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 정체성 - <성경적 비판이론> 27장을 읽고
"이처럼 모든 것을 거짓으로 간주하려 애쓰는 동안, 나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나'야말로 어떤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진리가 회의론자들의 어떤 터무니없는 가정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고하고 확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내가 찾던 철학의 제1원리로써 이 진리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결심했다."
데카르트가 철학의 제1원리로써 내부와 외부를 분명하게 가르는 경계를 가진 자아를 받아들임으로써, 근대적인 정체성의 씨앗이 심겼다. 찰스 테일러는 이를 "완충된 자아"(buffered self)라고 부른다.
테일러에 따르면,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보통 인간을 "세상에 뚫려 있는 자아(porous self)"라고 느꼈다. 즉, 악령, 영, 신의 은총, 축복, 저주 같은 것들이 외부에서 내부로 직접 스며들 수 있다고 느낀 것이다. 따라서 감정, 기분, 운명까지도 어떤 초월적인 힘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보았다. 반면, 근대 이후 서구에서 등장한 인간 이해는 안과 밖이 명확히 구획된 '내부'를 가진 존재로서, 외부의 어떤 초월적인 힘도 나를 침식하거나 관통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내 생각과 감정, 의지, 정체성은 '내 안'에서 구성되고 관리된다. 이렇게 세상과 나 사이에 단단한 경계막(buffer)이 있는 것 같은 자아를 찰스 테일러는 완충된 자아(buffered self)라고 부른 것이다. 완충된 자아는 자기 통제와 자기 결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아다. 나는 내 삶과 감정, 선택의 주인이다.
로크는 위와 같은 데카르트의 인식론 위에서 저자가 "소유적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라고 부르는 이데올로기를 구성한다. 소유적 개인주의는 "개인을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이나 자기 능력의 소유자로 이해하는 개념이며,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해 사회에 아무런 빚도 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관점"이다. 인간 사회는 이 개념 아래에서 결국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맺는 일련의 시장 관계가 된다. 로크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토머스 홉스는 노골적으로 사람들을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일종의 상품으로 보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다.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인간의 가치는 "그가 시장에서 받을 수 있는 가격"이라고 주장했다. 홉스는 이어서 "그 값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의 필요와 판단에 의존한다.", "다른 물건과 마찬가지로 파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값을 정한다"라고 주장한다.
위와 같은 소유적 개인주의가 말하는 절대적 자유는 곧 '자기 정의(self-definition)'의 자유이다. 소유적 개인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이 바로 자기 자신을 자신이 정의할 수 있는 능력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자아는 오직 자신의 전유물이고,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자아는 결코 내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찰스 테일러는 '정체성은 내면에 감춰진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라는 문화를 "진정성의 문화"(culture of authenticity) 혹은 "표현적 개인주의"라고 부른다. 이 문화는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고, 자신의 충만함을 발견하며, '자기만의 것을 하는'일을 장려한다."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을 받은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우리 개인의 정체성은 상품이 되어 교환되고, 평가받고, 매매된다. 우리는 "개인 브랜드"를 형성하고 발전시키고 판매하도록 요청받는다. 이러한 "개인 정체성의 관리화"는 곧 "삶의 의미의 자본화"와 함께 간다. "우리는 이제 모두 표현적인 개인주의자들"이다(The Rise and Triumph of the Modern Self, p. 25 재인용). 우리는 시장에서 경쟁을 펼친다.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할수록 더 좋은 정체성으로 인정받는다. 이러한 경쟁은 우리 모두가 동시에 자유롭고 동시에 물질적으로 풍족하며,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과거에는 그러한 자유가 소수의 귀족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모두의 (실현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판타지가 되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향한 경쟁은 집단 간의 충돌로 이어진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주장하듯, "사회는 서로를 대조하면서 자신을 규정하는 일련의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에 속한다는 방식으로 정체성이 형성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각자 속한 집단의 자유와 인정(인정받을 권리)을 위해 끊임없이 충돌하는 싸움 속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그런 집단에 속한 사람은 집단과 함께 도매급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판매하도록 강요받는다. '90년대생이 온다'라는 표현이나 'MZ 세대'라는 표현이 얼마나 넓은 나이대를 한꺼번에 아우르는지 고민해 보자.
