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철학적 토대에 대해 생각해보기
이제 머스크식 상상력이 어디에서 힘을 얻는지, 그 철학적인 토대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자. FSD가 서울의 도로를 달리는 장면이 주는 충격은 단지 “새 기술이 들어왔다”는 감탄이 아니다. 그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진짜 현실’인가, 그리고 무엇이 ‘부차적 덧붙임’인가를 다시 묻게 만든다. 기술은 종종 기능이 아니라 실재의 기준을 재배치한다.
찰스 테일러와 허버트 드레이퍼스는 『실제론 되찾기(Retrieving Realism)』에서 근대 인식론의 지배적 모델로서 매개 이론(Mediational theory) 을 비판적으로 소개한다. 데카르트와 로크로 이어지는 이 그림에서 나는 우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표상(관념) 을 직접 경험한다. 그리고 바깥 세계는, 이 표상들이 그 세계를 얼마나 정확하게 대표(represent) 하는지—거울처럼 얼마나 잘 비추는지—를 점검함으로써만 접근된다.
이때 지식은 흔히 ‘정당화된 참된 믿음’으로 정의된다.
1. 먼저 믿음이 있고,
2. 그 믿음은 실제 사태와 일치해야 하며,
3. 그 믿음을 유지할 정당화(좋은 이유) 가 있어야 한다.
이 모델에서 철학의 중심 과제는 자연스럽게 “어떤 믿음이 참이라는 것을 보장해줄 의심 불가능한 토대를 찾는 일”로 수렴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부작용이 생긴다. 바로 실재의 위계다. 표상되기 쉬운 것, 특히 자연과학의 수학적·정량적 언어로 안정적으로 기입될 수 있는 층위가 ‘가장 확실한 실재’라는 특권을 얻게 된다. 반대로 의미, 관계, 경험의 두께, 역사적 맥락 같은 것들은 “주관적 덧붙임”으로 밀려나기 쉽다.
이 인식론을 자아-세계의 구조로 옮겨놓으면, 테일러가 말하는 완충된 자아(buffered self) 가 등장한다. 나는 세계와 뚫려 있는 자아가 아니라, 내면과 외부가 단단히 구분된 ‘안전한 내부 공간’을 가진 자아가 된다. 바깥 세계는 관찰·측정·계산의 대상이고, 내 안의 표상들이 심급(審級)처럼 작동한다. 여기에 초월 없이 이 세계의 자연적·사회적 구조 안에서만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는 내재적 프레임(immanent frame) 이 결합되면, 우리가 ‘진짜’라고 부를 만한 것은 자연과학적으로 잘 대표될 수 있는 물리적 세계가 되고, 나는 그 세계를 내 안의 이론과 표상을 통해 검토하는 관찰자가 된다. 윤리, 가치, 종교, 철학은 그 위에 “추가로 얹히는 것”처럼 취급될 위험에 놓인다. 인식론 모델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어느새 존재론과 윤리, 정치의 층위까지 번져나간다.
테일러와 드레이퍼스가 제안하는 대안은 접촉 이론(contact theory) 이다. 우리는 먼저 머릿속 표상을 보고, 그것이 바깥을 잘 비추는지 따져보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애초에 몸으로 세계 안에 던져져 있고, 그 안에서 행위하고 실수하고 배우면서, 배경이 되는 틀(frame)을 수정해나가며 세계와 얽힌다. 우리는 그 틀을 때로 의심하고 고쳐볼 수는 있지만, 마치 배경이 없는 듯이 생각할 수는 없다. 인식은 실천과 분리된 추상이 아니라, 이미 세계와 접촉 중인 삶의 한 표현이다.
이제 여기서 머스크의 한 문장이 새롭게 다가온다. “에너지가 진짜 화폐다.” 이 말은 접촉과 충돌로 이루어진 삶의 다층성 가운데서, 물리적 에너지의 층위 하나를 뽑아 올려 실재의 기준 자리에 앉히는 시도로 읽어볼 수 있다. 가치와 의미를 에너지의 흐름, 생산과 소비 구조로 환원하려는 유혹이다. 인류의 미래도, 사회의 정의도, 도시의 형태도, 심지어 일과 삶의 구조까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느냐”의 문제로 줄어든다.
물론 머스크에게는 강력한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그 환원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만약 FSD가 대다수의 사람들보다 운전을 더 잘한다면, 우리의 운전에 대한 몸 가진 자로서의 경험이 과연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는가? 기술의 발전에 따라 체현된 경험이 재구성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러나 바로 이 질문을 던질 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다. 환원은 언제나 압축이라는 점이다. 압축은 필연적으로 삭제를 동반한다. 그리고 그 삭제는 대개 “세계의 어떤 부분”이 아니라, “누군가의 어떤 삶”에서 일어난다. 기술은 시간을 절약해주지만, 동시에 무엇을 중요하다고 느낄 권리, 어디에 주의를 기울일 권리, 누가 책임을 지는지 말할 권리를 조용히 재배치한다.
따라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FSD가 운전을 잘하느냐”가 아니라, “그 ‘잘함’을 위해 무엇이 압축되고 삭제되는가”, “그 삭제는 누구에게 비용으로 전가되는가”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머스크식 상상력은 단순한 기술 전망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판단 기준, 나아가 일종의 종말론적 방향성을 띠기 시작한다.
압축의 대가를 누가 치르는가.
이 질문에 도달하면, 다음 주제는 거의 필연처럼 따라온다. AI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지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빨아들이며 커지는 시스템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그 빨대가 어디에 꽂혀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