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까지 높아지고 싶은가

눈 감고 낙하 - <<성경적 비판 이론>> 8장을 읽고.

by 박지명

창세기에는 유명한 바벨탑의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 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 11:1-4)

사람들은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라고 말한다. 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 그리고 그 세계를 확장하고 단단하게 뿌리내리게 하는 것, 그 모든 과정과 결과를 나로부터 만들어 내는 것. 그들이 원하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에게 탑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그 탑이 하늘과 땅 사이의 다리 또는 관문"이며, "신이 그의 성전으로 내려와 예배를 받고, 그의 백성을 축복하는 것을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신에게 등 돌린 문화의 자율적 기술력에 대한 자랑스러운 행사로 보는 것이다." 어느 쪽으로 보든 탑의 건축자들은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자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신이 약간의 도움을 필요로 해서 집을 지어 달라고 요구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자신들의 이름을 날리려고 했거나, 오만함으로 신의 위대함에 맞설 만한 탑을 쌓아 올리려는 것일 수 있다. 바벨은 원래 고대 아카드어로 '밥엘'(Bab-el), 즉 '신들의 문'이었으나, 결국은 바벨(babel), 즉 혼돈이 되고 만다. 그들은 누구든지 그 탑을 볼 때마다 자신들의 기술력과 자신들의 이름을 기억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결국은 자기 자신조차 혼돈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늘날 바벨탑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하여, 저자는 (1)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세워 보려 노력하는 현대인의 모습에서, (2) 그리고 자신이 그만큼 노력하고 성취했음을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궁극적 정당화가 아닌 소셜 미디어, 방송, 출판물 같은 '생명책'을 통해 중계되는 여론의 심판정에서 최종적으로 언도받고자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발견한다.


누가 특별히 성공하지 못하면, 그것은 (거의 대부분) 그들 잘못이다. "우리의 꿈을 끝까지 추구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욕망의 부재일 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탁월하고 아름다워야 할 뿐 아니라, 소셜 미디어에서도 명성이 검증되어야 한다. 전통적 자아가 지역 사회의 판단에 좌우되었다면, 현대적이자 세계적인 자아는 컴퓨터로 매개된 마을의 판단에 얽매어 있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우리 자신의 이름을 날리려는 추구는 우리를 늘 부적절한 성과, 늘 더 억압되고 여과된 자기 표현, 우리가 날리려는 이름에 대한 소셜 네트워크의 늘 잠정적이고 늘 바뀔 수 있는 판정이라는 처벌 체제로 몰아넣는다."


이것은 생각보다 굉장한 아이러니이다. 자기 자신의 삶의 목적을 자신이 만들려는 사람이, 결국에는 그 궁극적 판단을 타인에게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벨을 만들려고 했던 건축가들이 자신들이 만들고자 했던 스펙터클, 즉 누구나 주목하는 장면에 깊이 몰두했던 것과 연결된다. 우리는 자신의 양심이 자신을 판단할 최후에 보루라고 생각하다가도 타인의 인정을 받고 주목을 끄는 일에 결국은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위대한 선행과 커다란 악행에 대해서는 주목하지만, 어느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의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재도 평가도, 의미도 없다고 느끼게 된다. 나에게도 이 문제는 커다란 숙제였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이후 '신독(愼獨)' 즉 "자기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가는 일"은 정말이지 꿈만 같은 일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도리를 스스로 만들어내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웃픈 현실이다.


https://youtu.be/EtiPbWzUY9o?si=Ohy5Jrsh2xBBdbJr

악동뮤지션의 '낙하' 뮤직비디오에서 이찬혁은 시종일관 파티로 즐기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으면서도 전혀 즐겁지 않은 표정이다. 바벨과 같이 높은 빌딩에서 펼쳐지던 파티에 구멍이 생기고 이찬혁은 낙하한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생기를 잃은 아이들이 앉아 당신을 응시한다. 끝없이 추락하는 것 같던 이찬혁은 어느새 반대로 하늘로 하늘로 올라간다. 다시 파티의 자리에 돌아왔을 때에는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은 차분히 앉아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는 우리를 응시한다.

초토화된 곳이든 뜨거운 불구덩이든 말했잖아 언젠가 그런 날에 나는 널 떠나지 않겠다고
죄다 낭떠러지야, 봐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아플지도 모르지만
내 눈을 본다면 밤하늘의 별이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셋 하면 뛰어 낙하- 하- 핫 둘 셋 숨 딱 참고 낙하 셋 하면 뛰어 낙하- 하- 핫 둘 셋 숨 딱 참고 낙하

때로 우리에게 올라가는 것보다, 낙하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세상에는 눈을 감고, 세상의 아래에 위치한 아이들과 같은 이들에게는 눈을 뜨는 일이 필요하다. 만약 내가 나 스스로의 심판자가 되기를 포기할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의미 없는 행동이나 의미 없는 말, 의미 없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나의 노력과 남의 평가로 쌓아 올린 성공의 무언가가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나'를 세우려는 사람에게는 낙하와 비슷하다. 떨어지고 또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떨어지지 못하는 이에게 악뮤는 떨어질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초토화된 곳이든 뜨거운 불구덩이든, 말했잖아 언젠가 그런 날에 나는 널 떠나지 않겠다고" 이 함께함의 선포가 위로가 될 때, 나는 떨어질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