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인격적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란 말인가

인격적인, 너무나도 인격적인 - <<성경적 비판 이론>> 1장을 읽고.

by 박지명
예루살렘이 아테네와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대학에서 듣는 첫 철학 개론 수업시간은 보통 큰 배움의 뜻을 품은 새내기들의 기대를 무너뜨리곤 한다. 나의 첫 철학 수업은 서양철학입문이었는데, 슬프게도 1교시 수업이었기 때문에 성적을 받기 더 수월했다는 것 외에 많은 것이 남아있지는 않다.


많은 경우에 철학입문수업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야기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것이 (서양) 철학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철학적 질문을 시작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는 각각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무한한 실체(substance)인 물 또는 공기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무슨 뜬금없고 참 무지한 통찰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역시 고대 사람들은 무식했구나"라고 생각하기도 쉽다. 그런데 그러한 주장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물이냐 공기이냐가 아니라, 만물이 어떠한 '궁극적 실재'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 자체이다. 그리고 현대 과학자들이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세상은 끈, 파동, 양자장 또는 최초의 빅뱅에 의해 생성된 단순한 수학적 요소와 같은 구성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그 생각의 연장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성경은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실재는 인격적인 하나님,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친 하나님,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2인칭으로 부르는 하나님,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고 계획하시고 약속하시고 심지어 후회하시거나 뜻을 돌이키는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한다. 하나님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보다 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것은 없다.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실재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격과 성품이며, 그것은 물질, 에너지, 공간과 시간, 관념보다 먼저 존재한다.


이러한 주장은 현대인인 우리에게 무언가 어색하다.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 빅뱅과 물리학 대신에 뜬금없이 '인격적인 하나님'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매우 '비과학적'일뿐만 아니라 '전근대적'인 산물을 아직도 붙잡고 있는 사람으로 비치기 딱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아래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인격성은 즉각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세계를 이해하게 해 준다".


다른 모든 것의 근원이 그 자체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것도 그런 상태일 수 없다.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인 것이 그 자체로 구체적인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부기(bookkeeping)를 영원히 지속한다 해도 돈 한 푼 만들어 낼 수 없다. 시를 짓기 위한 운 맞추기 그 자체로는 결코 시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부기에 그 밖의 다른 것(즉, 계좌에 실제로 입금된 돈)이 있어야 수입이 발생하고, 운 맞추기에 그 밖의 다른 것(시인이 사용하는 실제 단어)이 있어야 시가 탄생할 수 있다. 만약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원초(the Original Thing)는 어떤 원칙이나 일반성 같은 것, 더더구나 '이상'이나 '가치'같은 것이 아니라 철저히 구체적인 사실이어야 한다.

- C. S. Lewis, Miracles: A preliminary Study


'인격'이라는 말은 어려운 개념이다. "그 사람의 인성은 저질이야"라는 말과 같이 '인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만, '인격'이라는 말은 그와 사뭇 다른 뉘앙스를 가진다. 로완 윌리엄스에 따르면, 인격이란 "관계가 교차하고 차이가 만들어지며 새로운 관계가 창조되는 지점"이다. 그에 따르면, "나를 한 인격으로 만들어 주는 것, 그리고 나를 다른 인격이 아닌 이 인격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저 일련의 사실들이 아니"다. 나를 인격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내가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에 있고, 내 주변의 다른 관계가 아니라 이 관계 속에 있고, 이 부모의 자녀이고, 이 자녀들의 부모이고, x의 친구이고, y의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라는 어마어마한 사실"이다. 계속하여 인용하자면 "나는 관계의 그물망 중앙에, 선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으나, 그 관계의 그물망 중앙에는 "저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영역"이 있다. "바로 단순히 어떤 것이 아니고, 단순히 기능이 아니고, 단순히 나에 관한 사실이 아닌 어떤 요소, 신비로운 어떤 요소, 3인칭 분석으로는 열리지 않는 어떤 요소"가 바로 '인격'이다.


'나'라는 존재를 '나'로 만드는 것은 경험 배경, 성향과 같은 성질 또는 이성, 감성, 육체성과 같은 본성들의 단순한 합계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과거 경험을 다시 해석하고, 현재 성향을 수정하며, 미래를 약속해 자기 서사를 편집하는 주체로서, 나를 둘러싸고 관통하는 수많은 이야기의 중심부에서 그 이야기의 조각들을 하나의 1인칭 관점으로 묶어내는 '나'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둘러싼 다른 인격, 그리고 비인격들과의 관계에서 응답하고, 미래를 열어가고 책임을 지는 주체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부분 중 일부는 고정되어 있고 나머지는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고정된 본성에 갇히지 않고 미래를 여는 주체이다.


위와 같은 '인격'이라는 것이 어떻게 처음에 발현되었을지에 대해서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만 유익하다. 만약 "인격성이 진화 과정의 어딘가에서 우연히 생겨난 것이고 조만간 다시 사라질지도 모른다면, 사람은 바다의 파도와 같을 것이다. 즉 덧없고 때로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특성을 가진 일시적인 구성이며, 지속적인 우주적 의미가 없다. 그리고 우주가 가장 근본적으로 물질과 시간과 우연의 조합이라면, 이 세 가지의 한 조합(예. 당신)이 다른 조합(예. 바위나 대륙 빙하) 보다 반드시 더 낫거나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하기는 매우 어려워진다. 삶이 죽음보다 낫다거나, 다른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못되게 대하는 것보다 낫다는 직감이나 정당화할 수 없는 결정보다 더 깊이 있는 방식으로 일관되게 주장할 수 없다."


구체적인 인격체로부터 세상이 구성된 것이 아니라면, 인격의 발현과 존엄성은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사람들은 그저 어느 순간에 사회를 형성하면서 그러한 윤리나 도덕이 발생했다고 주장하곤 하지만, 과학주의적 설명은 인격의 구체적 질료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비인격적인 우주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진정으로 이뤄지는 일은 없다." 또 더 나아가자면, 도덕과 윤리가 이루어져야 하는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렇기에 흔히 주장되는 우리에게 '마땅히 주어진 바'는 없고, 나의 실존이 그것을 만들어 간다는 주장만큼 혼란스러운 주장은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일견 타당한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도 완성된 채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격성의 발현과 관련하여서는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세계가 등장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허공에서 인격성을 택하고 나보다 무능하고 나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나와 동등하게 대하기로 택할 내적 동기가 없다. 무지의 베일 너머에서 그러한 선택이 이루어지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인격성이 없는 합리성은 인격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마지막 저자의 질문은 합당하다.


인격적인 모든 것이 비인격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우주와 비인격적인 모든 것이 인격적인 하나님의 실재와 의지에 의해 변화되는 우주 중 어느 것이 더 공정하고 동정적인 사회의 기초를 제공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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