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의 초대 - <<성경적 비판이론>> 1장을 읽고.
https://youtu.be/jV23aaTnN-o?si=ZhaaYoC8zBRWssYf
내가 너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니가 나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걔네가 너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아니면 니가 걔네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아니잖아 아니잖아 어? 어? 아니잖아 어? 어?
"모든 타자는 전적으로 타자다." (Jacpues Derrida, The Gift of Death, trans. David wils, pp. 77-78).
자크 데리다는 내가 아닌 너에 대해 말하려는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이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이 무엇을 원하고 생각하는지 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에 대한 나의 생각 속에서 당신의 다름을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는 당신, 실은 모든 사람이 나와 똑같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름을 축소시키는 행위를 "총체화(totalizing)"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들 자신의 정체성의 특정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묘사 대상에게 특정 방식의 프레임을 씌우"고, "그들의 개성은 하나의 상징으로, 그들의 독특성은 하나의 관념으로 축소된다."
이러한 총체화에 대해 저항하는 철학자들이 아침 기상송으로 틀어놓을 만한 노래가 있다면 <그건 니 생각이고>가 아닐까? 삶은 무한히 다양하고, 나의 경험과 너의 경험이 다르다면, 너는 무엇이관데 나를 판단하는지 묻는 노래가사가 참 도발적이다. 그냥 니 갈길 가라는 말 앞에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알았어.."라고 하고 돌아서서 집으로 가는 친구는 어떤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갈지 잠시 상상해 본다.
물론 우리는 총체화로 인한 폭력에 쉽게 노출되는 사회를 살아왔다. 나에겐 군대가 그런 곳이었다. 군대에서는 우선 계급으로 그 사람을 판단해야만 한다. 127번 보라매가 되어 훈련장을 뒹굴다 보면 어느새 나도 그 세계의 일원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숨이 턱 막힐 때가 많았다. 몸이 힘들면 그런 생각할 시간도 없어서 괜찮은가 싶다가도, 금세 지역, 학벌, 경력, 나이로 구분 짓고 꼬리표를 붙여서 무리 짓는 일이 반복되는 게 군 생활이었다. 많이들 군대에 가면 사회에서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자아를 드러낸다고들 하는데,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선택하는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는 군 생활이 사회생활의 축소판이라고 하는데, 사회 또한 지역, 학벌, 경력, 나이 등등 여러 꼬리표들로 타자를 포섭하려 든다는 점에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이병, 일병일 때 나는 레비나스 철학을 만나게 된 것을 위로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레비나스는 타자의 성스러움을 강조하면서 타자의 얼굴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얼굴은 그 자체로 맥락이 되고, "살인하지 말라"라는 윤리적 명령을 주체에게 던진다. 윤리는 타자의 '죽을 수밖에 없음'으로부터 나온다. 레비나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약간 혼탁한 말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자의 죽음이 나의 죽음보다 나에게 더 영향을 미친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타자에 대한 사랑. 그것은 타자의 죽음에 대한 감정이다. 죽음에 대한 준거는 타인에 대한 나의 영접이지 나를 기다리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 아니다. 우리는 타인의 얼굴에서 죽음을 만난다."(신, 죽음 그리고 시간, 에마뉘엘 레비나스, 그린비, p.157-158.) 만약, 우리가 타인의 얼굴에서 죽음을 만나지 못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올라오지 않는다면 되돌아보아야 하는 일이다. 타인에 대한 폭력과 타인과의 전쟁은 윤리의 정반대를 구성한다. 그런 면에서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집단인 군대(나는 지키기 위한 전쟁은 필요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에서 계급과 기타 꼬리표를 따라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에게 약자의 얼굴은 호소하고 명령한다.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 예수님은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바보)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5:21-22).
