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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 Greene Apr 20. 2024

용기 있게 쓰여진 육두문자

누군가의 양면성을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

  


  

    중학교 1학년 때, 반 친구 중에 조용한 친구가 하나 있었다. 다른 친구들끼리는 이미 한 학기를 다 같이 보낸 후, 늦은 시기에 합류했던 전학생이었다. 내가 그녀의 메모를 보던 날, 그 애는 내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긋나긋 배려심 있고 언제나 섣불리 말하지 않던 어쩌면 조금은 소심해 보였던 아이. 뒷자리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거의 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 없었다. 어느 날, 국어시간에 4명 씩 그룹을 지어 집에서 해온 숙제를 바꿔 읽어보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짝궁과 우리 뒷줄에 앉은 두 명과 조를 이뤘다. 잠시 의자를 뒤로 돌려 앉아 뒷 줄에 앉은 그 애와 처음 마주보고 앉았다. 어색한 공기. 나는 그 애랑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가 짧게 마주친 찰나에 눈으로 웃어 인사를 건넸다. 내 눈 인사를 보고 그 애는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수줍게 따라 웃어줬다. "자, 이제 왼쪽에 앉은 친구 글을 받아서 읽습니다." 크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내려진 선생님의 지시에 내 노트는 짝궁에게 넘겨지고 내겐 전학생의 노트가 넘겨졌다. 무언으로 척척. 대화는 따로 없었다. 다시 앞으로 몸을 돌려 앉아, 친구가 해 온 숙제를 읽기 시작했다.

    전혀 특별할 것 없던 나른한 오후 수업, 그에 딱 어울리는 특별할 것 없었던 교과서 식 숙제였다. 그 애가 숙제로 써온 글도 특별한 개성 없이 내가 써 온 글과 놀랍도록 비슷했다. 선생님의 숙제 검사를 통과할 수 있도록 흠이 없는, 선생님이 내 건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는 그런 글. 친구의 숙제에 감상평을 적어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글을 적기 편하게 노트를 펼쳤다. 반으로 접힌 채 건네 받은 스프링 노트를 두 면이 보이게 펼친 것이다. 그 때 뒷면에서 그 애가 삐뚤삐뚤 사선으로 적어 놓은 메모들을 발견했다. 그 평범하던 오래 전 수업시간을 지금에도 기억에 남아 있게 한 것은 그녀의 숙제 반대편에 적혀 있던 바로 이 메모였다. '미친x, XX하고 있네.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깝치고 있어. 내가 oo중 친구들 불러서 말하면 아무 소리도 못할 x이...' 블라 블라 블라. 누군가를 향한 적나라한 험담과 육두문자들이 뭉텅뭉텅 적혀 있었다. 메모는 여러개였고, 각각의 메모가 대충 어떤 상황에서 쓰인건지 짐작도 갈만큼 꽤나 자세히 적혀 있었다. 대상들을 향한 분노와 증오가 내 마음처럼 느껴지던 메모였고, 내가 알지 못한 그녀의 또 다른 성격이 그 메모에 투명히 담겨 있었다. 거부감이 느껴졌다. 열 넷, 막 초등학생을 벗어난 나이였던 우리. 누구나 험히 말했고, 친구들의 거친 말들이 오히려 이질감없이 납득 가던 시기였다. 그랬기에 왈가닥처럼 할 말 못할 말 구분 없이 뱉고 보던 활달한 친구들이 적었다 하면 놀랍지 않았을 그런 메모였다. 하지만, 눈 마주치는 것도 어려워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떨궈 시선을 피하던 그 애가 쓴 메모라는게 전혀 어울리지 않아 당황스러움에 스프링노트를 다시 반절로 휙 접어버렸다. 그 날의 기억은 그 몇 분이 전부였지만, 적대심과 공격성의 육두문자가 가득했던 그녀의 메모는 그 후 오랜 시간 동안 주기적으로 떠올랐다. 그건 마치 내게 풀지 못한 숙제가 남아 있다며 울리는 알림벨 같았다.

    '겉모습, 속모습' 그런게 있다는게 익숙하지 않던 나이. 조용하고 얌전하던 아이의 메모에서 내가 기대했던건 뭐였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사람에게 다양한 모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말로는 '사람은 당연히 여러가지 다양한 모습이 있지.' 하면서도, 내가 머릿속으로 그려놓은 그 사람의 이미지가 빗겨나가는 순간이면 매번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그 사람의 시선 안에 아직은 안전하리라 기대했던 '나'라는 사람의 모습이 어쩌면 한 번도 사랑받은 적이 없었을지 모른다는 공포심.' 10년이고 20년이고 뜬금없이 떠오르던 그애의 메모, 그 속에 있던 진한 불편감을 오래도록 부정한 끝에야 조금 씩 그 감정의 정체를 마주하게 됐다. 날 친절히 대해주던 겉모습처럼 그 애의 속마음도 나에게 친절하기를 기대했다. 똑똑하지도 인기가 많지도 않아 매력 없는 나의 평범함에도 혹시 이 앤 날 괜찮게 봐 주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툭툭 튀어 나오는 무례함에도 혹시 이 앤 날 아량있게 이해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던 이기적인 마음들. 그래서 내 모습을 조금은 더 솔직히 보여줘도 괜찮지 않을까 설레던 마음. 아량과는 거리가 멀던 걸걸한 아이들의 겉모습, 그것과 다를 바 없던 그녀의 메모 속 모습은 나의 이런 기대를 한 순간에 깨뜨려 버렸다. 겉과 속이 크게 다른 사람을 보며 느끼던 소름돋음은 그 사람의 양면성의 탓이 아니었다. 그건 내 두려움이었다. 내 컨트롤에서 벗어난 상황, 사랑받지 못하리란 공포가 상대의 양면성에서 비롯된 '소름돋음'이라 매번 포장되어 왔다.

    그 육두문자는 용기 있었다. 적어도 나보다는 용감했다. 그녀는 글로나마 자신의 속마음을 여과없이 적어내고 있었다. 밖으로 내뱉는 말이 곧 속마음이던 활달했던 아이들, 그리고 겉으로 내보이진 않았지만 노트에 만큼은 보이지 않는 이면을 거침없이 적었던 그 아이. 하지만 활달하지도 그리 수줍지도 않던 난, 그 중간 어디쯤의 모습을 '나'라고 사람들에게 내보이며 혹시나 숨겨둔 나의 모습이 누군가에게 들킬까 무서워 공책에 조차 적지 못하던 그런 아이였다. 내가 그 애의 한정된 모습만을 기대했듯 내 한정된 모습만이 사랑받을 거란걸 내 직감은 알았다. 내가 누군가의 양면성에 소름끼칠 때, 사람들이 내 숨겨둔 모습을 알고 떠나갈까 두려워 더 꼭 힘을 주며 나를 감췄다. 속으론 욕하면서도 겉으론 웃어보이던 비겁한 그 애. 하지만 그런 마음들이 내 안에 있다는 것 조차도 알지 못하게 버렸던 내겐 그 애가 용감해 보였다. 친구들 앞에서는 꼭꼭 숨겨두었을 지언정, 노트에 속마음을 끄적일 때 만큼은 두렵지 않았던 거니까. 그녀는 나보다 훨씬 덜 비겁했다. 용기있는 메모로부터 튀어 오른 그 진실이 나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교과서 식 숙제 옆에 적혔던 가장 개성있던 몇 줄의 메모가 일말의 개성도 포기한 채 한정된 모습으로 '그저 사랑만 받으면 된다.' 갈구하던 내 작디 작던 마음을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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