짜 내 누군가를 만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나의 계획된 시간 안에 너를 들여놓는 일이 나에게는 너무 벅찬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그리고 사랑하는 공동체가 만들어가는 시간은 '섬'의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시간이다. 그것은 내어줌으로써 얻게 되는 참 자유이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나의 사랑의 대상을 조정하여, 너의 사랑의 대상과 만나고, 우리의 사랑의 대상을 만든다. 나의 한정된 자원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풍요로움으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서로를 채우고 서로를 세운다.
이러한 사랑의 원리를 고려해 볼 때, 악동뮤지션의 노래 'Freedom'에서 자유를 노래하는 이찬혁이 어떤 자유를 꿈꾸는 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로부터의 자유를 노래하는 것에서 멈춰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자유'인가이다. 그가 자유를 가지고 길 없이 걷고 싶은 이유는 첫 발자국을 남기는 자로, 그래서 그 발자국을 따라 많은 이들이 그 뒤를 따를 수 있는 자로 서 있고 싶기 때문이다. 그가 돈 없이 살고 싶은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온 세상을 가지기 위해서이다. 온 세상을 가지는 것은 손을 비운 자만이 가능하다. 옛 시대에서 무언가를 손에 많이 쥐고 있는 사람은, 손을 비우고 새 시대를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자유에는 정렬된 사랑의 우선순위가 있다. 그는 옛 것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사랑하고 싶어 한다. 그의 자유에는 다른 시대가 들어갈 공간이 있다. 그 사랑이 진정한 자유를 가져온다.
우리 사회가 과연 무엇으로 묶일 수 있을까에 대해 대답하는 것은 정치적 지도자의 책무이다. 각 정부는 '공통된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분열된 양상을 이용하는 자들을 제한다고 하더라도, 소극적 자유의 프레임에 머물러서는 공통된 사랑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사회가 실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보아야, 사회의 접착제를 찾아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가 실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닐까 싶다. 2009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이미 10억만 있다면 가족/지인을 배신할 수 있다고 답한 사람들이 50%가 되었다는 씁쓸하고 디스토피아적인 결론이 도출되었음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분열하고 있는 이유는 '사적인' 사랑으로 각자도생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우리 안에 무언가 초월적인 것이 나올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지만 쉽게 답을 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삶의 목적이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다수가 인정하는 사회야말로 단단한 접착제를 가진 사회일 것이다. 생존의 두려움이 접착제가 되는 사회와 모든 사람의 눈이 반짝일 것을 꿈꾸는 자들이 접착제가 되는 사회.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지는 분명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