레비나스는 “타자의 나타남(얼굴)은 나의 시선 아래 ‘주제’로 형상화되는 방식이 아니다… 타자의 얼굴은 내가 만든 형상적 이미지를 항상 넘어 파괴한다.”라고 이야기하거나, “얼굴은 그 자체로 의미이며, ‘맥락 없는 의미(signification without a context)’ 다.”, “얼굴은 포섭을 거부하는 현존(the face is present in its refusal to be contained)”이라고 여러 차례 이야기한 바 있다. 포섭을 거부한다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타자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 레비나스는 "나는 어떤 이를 완전하게 알 수 있지만, 이 인식은 결코 그 자체로 근접성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인가요?"라는 물음에, "네. 타인과의 유대는 오로지 책임으로만 맺어집니다. 더 나아가 그것이 받아들여지든 거부되든, 그것을 어떻게 상정해야 할지 알든 모르든, 타인에 대해 구체적인 무언가를 할 수 있든 없든 간에, 책임으로 맺어집니다."라고 대답한다(윤리와 무한 -필립 네모와의 대화, 에마뉘엘 레비나스 지음, 김동규 옮김, 에라스무스 총서, p. 110.).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모든 이 앞에서 모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나는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책임을 집니다."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추도사를 책 한 권 분량으로 썼을 정도로(<<아듀 레비나스>>), 레비나스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두 철학자는 모두 총체화에 저항하는 철학을 주체와 타자의 구분 및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주체와 타자에 대한 다소(아니 많이) 극단적인 도식을 통해서, 레비나스는 주체에게 무한한 책임을 지운다. 그리고 타자는 완전히 타자로 남게 된다.
그런데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는 이러한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하트에 따르면,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얼굴의 '무한한 의무' 앞에서 주체는 한없는 책임을 지고, 즐거움, 욕구, 자기 보존(Conatus)의 선함까지도 그 책임 아래에 놓이게 될 가능성이 있다. 즉, 타자는 구체적 욕구를 가진 이웃이라기보다는 끝없는 요구의 형상으로 격상된다. 레비나스가 주체를 "타자에게 볼모(hostage)가 된 자", 타자 앞에서 "비대칭적, 무한한 책임"을 지는 존재로 묘사하는 한, 그 책임에 짓눌린 주체가 타자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정한 욕구, 다름을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실제로 나의 결핍을 채우려는 욕구(need), 서로 기대고 얽히는 상호 의무와 의존성(dependency), 함께 어떤 목표를 향하려는 기대로서의 희망(hope)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욕구, 의존성, 희망을 일종의 오염으로 보고, 어떠한 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로 순수하고 무한한 책임만을 지도록 요구할 때, 주체는 오히려 단절을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하트는 사랑이란 의무의 극한이 아니라 기쁨, 욕망을 품는 선의 충만에서 흘러나오며, 그래서 타자는 나의 성자성(moral heroism)을 증명하는 무대가 아니라 함께 선을 향해 존재하는 '이웃'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타자는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완전한 섬김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하는 무대가 아니다. "타자는 내가 사랑하는 동료 피조물이자 완전히 고유하고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러한 "'독립적이나 개별적이지 않은'관계가 가능하다면, 나는 타인을 그저 위협 또는 무한한 의무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언어는 더 이상 타자에 대한 총체적인 위협이 아니라 환대와 수용의 수단이다." 하트는 "생각과 언어의 중재는 단순히 다름을 같음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무한에 따르는 자선적 모험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따라서 평화로운 보충과 발견을 통한 차이를 지속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레비나스의 철학과 그에 대한 하트의 비판을 현실에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 학교이든, 군이든, 사회이든 우리에게 나와 너의 대결과 경쟁으로 관계를 이해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피해자는 그의 얼굴로서 호소하고 명령한다. 피해자의 호소로부터 주체는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주체는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동료 인간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반드시 지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죄의 값을 치를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최후의 정의를 실현하실 것이다. 죄는 반드시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타자를 완벽한 타자로 남겨두지 않더라도 타자를 사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타자는 나와의 관계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사랑받은(beloved)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랑받은 자와 사랑받는 자의 관계로, 우리는 서로를 끊임없이 초대하고 무한에 이르는 모험을 할 수 있다. 나의 언어와 너의 언어는 드디어 대화를 할 수 있는 접점을 찾게 된다. 나는 나의 무한한 책임을, 그는 그의 무한한 책임을 지는 관계가 아닌, 나도 그를 초대하고, 그도 나를 초대하는 관계로 나아간다. 나는 나의 욕구와 의존성과 희망을 그에게 드러낼 용기를 가지게 된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함께 소망의 항구로 나아간다. 서로의 모습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기대한다.
니가 나로 살아 봤냐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그러는 너는 나로 살아봤냐고 물어보는 것은 더 이상 대화가 아니다. 그런 설전이 오고 가는 시간은 '누가 더 피해자인지' 대회를 열고, 대회 도중 누가 누구에게 더 상처를 주었는지 헤아려보는 끔찍한 시간이 되어버린다. 그 시간을 포옹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구속이 아닌 따뜻한 포옹으로. 그리고 초대하는 것이다. "공유된 무한함의 자유롭고 무한히 아름다운 수사학"의 가능성으로.
https://youtu.be/xjjxamN6eVY?si=uZ1X2r0B9Q4DcE4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