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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조 Sep 28. 2023

엄마 A, B, C, D

 나를 표현하는 수식어 중 '엄마'라는 단어는 없다. 그 단어의 부재가 가끔 나의 직업과 맞물려 나를 괴롭힐 때가 있고 가끔은 개인의 삶 자체를 의미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주변에 정말 다양한 모습의 엄마들이 존재하고 나는 그들과 자식을 세트로 마주하는 직업이기에 개인이 아닌 '엄마'로서의 모습을 자세히 볼 기회가 많다. 오늘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중 몇몇의 엄마들 이야기다. 


 그들은 모두 엄마이다. 조금 더 설명을 붙이자면 편모, 한부모, 홀어머니, 이혼가정 혹은 미혼모 등의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 즉, 그들은 모두 혼자서 아이를 키워왔고 키우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싫어하는 말 중 하나지만) 아프리카에는 한 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마을은커녕 아이의 성장을 함께 지켜볼 남편조차 없다. '아빠'는 존재할 수 있지만 '남편'은 부재한다. 


 A는 60대 여성이다. 이혼 후 30여 년간 혼자 일을 해 아이를 키워냈다. 아이는 잘 커서 결혼을 했다. 공장에서 납땜을 하며 아이의 학원비를 낸 것은 A였고 군대에서 휴가 나온 아들이 돌아올 곳도 A의 원룸이었지만 아이의 결혼식 혼주 자리엔 아이의 '아빠'가 앉았다. A는 청첩장도 받지 못했다. 청첩장에 적혀있는 다른 엄마의 이름 때문이다. A는 여전히 혼자 살고, 일을 하고 본인의 희생을 보상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A는 운다. 


 B는 지역에서 성공한 사업가이다. 여러 개의 사업체를 굴린다. 젊은 나이에 꽤나 많은 것을 이루었고 여전히 많은 것을 하기 위해 도전 중이다. B는 미혼모다. 아이의 아빠는 남자친구였으나 남편은 되지 않았다. 모두가 반대했지만 B는 아이를 지켰다. 그리고 일을 했다. 식당을 했다. 술도 팔았다. 언젠가 B는 아이에게 자신을 이모라고 부르길 요구했다. 아이는 그때를 기억한다. 그래도 B는 아이를 지켰고 잘 키워냈고 아이는 존경하는 인물로 혼자서 자신을 키워낸 B를 꼽았다. B는 매일이 행복하다. 


 C는 이혼녀이다. 아이가 셋이고 지금은 셋째와 함께 지낸다. 아이는 초등학교 저학년이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C는 일을 한다. C는 렌털 가전업체의 코디이다. 아이는 4시까지 학교에 있다가 학원에 간다. 학원에서 7시까지 시간을 보내고 퇴근한 엄마와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9시면 엄마와 함께 다시 집을 나선다. C의 다른 일은 목욕탕 청소이다. 아이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서 일을 한다. 나는 C는 잘 모르지만 아이를 안다. 아이는 순수하다. 또래에 비해 학습이 많이 느리지만 강인하다. 엄마와 함께 하는 목욕탕 청소를 일기에 쓴다. 아이의 일상에 또래 같은 캠핑이나 여행은 없지만 아이는 C와 함께 한 시간을 일기로 쓴다. 


 나는 딩크이다. 엄마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희생해 누군가를 길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A, B, C를 바라보는 일은 꽤나 흥미롭고 안타깝다. 그녀들은 모두 강하다. '부모'로 존재하는 이들보다 더 단단한 껍데기가 그들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다가가서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쪽이 너무 여리다. 온갖 경험들로 껍데기만 둘러쌌다. 어딘가에 눈물을 숨겨둔 샘이 있을 것만 같다. 그런 모습을 느끼면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뒷걸음질 치게 된다.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일 것 같아서 모르는 척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녀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오만을 저지를까 도망치게 된다. 그들이 쌓아 올린 시간들을 내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인가. 


 D는 사별했다. 두 명의 아이가 있고 특별한 직업은 없다. 하느님의 교회에서 봉사를 한다. 그리고 남자친구가 있다. 일정한 수입이 없으므로 월세방에서 나와 아이들과 모텔에 들어갔다. 가끔 남자친구를 만나느라 외박을 하면 아이들은 모텔 정수기에 물을 받아 컵라면을 먹는다. 아이들은 작고 말랐다. 첫째는 어른을 경계했고 둘째는 모든 관심을 좋아했다. 한 겨울에 아이는 맨발이지만 D의 손톱엔 예쁜 핑크색이 발려있다. 유치가 모두 썩어 아이는 급식에서 삼킬 수 있는 것만 골라 먹지만 D는 교회 봉사에 가야 해 아이를 데리고 치과에 갈 시간은 없다. 아이 둘은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D는 쉽게 엄마의 자격을 포기했다. 


 '엄마'라는 것은 뭘까, 모성애는 타고나는 것일까. 10개월 동안 인간의 몸에서 인간을 키워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3킬로 내외의 작은 인간을 사회화된 인간으로 키워내는 것은 어떤 노력을 요하는 것일까. 도대체 '엄마'라는 이름에 붙어있는 수없이 많은 의무와 책임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D와 같이 '엄마'라는 단어를 포기하는 사람들은 무엇일까, 그들은 본인의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는 걸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모성애'일까 '인류애'일까 혹은 '돈'일까. 그렇다면 A, B, C가 아이를 지킴으로써 잃었던 것은 무엇일까? 


 엄마. 

두 글자가 주는 울림의 무게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떠올리면 채색되는 색깔도 다르겠지. 오늘 나는 A, B, C에게 무지개를 그려주고 싶다. 고단한 하루가 하루라도 비껴가길 바라본다. 희생에 대한 보답이 무조건 따라오진 않겠지만 그들의 삶이 행복하길 기원한다. 그들을 수식하던 이혼녀, 미혼모, 편모 등의 단어들이 필요 없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D의 아이들이 행복하길, 한 때 우리 반이었던 그 아이가 행복 속에 자라고 있길 바란다. 


 추석이다. 

A는 이번 명절도 혼자이다. 아들의 독립과 함께 엄마 A의 역할을 대부분 잃은 A에게는 외로움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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