위와 같은 상품화에 힘껏 저항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정체성 시장은 상품화에 대한 저항조차 또 하나의 상품화된 정체성으로 만들어버린다. 정체성 시장은 어느새 '상품화에 대한 저항'이라는 정체성 또한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 준비가 이미 되어 있다. 그것이 자기 정의(self-definition)에 의해 부여된 정체성이라면 언제든, 이 시장에 자신의 정체성이 상품으로 걸려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의 경우에는 상황이 몇 겹 더 더해진다. 이철승의 <쌀 재난 국가>에 따르면, 벼농사를 주로 지어 온 동아시아 국가를 비롯한 ‘벼농사 체제’에서는, 북유럽을 대표로 하는 ‘밀농사 체제’에 비해 공동체와 국가의 구조, 그리고 개인이 자기 위치를 느끼는 방식 자체가 처음부터 다르게 설계되었다. 그에 따르면, 동아시아 벼농사 체제는 한마디로 공동 생산–개별 소유와 협업–위계–경쟁의 체제이다. 벼농사는 물 관리, 모내기, 수확까지 전 과정이 마을 단위 협업 없이는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마을 공동체의 동원·조율·표준화가 필수적이고 '나'는 '우리' 마을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존재 이유를 찾는다. 그러나 공동의 노동력이 투입되었음에도 마지막에 거둔 수확물은 각 집의 몫이 되고, 그 차이는 각 가구의 추가 노동과 기술, 운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이 구조는 필연적으로 서로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서열화하는 심리, 곧 “같이 일했는데 왜 저 집이 더 잘 사느냐”는 질시와 경쟁의 문화를 잉태한다.
이 과정에서 평등과 차별화에 대한 욕망이 동시에 자라난다. 모두가 같은 논에 들어가 같은 방식으로 일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평등한 협업과 유대감이 강화되지만, 결과물이 나뉘는 순간 비교와 질투, 상호 감시의 시선이 함께 생겨난다. 이철승은 이를 관계적 행복/불행의 구조라고 설명한다. 내가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지 여부는 내 내면의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내 옆집·사촌·동료와의 상대적 위치에서 결정된다. 그는 한국 사회가 불평등의 절대 수준이 다른 나라에 비해 극단적으로 높지 않은데도, 불평등과 공정성 문제에 보다 예민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문제는 이 오래된 벼농사 체제가 산업사회와 신자유주의적 정체성 시장 위에 그대로 이식되었다는 점이다. 공장과 회사, 관료제 조직은 벼농사에서 개발된 협업·표준화·위계·연공제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왜냐하면 농민공과 그들의 자녀들이 결국 시간이 흘러 산업화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농촌의 두레·품앗이 문화는 도시의 팀워크·조직 충성으로 변형되었고, 연장자와 상급자의 경험을 우선하는 농경적 위계는 연공서열 중심의 인사·임금 구조로 제도화되었다. 동시에, 공동 생산–개별 소유 구조에서 파생된 끝없는 비교와 질시의 심리는 학교 성적, 수능, 스펙, 연봉, 아파트 평수, 자녀 교육, 직업 서열 등으로 재포장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전방위적인 네트워크 경쟁으로 이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앞서 말한 소유적 개인주의와 표현적 개인주의가 한국적 맥락에서 독특하게 뒤틀린 형태로 나타난다. 한편으로 우리는 “나는 내 삶과 감정, 선택의 주인이다”라는 완충된 자아의 언어를 말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정의하고 표현할 자유를 가장 근본적인 존엄의 근거로 여긴다. 다른 한편으로는, 벼농사 체제의 유산 때문에 여전히 서열화된 네트워크 안에서 서로를 곁눈질 하며 살아야 하는 구조에 갇혀 있다. 나의 self-definition, 나의 “브랜드”는 실질적으로는 입시, 고용, 승진, 부동산, 소비 패턴이라는 촘촘한 위계 구조 안에서 평가되고 가격이 매겨진다. 정체성 시장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벼농사 체제에서 유래한 네트워크 경쟁이 신자유주의적 가치와 결탁해 만들어낸 아주 구체적인 삶의 경험이다. 벼농사처럼, 부모들은 '자식농사'를 짓는다. 자식을 잘 키워 급제를 하면 그 자식이 마을로 돌아와 그 집안을 먹여 살리는 구조는 한국에서 유독 심한 교육열의 문화적, 경제적 배경을 잘 설명해 주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에서 “나의 정체성이라는 상품의 값”을 묻는다는 것은, 결국 나의 위치를 둘러싼 이중의 시선—서구 근대가 가져온 완충된 자아의 자기 정의와, 벼농사 체제가 만들어낸 관계적 서열의 시선—을 동시에 견디는 일이다. 나는 스스로를 자유롭고 자율적인 개인으로 상상하면서도, 실제로는 촘촘한 네트워크 안에서 “사촌이 논(이제는 아파트)을 사면 배가 아픈” 존재로 살아간다. 신자유주의의 정체성 시장은 이런 모순을 활용한다. 자기 정의의 자유, 자기표현의 이상, 그리고 관계적 불평등에 대한 예민함을 모두 하나의 상품화된 정체성 패키지로 묶어 파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이라는 상품의 값은 얼마일까? 내가 버는 소득만큼? 내가 쓸 수 있는 돈만큼? 