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성과 국가-시장 동맹 - <성경적 비판이론> 21장을 읽고
갈수록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극명하게 나뉘는 것 같다. 동기는 다양하겠지만, 국가에 대한 기대와 그 기대가 끊기는 경험이 큰 영향을 줄 것 같다. 조금 더 어렸을 때, 나는 국민의 의무에 대해 배우면서 투표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하곤 했다. 투표날 투표는 하고 놀러 가야지! 그러나 훗날 투표는 국민의 의무이면서 동시에 자유에 해당하고, 투표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보게 되면서 나의 생각이 편협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투표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과연 바람직한 나라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보아도, 투표율보다는 투표를 하는 사람들의 성향과 분포가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51:49의 상황으로 결론이 나게 되는 투표 시스템, 결선 투표제의 유무, 비례 대표제의 정도 등, 소위 '공공선'을 이루는 과정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과연 '공공선'은 누구의 주도로 이루어지는가? 여기에서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잊힌 사회적 공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국민의 정치적 선택은 국가와 시장,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시민사회가 어떠한 사회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러나 흔히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에서는 시민사회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정권이 교체되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지만, 정책에 대해서는 그보다 덜한 관심을 가지고, 정책이 펼쳐지는 공간인 사회적 공간에 대해서는 상상하기 어려워하며, '국가 주도'거나 '각자도생'의 이분법 안에서 시소를 타면서 선거와 선거 사이의 시간을 보내기 일쑤다.
그러한 이분법 안에서 사람들은 국가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면서 해결책을 바라면서 동시에 (모순적이게 보이지만) 결국에는 시장에서 각자도생 하는 것만이 유일한 사회적 상상의 지위를 차지하도록 내버려 두게 된다. 현대 사회로 오면서, 국가와 시장(기업)은 시민 사회의 공간을 압박하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이른바 '복합 공간'이 존재하였으나, 현대 사회에서 국가와 시장은 '단순한 사회 공간'을 만들어 국가를 규제의 유일한 원천으로 자리매김하고 "일상생활의 운용에 직접 간여"함으로써 시민사회의 공간을 무력화한다. 시장 또한 손익이라는 단일 척도를 보편적 가치로 정착시킴으로써 소위 '시장 사회'(market society)를 창조한다. 자본에 의해 학교, 교회, 노동조합, 마을 공동체와 같은 시민 사회는 "시장의 논리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국가와 시장에 의해 작동되는 사회 공간의 무력화는 현대에 등장한 국가-기업 복합체의 한 측면이다. 국가가 기업들을 고객으로 대우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정부와 산업계 간의 회전문이 계속 돌아가면서 국가와 시장은 시민 사회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협업한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가 말했듯이, "오늘날 국가의 규제와 통제 밖에 있는 독립된 시민 사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 교회, 스포츠 클럽, 노동조합과 같은 시민 사회단체들은 이제 "국가와 시장이라는 이중 현실이 관리하는 지배적 상징체계 내에서 정체성과 의미를 전달한다."
국가-기업 복합체 안에 모든 공간을 흡수하고 통합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근대성은 모든 사회적 관계를 고립된 개인과 획일적 국가라는 양극으로 환원시킨다.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따르면, "사회는 한편으로는 서로에 대해 미심쩍어하는 개인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항소권이 완전히 배제된 가운데 자기 의지를 집행할 권리를 가진 단일 주권자, 즉 모든 강제력의 근원으로 구성된다." 우파에게 "개인의 권리는 중앙 집권적 규제를 막는 방파제"이고, 좌파에게는 "국가야말로 개인의 복지와 사회 계층 전반에 두루 있어야 할 공정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성은 사회적 관계들을 다수/하나의 양자 관계로 환원시키는 게 아니라, '특정' 다수와 '특정 '하나'를 서로 미러링 하며 제시한다. 국가가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 관할권은 좋은 삶에 대해 자기만의 비전을 규정하는 주권적 개인의 거울 이미지이다. "이들은 타인으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그들을 의심하며, 희소한 사회자원과 국가의 호의를 놓고 경쟁하는 개인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 국가는 현대적 개인의 경쟁자가 아니라 그에게 필수적인 보완재이다. 즉 강한 개인주의와 강한 국가가 동시에 부상하고 동시에 번성하는 것으로, 그들은 시민 사회의 '제3의 공간'의 무력화를 이끄는 한 쌍의 증상이다."
