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자기, 문화비판 이해 - <<성경적 비판이론>> 4장을 읽고.
마음이 건강한 사람만이 자기 의심과 문화에 대한 의심을 일관되게 해낼 수 있다!(기계론적 인간관을 가진 사람은 마음을 '뇌'라고 축소하고 싶어하겠지만, 나는 '마음(mind)'은 '나'의 '마음'으로서 '뇌'와 구별되는 하나의 '장소 없는 장소'에 해당한다고 본다.)
성경은 '마음'이란 생명의 근원이면서(잠 4:23), 인간의 결정이 일어나는 중심 자리로,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으로서 "누구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렘 17:9).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는데도, 사람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다고 말한다(롬 1:18-19). 즉, 인간의 마음은 지켜야 할 인간 생명의 근원이지만,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거짓된 것을 그대로 믿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마음 속에 자리한 그러한 인간의 "허위의식"을 비판하는 틀을 제공한다.
마르크스 또는 엥겔스에게 있어서 "허위의식"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오해하도록 만드는 잘못된 아이디어 체계이다. 마르크스는 허위의식을 비판하고 계급 투쟁을 일으키는 것이 공산사회의 도래를 위한 길이라고 믿은 점에서 사회에 대한 의심과 비판을 이어간 사상가이다. 그의 사상의 역사적 결말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때때로 우리는 개인 또는 집단이 의도적으로,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거짓을 알고 있음에도 그러한 거짓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 된다. 이를 문화 이론가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계몽된 허위의식"(enlightened false consciousness)라고 하였다.
위와 같은 마르크스의 사회 비판, 니체의 도덕 비판과 같은 비판적 접근, 즉 자신의 마음과 사회를 의심해보는 입장은 때때로 성경 비판으로 이어지지만, 그럼에도 그 기본적 구조에서 "우상숭배를 끊임없이 비난함으로써 성경이 종교에 대해 이미 행하고 있는 자기 비판의 확장" 버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성경은 그 자체로 진리를 가리는 거짓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심의 해석학이자, 허위의식의 폭로이다.
그런데 메럴드 웨스트팔(Merold Westphal)에 따르면, 그러한 허위의식의 폭로는 매우 조심스러운 균형점을 필요로 한다. 한편으로, "우리가 그것을, 데카르트 사상을 가진 사람이든 공산주의자든 그 밖의 누가 되었든지 간에, '그들'에 대해서만 적용할 때 쉽게 도덕적 과대망상증의 한 형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우리도 자기 의에 빠진 바리새인에 대한 공과를 마무리하면서 '어린이 여러분, 이제 두 손 모아 눈 감고 머리 숙여 우리가 바리새인과 같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교회학교 교사처럼, 자기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즉, 일관성을 잃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게만 가하는 비판의 방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것은 식민주의, 특권, 억압과 같은 무거운 역사 유산을 가진 문화 집단 가운데 특히 널리 퍼져 있다. 이들에게 과거의 생생한 잔학 행위와 공포에 대해 자기반성, 애도, 회개를 하고자 하는 건강한 본능적 욕구는 자기 자신의 문화(목욕물, 아기, 그 밖의 모든 것)를 부정하고 말살하려는 자기 혐오로 변질된다(Oliver O'Donovan, The Ways of Judgment: The Bampton Lectures, 2003 p. 312.).
그래서 우리는 폴 리쾨르가 '재구성화'(emplotment)라고 부르는 것, 즉 "전에 뒤죽박죽이었던 이벤트를 삶 속에 내재한 '플롯'을 따라 하나의 '의미 있는 전체'로 모아 정돈(재구성)하는 것"을 "허위의식" 비판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리쾨르가 의심의 풀무불을 통과한 후, 징계 받아 정신을 차려서 믿음으로 되돌아가는 "제2의 순진함"(second naivete)라고 부른 것에 이르게 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제2의 순진함"에 다다르기 전에 포기하곤 한다. 우리가 마음의 힘을 얻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으로, 우리가 자기 자신과 문화에 대한 비판을 잃어버리고 소위 "계몽된 허위의식"에 빠지게 되면, 적어도 나와 우리 가족은 괜찮다는 것에 만족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다. 사회가 이렇게 구성된 것에도, 내가 이만큼 살아내게 된 것에도 이유가(때로는 신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일상을 사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우리에게 이러한 일상에 대한 긍정은 필요한 것이지만, 비판 능력이 상실된 우리는 "그래도 그들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다"라는 위로를 하며 각종 여행지, 각종 맛집을 찾아다니며 누리는 것에 집중하곤 한다.
다른 한편으로, 자기 자신과 문화에 대한 과도한 비판을 이어나가다가 긍정적인 자기상을 잃어버리게 되기도 한다. 노력하지 않은 내 모습을 탓하고, 노력할 수 없게 한 사회를 탓하지만 대안을 제시할 능력은 상실한 채로 자기 자신과 문화에 대한 통합적이고 역사적인 이해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 경우 비판하기 위한 비판에 빠져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맹신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고, 웨스트팔이 "영적 폭식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한때 가졌던 모든 영양분을 빼앗긴 부패한 쓰레기를 제거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영적인 굶주림을 채워주지 못할"뿐 아니라 "우리가 영양실조 상태에 머물게 만든다."(Westphal, Overcoming Onto-Theology, p. 141.)
그래서 우리는 의심하기의 반대로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즉 리쾨르가 말하는 "비판을 거친 믿음이자 후기비평적 믿음(postcritical faith)"에 이르러야 한다. "이해하기 위해 믿고 믿기 위해 이해하라"는 그것을 표현하는 경구이며, 이 경구는 믿음과 이해의 '해석학적 원'(hermeneutic circle) 그 자체다(Ricoeur, Freud and Philosophy, p. 28.). 위와 같은 두 극단에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마음을 지키고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이 속한 더 큰 이야기를 지향해보아야 한다.
이는 어느 한 순간에 만족하지 않기 위하여 시소의 균형을 잡는 일이다. 시소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전체 시소의 균형점이 어딘지 저울질해보아야 하고, 무엇이 얼만큼이나 시소의 양쪽에 올라가 있는지 파악하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때, 더 큰 이야기를 지향한다는 것은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현상을 단순히 비판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 흐르고 있는 전제를 상상해보고 그 전제들을 가로질러가는 새로운 길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어떤 것은 꿈꾸고, 어떤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길까? 왜 사회의 유행은 먹방, 욜로, 갓생으로 옮겨갈까? 나는 그 사회의 흐름에서 어디에 속해있을까? 그것을 벗어나는 결단은 어디에서 오는가? 선과 악을 가르는 틈은 그들과 나 사이에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나를 관통하고 있기에, 의심의 시소가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하면서 성경의 비판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균형잡기는 어렵기 때문에 인기가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해석학적 원'을 그리며 우리의 삶을 형성하기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는 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