내가 가진 자산만큼? 자연스럽게 사는 곳, 타는 차, 먹는 것, 입는 옷, 드는 가방과 나의 정체성이 연결되는 것을 보면, 나에게도 소유라는 막연하지만 강력한 정체성의 원천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무소유’가 대안인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한 차례, ‘무소유’마저도 하나의 정체성 상품이 되어 팔려나가는 것을 경험했다. 소박한 삶, 미니멀리즘조차도 곧잘 하나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가 된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자기 이해 역시, 정체성 시장이 부여하는 하나의 레이블에서 자유롭지 않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탈소유’(dispossession)이다. 장이브 라코스트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하지 않는다. 자아는 항상 부분적으로 우리 손을 벗어나 있다.” 자아는 소유물이 아니라 선물로 존재하며, 고립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C. S. 루이스는 “나는 타인에게 나를 줄 때에만 비로소 나 자신의 것이 된다”라고 말했고, 테리 이글턴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각각의 자기 내어 줌이 상대방에게서 그에 상응하는 응답을 이끌어 내며, 그 과정이 자기를 더 풍성하게 하고 다시 채우는 순환을 만들어 낸다”라고 설명한다. 이는 단순히 “우리는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는 차원을 넘어, 애초에 자아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타자에게로 열려 있는 관계적 사건이라는 인식으로 나아가게 한다.
기독교 전통에서 이 인식은 더 급진적인 형태를 취한다. 하나님은 “나의 가장 깊은 내면보다 더 내면에 계시고, 내 안의 가장 높은 차원보다도 더 높이 계신 분”으로 고백된다. 나보다도 내게 더 가까우시면서 동시에 내가 결코 소유하거나 포획할 수 없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은, 소유적 개인주의가 상정하는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주체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사랑받는 사람은 자기 완결적인 자아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타자(divine Other)의 시선 안에서 자신이 되어 간다. 이는 소유적 개인주의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예속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한쪽은 사랑하는 존재의 시선 안에서 ‘나’가 되는 것이고, 다른 쪽은 정체성을 상품화하려는 시장의 조작 속에서, 그 진짜 목적을 숨긴 채 ‘나’가 되어 가도록 유도되는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소유와 싸워 보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고립’이 아니라 ‘관계’로 나아가려는 시도와 연결된다. ‘나’, 혹은 동아시아 맥락에서 쉽게 확장된 버전의 ‘나’인 ‘가족’을 넘어서는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것은, 곧 나의 소유를 어떤 방식으로 남들과 나눌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결단을 동반한다. 데카르트가 던졌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보다, 그 질문에 앞서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나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유의 언어로 정체성을 묻는 대신, 관계와 사랑의 언어로 정체성을 되묻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자기를 얼마나 잘 정의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누구를 사랑하느냐”로 귀결된다. 내가 나를 완전히 소유해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고 믿는 순간, 나는 정체성 시장이 제공하는 수많은 상품들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소비자가 될 뿐이다. 반대로, 나 자신이 사랑의 관계 속에서 받은 선물이며, 하나님과 타자들에게 내어 줘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소유의 언어는 서서히 설 자리를 잃는다. 벼농사 체제가 남긴 관계적 서열의 시선과, 근대가 남긴 완충된 자아의 자기 정의가 교차하는 이 자리에서, 탈소유의 길은 우리에게 조용하지만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정체성의 가격을 끊임없이 계산하는 대신, “나는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다시 묻는 일. 어쩌면 그 질문을 견디는 것 자체가, 상품화된 정체성의 시대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저항의 형식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