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스펙화

성과 서사 너머를 상상해 보기 - <성경적 비판이론> 18장을 읽고.

by 박지명

Specification, 우리가 흔히 줄여서 말하는 스펙(사양)은 원래 상품에 붙이던 표현이었지만, 이제는 어디에나 쓰이는 단어가 된 지 오래다. 마치 컴퓨터 '사양'과 같이, 우리는 인간의 삶을 이루는 많은 요소를 사양화하고, 측정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내고자 부단히도 애써왔다. 입사 지원서를 떠올려보자. "자기소개서에 본인의 장점을 세 가지 기술하시오." 우리는 복잡한 인격을 '리더십', '책임감', '창의성'과 같은 항목으로 나눈다. 수능 점수와 토익 점수는 말할 것도 없고, 학벌, 더 나아가서는 '경험'이나 '인생 스토리'와 같은 것들까지도 '사양'화된다. "해외 봉사 경험 1회, 창업 동아리 활동 2년, 공모전 수상 3회." 그리고 최근에는 사랑까지도 사양화되고 있다.


우리의 삶이 이러한 스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스펙이 과연 어떤 배경에서 등장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고 있는지를 고민해 보는 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놓치는 것은, Specification은 근대성의 산물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스펙의 등장은 생각보다 철학적인 함의가 깊은 일일 수 있다. 사실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정신-물질의 이원론에서부터 '스펙'의 역사는 화려하게 시작한 것일지 모른다.


데카르트는 우리 자신의 살아 있는 몸을 포함하여, 물질을 더욱 철저하게 객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데카르트 이래로, "우리는 느껴지는 열은 물체 안에 있고, 통증은 치아 안에 있다는 식의 평범한, 몸 가진 관점에서 발을 빼야만 했고, 외부 관찰자가 관찰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과정을 파악해야 했다. 즉, 정신 속의 어떤 경험은 물리적 세계의 어떤 조건, 예를 들어 물체 속 분자의 운동 에너지나 치아의 부식 때문에 생겨난다"(실재론 되찾기, 휴버트 드라이퍼스/찰스 테일러, 도서출판 b, 37p.)


간단히 말하자면, 데카르트는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을 물리적 조건으로 설명하려 했다. "사랑을 느낀다"는 감정도 결국 뇌의 도파민 분비량으로, "배고프다"는 느낌도 혈당 수치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과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는 있지만, 문제는 '정신'이라는 비물질적인 존재를 '신체'로부터 분리시키면서도 모든 행동과 사고를 '물질'로 설명하려는 유물론적 야망을 타고 모든 것을 명확하게 판명한 모델, 즉 스펙으로 환원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 있다.


데카르트는 "우리는 고통과 색과 다른 감정을 단순히 사고처럼 생각할 때 명확하게 판명하게 인식한다"라고 말한다. 현대의 컴퓨터 모델은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명확하고 판명한' 모델(찰스 테일러가 '매개적 전통'에 속한다고 말한 모델)과 너무나도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컴퓨터 모델은 다음과 같이 작동한다.

1. 정신이 환경으로부터 '입력 정보'를 받고 '출력물'을 생성한다.

2. 계산은 명확하게 정의된 정보 단위를 기반으로 진행되고 처리된다.

3. 컴퓨터로서의 뇌는 순전히 '구문 엔진(Syntactic engine)'이다.

4. 설명은 정신적 작용이 뇌의 물리적 작용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유물론적 근거에 따라 진행된다.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 당신에게 "점심 뭐 먹을래?"라고 물었을 때, 컴퓨터 모델은 이렇게 설명한다: (입력) 질문 인식 → (처리) 선호도 데이터베이스 검색, 예산 계산, 시간 고려 → (출력) "떡볶이요." 마치 검색엔진이 키워드를 입력받아 결과를 출력하듯이 말이다. 문제는 컴퓨터 모델을 우리의 사고에 적용하여 우리의 사고가 '명확한 형식적 규칙'에 따라서 진행된다고 보면, 이것은 사고를 기계 작용(mechanism)에 일치시키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다 인간이 신체를 가진 사회적이고 문화적 행위 주체로서 가지고 있는 '전적으로 투명하지는 않은 직관'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직관들—내가 이 도랑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당신이 나에게 화가 났을지, 파티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는지를 아는 것—을 배제한다.


