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성과 인격성의 조화에 관하여 - <<성경적 비판 이론>> 1장을 읽고
'절대적'이라는 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강한 거부감을 준다. 특히,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대중문화와 기호의 존중이 당연히 되는 문화상대주의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절대적인 것을 논하는 사람은 고리타분하거나 심지어는 폭력적인 사람이 되고, 남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판단하는 자, 오만한 자로까지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절대화'시키는 것과 '절대적인 것의 존재를 논하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우리는 보편적인 것, 정의, 질서에 대해서 논할 수 있고, 그러한 (물리세계와 인간 사회의) 질서와 법칙이 실제 적용되는 것을 본다. 그렇기에 절대적인 것이 없이는 실질적으로 대화가 불가능해진다. 나는 나의 경험이 있고 너는 너의 경험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어떠한 해석의 가능성도 도출되지 못한다. 객관의 세계를 배제하고는 어떠한 상호주관성도 존재할 수 없다.
책에서 신이 '절대적'이라고 할 때 '절대적'이라는 것은,
(1) 자신의 존재를 위해 외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자족적이며
(2) 더 이상 기본적인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근본성 또는 '단일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이때, 우리는 절대적이면서 동시에 인격적인 것이 가능한지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많은 철학은 그 둘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택일을 하는 방식으로 이를 해결한다.
절대적이면서도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위와 같은 이분법을 뛰어넘게 하신다.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절대적이고 한편으로는 인격적인 분이 아니다. 절대성을 수용하기 위해 인격성을 타협하거나, 절대성이 인격성을 밀어내지도 않는다. 하나님 안에서는 절대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 양자가 각각 그 에너지의 정점에 있다."
그리고 위와 같은 구분은 과학(객관성)과 예술(주관성)의 대립에 관하여도 적용할 수 있다.
과학은 우주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는 가정에 의존해 우리의 이성과 그에 따른 계산이 현실에 어느 정도 부합할 수 있도록 한다. 만약 "서로 다른 신이 세계 곳곳을 다스린다면 왜 같은 행동이 모든 곳에서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기대할까?" 우주가 합리적으로 탐구 가능하다는 전제는 중세 이후 서구의 기술 진보와 사회 발전의 근간이 되었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학적 추론이 경이로운 현대 과학으로 이어지게 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성이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근간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격성은 예술연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은 우주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만큼이나 가치 있는 일이고, 두 노력을 뒷받침하는 것은 동일한 절대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이다. 따라서 절대성이나 인격성 중 어느 쪽도 다른 쪽의 근거가 될 수 없으므로, 예술이 어리석게 과학을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과학을 예술의 숨겨진 진리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책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 외에, 실제로 하나님의 인격성이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예시나 과정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예술' 자체에 대한 정의도 다시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예술은 특히 인간의 창조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절대성과 인격성은 마치 과학고와 예술고만큼이나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종종 예술, 예를 들면 이상의 오감도와 같은 시를 과학적으로 해석하였다는 기사처럼 과학과 예술이 절묘하게 만나 아름다운 해석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흔히 말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종종 하고 있는 작업과 같이) 과학이 예술의 숨겨진 진리라는 사실만 부각되는 경우가 발생하고, 그 중심에는 '과학주의' 혹은 '과학을 통해 세상을 보기'와 같은 절대성에 대한 헌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과학과 인문학을 엮어보려는 다양한 책들은 기본적으로 '과학적'으로 보면 삶의 의미, 관계, 사랑의 의미는 없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마치 그런 것처럼' 살아가라고 하거나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의미를 창조하고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처럼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절대성에 무릎을 꿇은 인격성에 심폐소생술을 하거나 강령술을 하여 좀비로 만들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C. S. 루이스가 <인간폐지>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러한 의미의 조작자들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정하면서도 마치 자기 자신이 인격성의 근원이 된 것처럼 행동하나, 곧 그렇게 행동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은 알맹이는 잃은 채로 남은 껍데기만을 붙들고 있는 시대이고, 나무의 뿌리를 부정하면서 아직 시들지 않은 열매를 따먹고 살아가고 있는 시대이다.
과학이 예술을 침범해 들어온 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아마도 죽음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인간의 죽음에는 생물학적 죽음이 반드시 포함되지만, 과학은 그곳에서 설명을 멈추어야 한다. 그럼에도 만물이 우연히 생겨났다는 믿음은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까지 그 해석의 틀을 넓혀 들어온다. 그러나 사람들이 죽음을 바라볼 때 느끼는 어떠한 허무함, 또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으로 다 설명할 수도, 설명하여서도 안 되는 영역에 해당하지 않을까? 이찬혁이 <장례희망>에서 장례와 희망을 동시에 노래한 것처럼, 예술은 죽음을 승화시키고 죽음 너머를 바라보게 하며, 과학적 설명이 줄 수 없는 의미와 감동을 우리 안에 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