개인은 치열한 스펙 경쟁을 하면서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책임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 살아가면서도, 동시에 국가 장학금, 취업지원, 세제혜택과 같은 국가의 적극적 지원이 없이는 살아내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 놓인다. 대안 공동체의 역할은 갈수록 미미해진다. 육아에 있어서도 기존의 공동체가 해체되어 가면서 개인이 육아에 관해 너무나도 많은 책임을 지게 되자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국가의 지원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것을 보게 된다. 공동육아공동체와 같은 대안 공동체의 존재는 매우 미미하다. 커뮤니티의 붕괴는 국가의 부상과 개인 책임의 과대화를 초래하였다.
위와 같은 특징이 왜 '근대성'의 특징이 되었을까? 국가/개인의 이분법이라는 근대성의 특징은 그냥 권위에 따라 사물을 받아들이거나 가장 쉽고 편리한 우선적인 해석을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비판적 인식론을 철학적인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식론적 태도일 뿐만 아니라 "자유와 개인적 책임이라는 더 광범위한 이상의 일부이며, 이는 일반적으로 세계 내 존재 방식을 결정하며 과학을 실천하는 방식도 결정한다." 이러한 개인적 책임 윤리(그냥 권위를 따라 사물을 받아들이거나 가장 쉽고 편리한 해석을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비판적 인식의 태도)가 서구 근대성의 핵심 요소에 해당한다. "더 깊은 차원에서 볼 때, 유리(disengagement)의 태도는 또한 강력한 윤리적 보호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현대의 유리 작용(disengaged agency)은 자유롭고 비판적인 행위 주체(agent)를 만들어낸 용기와 노력을 칭찬하면서, 끊임없이 자화자찬의 담론을 만들어낸다."(실재론 되찾기, 휴버트 드리아퍼스/찰스 테일러, 도서출판 b, 57 내지 59쪽 참조) 비판적인 행위 주체는 "나는 데이터로 나를 관리해 성공한다", "나는 해내기에 존재한다"는 서사로부터 동기부여를 받기 쉽다. 성공도 실패도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 되면서 이른바 '사회적 안전망'은 옅어진다. 각자도생의 다른 말은 '두 번째 기회'의 결여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캐버너, 오도너번, 밀뱅크와 같은 신학자들은 교회가 사회적 공간을 단순화하는 경향에 저항하고, "국가와 기업에 투자된 권력을 분산시키고 저항하는 지역 및 초지역적 공동체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대안 경제 체제들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다. 거대화된 교회는 국가와 밀착되고, 미자립 교회는 스스로의 존립도 걱정하는 모습은 어딘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너무나도 닮아있다. 우리에게는 제3의 공동체가 필요하고, 많이 필요하다. 사회적 협동조합의 역할은 대기업의 것과 다르다. 모든 나라의 산업이 사회적 협동조합과 같은 대안적 경제 체제로 구성된 사회는 대단위 프로젝트가 필요한 첨단 산업에 어울리지 않고, 결과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떨어트리게 되는 주범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대안적 경제 공동체의 역할이 전혀 없는 사회 또한 삭막하고 공허한 각자도생의 사회가 된다. 국가의 역할을 극대화하여 시장실패와 사회적 병폐들을 해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에, 제3의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유리된 태도가 "낭만주의 시대 이후로 그 힘을 비축했던 강력한 반동을 일으켰다는 점도 주목하여야 한다. 이런 유리된 태도가 우리를 세계, 자연, 사회, 심지어 우리 자신의 감정적 본성으로부터 단절시킨다는 느낌을 키워왔다. 우리는 치유가 필요한 분열된 존재이다. 자기 책임은 우리를 일인칭 단수로 되돌리고, 대화적인 것보다 독백적인 것에 우선권을 부여하게 만든다."(실재론 되찾기, 휴버트 드리아퍼스/찰스 테일러, 도서출판 b, 59쪽 참조)
국가를 강조하는 입장과 개인을 강조하는 입장은 겉으로는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민사회의 약화를 매개로 서로를 강화하는 보완재처럼 작동한다. 강한 국가―강한 개인의 결합은 규제와 복지, 인센티브를 통해 개인을 직접 겨냥하고, 개인은 성과·책임의 윤리를 통해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주체로 재구성된다. 이 결합이 지속될수록 학교·교회·노동조합·협동조합·마을공동체 같은 ‘제3의 공간’은 협상능력과 상상력을 잃고, 사회적 안전망은 얇아지며, 공공선은 “국가의 집행”과 “시장 효율” 사이에서 더욱 축소된다. 따라서 바람직한 정치의 기준은 단순한 투표율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국가–시장–시민사회가 상호 견제·협력하는 다중 중심의 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는가에 있다. 우리가 제주에 세우고자 하는 아인학교(AIEN School)와 공동체 또한, 교육에서뿐만 아니라 제주 지역 생태계에 녹아들고 생태계의 번성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세워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