오랜 친구가 "괜찮아"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이 정말 괜찮은지 아닌지를 목소리 톤만으로 아는 것,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할 때 농담을 던져도 될 타이밍을 감지하는 것, 엄마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만 듣고도 오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아는 것. 이런 직관들은 그 자체로 명확하거나 판명하지 않다. 그래서 컴퓨터 모델은 우리의 사고 과정을 더 낮은 단계의 절차 또는 하위 질문(Subquestion)으로 끊임없이 나누고, 추론이나 설명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쪼갠 다음 신뢰할 수 있는 절차를 따라야만 명확하거나 판명한 사고에 다다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체화된 지식, 관계적 맥락, 미세한 분위기 읽기, 생활세계의 지혜처럼 명확한 스펙으로 가둘 수 없는 차원은 빈자리로 남게 된다.


이러한 '스펙'은 사회적으로는 팀 켈러가 '성과 서사(Performance narrative)'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데이터'를 형성한다. '성과 서사'란 자신이 중요한 존재거나 가치 있는 존재라는 정체성을 '내가 잘하니까(성취하니까, 착하니까, 노력하니까)'로 설명하는 이야기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나는 가치 있다. 왜냐하면 내가 무언가를 해냈기 때문이다."


즉, 성과 서사는 자기 가치(Self-worth)와 정체성(Self-identity)을 내 성과 위에 놓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미 이것에 너무 익숙하다. "서울대 합격했어? 대단하네!" "연봉이 얼마야?" "집은 어디 살아?" "차는 뭐 타?" 심지어 부모의 사랑도 학원비로 계산되고("우리 애 영어학원에만 한 달에 백만 원 들어간다"), 친구 관계는 SNS 팔로워 수로 측정되며("인스타 팔로워 만 명 넘었어"), 자녀의 효도는 용돈 금액으로 환산된다("명절마다 백만 원씩 드린다"). 물론 우리는 사랑하기에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되어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데이팅 '시장'과 틴더, 그라인더와 같은 앱들을 생각해 보자. "당연히 여기엔 사용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사진들이 첨부되어 있다. 그런 다음 사용자들은 자신의 그럴싸한 좋은 자질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라고 요구받는다." 프로필을 작성할 때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키: 178cm, 체중: 70kg, 직업: 회사원, 연봉: 5천만 원, 취미: 운동, 여행, 학력: 대졸." 그리고 상대방을 고를 때도 같은 기준으로 필터링한다. "키 175cm 이상만 보기", "연봉 4천만 원 이상", "비흡연자 우선."


이러한 성과 기반 시장의 첫 번째 아이러니는 "참여자들이 그 앱의 다른 사용자를 위해 뭔가를 보여주려고 노력해 봐야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사용자 프로필은 앱 내의 불투명한 알고리즘의 간택을 받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른 사용자에게 먼저 노출이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아이러니는 "앱 사용자가 각자가 가진 자질에 따라 프로필을 판단하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상품을 선택하는 소비자 패러다임에 맞춰서 사랑하고 욕망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내가 당신의 아름다움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여전히 당신이면서도 좋은 외모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틴더에 올라온 것은 사람이 아니라 신중하게 선별된 덧없는 자질들의 묶음일 뿐이라 주장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이는 스펙으로 가둘 수 없는 차원인 '사랑' 또는 '인간됨'과 같은 차원을 알고리즘에 추가하면서 생기는 부작용에 해당한다. 스펙은 인간성이라는 장(場)을 이루는 각 노드처럼, 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입자가 되어 엉성하게 인간의 삶 전체를 구성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인간성은 단순히 스펙으로 나타낼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할머니가 손주를 보며 느끼는 벅찬 감정을, 오랜 친구와 나누는 말없는 위로를, 좋아하는 사람의 웃음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순간을 어떻게 수치화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일단 우리가 데이팅 시장에 들어가게 되면, 알고리즘과 자동화된 분류에 맞추기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의 '사양'을 정하고 그것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사랑도 알고리즘화된 것이다.


