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정당화하기 - <<성경적 비판이론>> 5장을 읽고.
무한대로 펼쳐진, 바닥 없는 바닷물로 만들어진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라. 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그는 물 사다리를 만든다. 그는 이 사다리를 물위에 받치고 물에 걸쳐 놓은 다음 물속으로부터 걸어 나오려고 한다. 정말로 절망적이고 말이 안 되는 이 장면은 시간이나 우연이 궁극적인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한 자연인의 방법론에 관한 이미지다. 그의 가정에 의하면, 그 자신의 합리성은 우연의 산물이다. 그의 가정에 의하면, 그가 사용하는 논리의 법칙조차도 우연의 산물이다. 그가 찾고 있는 합리성과 목적도 여전히 우연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Van Til, The Defense of the Faith, p. 102.)
자율이라는 뜻의 영어 Autonomy는, 그리스어 '아우토스'(autos, 자기)와 '노모스'(nomos, 법)에서 유래한다. 즉, 사람이 그 자신의 법, 곧 허용될 수 있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들 자신의 규범에 따라 살기로 선택하는 상태를 '자율'이라고 한다. 이는 C. S. 루이스의 말처럼, 원래 판사석에 앉아계셨던 하나님을 피고석으로 내리고, 인간이 옳고 그름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판관으로 대우받기를 자처하는 모습과 연결된다.
그러나 자율적이고자 하는 사람은 도리어 자기 자신이 딛고 서있는 나무가지를 톱으로 잘라내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창세기 3장 6절에서, 하와는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라고 판단한다. 즉, 하와는 자기 자신의 판단과 욕망을 옳고 그름의 궁극적인 판단 기준으로 보고, 무엇이 좋고 참된 것이며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해 결정하였다. 하와는 자신의 '이성'을 지식의 제1의 근원으로 본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자'이다.
"그러나 우리가 옳고 그름의 기반을 우리 자신의 이성에 두고자 할 때, 그 근거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우리가 근거의 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것과 동일한 이성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나는 이성이 권위가 있는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내 이성을 사용하지만, 동시에 이성이 진리를 드러낼 목적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생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진화한 우연의 산물임을 인정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우리 자신을 재판장의 자리에 두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그것은 마치 뿌리를 부정하면서 그 열매를 취하려는 자의 태도와 같이 '믿음의 도약'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하와는 '비합리주의자'이다.
더 나아가서, '자율'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은 선에 대한 어떠한 실체적 형상의 공유도 부인한다. 즉, 모든 사람이 선한 삶에 대한 자기 자신의 비전을 자유로이 선택하게 한다. 그러나 선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곧 선에 대한 공유된 비전으로 삼게 되어버린다는 점에 아이러니가 있다. 절대적인 것은 절대 없다는 것이 절대적인 선이 된다.
니체는 '자율'로 인한 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을 붙들 수 밖에 없는 곤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통찰한다.
과학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형이상학적 믿음'(metaphysical faith)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지식을 추구하는 우리, 불경스러운 반형이상학자(anti-metaphysicians)인 우리들조차도 수천 년간 이어진 믿음의 불꽃에서 여전히 열정일 지핀다. 이 믿음은 기독교의 믿음이자 플라톤의 믿음이기도 하며, 신이 진리이고 진리는 신적이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 신이 우리가 가장 오래도록 견뎌 온 거짓으로 판명 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Friedrich Wilhelm Nietzsche, The Gay Science: with a prelude in rhymes and an appendix of songs, trans. Walter Kaufmann p. 344.)
자율은 자유를 가져올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 알을 께고 나오는 자의 심정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떠한 동료 인간이나 조상의 지혜나 그 무엇으로부터도 판단받지 않는 존재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순간을 고대한다. 나의 앞 길은 내가 결정한다. 내가 계획하고 노력해서 성취한 것을 내가 가져가는 것, 그것은 일견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나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궁극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나는 마치 내가 속한 '우연의 산물'인 세계로부터 벗어나있다는듯이 나를 설명해낼 도리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중간에 적당한 타협을 볼 수밖에 없다. 나의 지식과, 나의 근거는 파편화되어서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믿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어렵게 된다. 어쩌다 내가 '자율'적이게 되는 것에 모순이 있음을 발견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눈감는 것을 선택함으로서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곤 한다(소위 "계몽된 허위의식"은 여기서도 등장한다).
정직하게 돌아볼 때, 자율이 나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 혹은 욕망의 대상의 노예로 만드는 것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의,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세계의 재판관이 될 수 없다. 궁극적인 판단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여기에서 도출된다. 하나님이 없이, 우리는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사이를 줄타기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C. S. 루이스는 궁극적 기준으로서의 자연법, 또는 그가 '도'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의 책 <<인간 폐지>>에서 계속하여 강변한다.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