글쎄, 후기 근대사회를 사는 우리가 완전하게 이 성과 서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취업 포털 사이트는 여전히 우리에게 스펙을 요구하고, 소개팅 앱은 여전히 필터링 기능을 제공한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컴퓨터와 동일한 사고 체계 안에 가두면서 실제 우리의 체화된 지식(embedded knowledge)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유리(disengagement)시키는 데에 너무 익숙해지면, 그리고 그것을 사회적 상상(사람들이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공유하고 있는 삶의 기본 틀)의 수준으로까지 격상시켰다는 점에 대해서 끊임없이 되뇌지 않으면, 우리는 사랑마저도 스펙화시켜 알고리즘을 타고자 하는 시대에서 우리 자신의 인간다움을 지킬 방도가 없어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사랑은 사용 가치에 대한 하나의 표현('나는 이 사람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기에/그와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기에/그 사람이 나를 웃게 하기에/나를 온전하게 하기에/나에게 만족을 주기에 이 사람을 사랑한다')이 되거나 추상적이며 허영심 어린 선언('나는 인류를 사랑한다/나는 억압받는 대중을 사랑한다')이 된다." "성과 서사에 의해 형성된 사랑이란 모자가 벗겨져 대머리가 드러나거나 탱탱했던 볼이 축 늘어지면 사라질 수 있는 우발적인 사랑 혹은 추상적인 사랑이다." 우발적인 사랑이나 추상적인 사랑은 모두 인격체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 그런 면에서 성과 서사는 경쟁이라는 철칙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우리는 오랫동안 ‘명확하게 판명한 것들’만을 신뢰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그러나 찰스 테일러가 지적하듯, 이러한 객관화된 실재론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는 살아 있는 방식을 지워버렸다. 세계는 본래 ‘나로부터 떨어진 대상’이 아니라, 나와 함께 호흡하며 의미를 구성하는 장(場)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장에서 자신을 분리시키고, 오직 계산 가능하고 측정 가능한 방식으로만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성과 서사의 철학적 토대이다. 인간은 관계의 존재가 아니라, 성취의 단위로 분해된다. 의미는 체화된 경험이 아니라 데이터의 합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인간은 점점 더 공허해진다. 왜냐하면 세계와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모두 ‘객관적 평가’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중계되기 때문이다.


테일러가 말하는 “실재의 회복(retrieving realism)”이란, 우리가 다시금 삶의 의미가 이미 주어져 있다는 사실, 곧 세계와 인간이 이미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팀 켈러의 ‘은혜 서사(Grace narrative)’는 바로 그 실재의 회복을 신학적으로 표현한 언어다. 성과 서사가 “내가 해냈으므로 괜찮다”는 이야기라면, 은혜 서사는 “나는 이미 관계 안에 있으므로 괜찮다”는 이야기다. 은혜는 인간을 다시 관계적 실재 속으로 되돌려 놓는다. 스펙의 세계는 나를 독립적 개체로 만들지만, 은혜의 세계는 나를 관계의 존재로 회복시킨다. 성과의 언어가 나를 세계로부터 분리시킨다면, 은혜의 언어는 나를 다시 세계와 엮는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은 더 이상 계산 가능한 항목이 아니라, 의미와 사랑의 흐름 속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스펙을 버리는 용기’가 아니라, 실재와 관계 속에서 다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랑이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을 권리, 존재가 성과로 환산되지 않을 권리, 이해되지 않아도 관계 안에서 존중받을 권리. 그것이 곧 은혜의 윤리다. 그때야 우리는 더 이상 알고리즘의 하위 항목이 아니라, 실재의 세계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인간은, 다시금 ‘명확하지 않음’을 살아내며, 그것을 두려움이 아니라 은혜로 받아들이는 존재로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