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관람가 66.
<남한산성> 행간읽기 1. 흑과 백
"(...)
문관인 명길은 흑입니다. 먹같이 검은 옷 위에 붓같이 검은 수염이 내렸습니다. 명길의 첫 씬에서 청의 병사들은 화살을 쏴 명길을 위협합니다. 빗발치는 화살을 겁내지 않고 명길은 오히려 적의 아가리 속으로 한 발자국 더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기어이 말길을 엽니다.
상헌은 백입니다. 흰옷 위로 늘어뜨린 흰 수염 끝에 칼자루 같은 기개가 배어있습니다. 첫 등장 씬에서 상헌은 얼음길을 안내하는 사공을 베었습니다. 청이 나루터에 도착했을 때도 사공이 길잡이를 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여자아이를 돌보는 굶주린 노인의 무고함도, 상헌은 끝내 베어야 했습니다. 상헌의 칼을 맞은 사공의 붉은 피가 흰 눈 위로 번집니다.
꼭 바둑처럼 이 흑과 백의 대국이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죽음은 견딜 수 없어도 치욕은 견뎌낼 수 있는 것이라는 명길. 치욕으로 사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라는 상헌. 임금은 이 둘에게 한사코 답을 묻지만 끝내 어느 쪽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 행간에서 문득 쓸쓸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자가 살아남는 과정이란 아름답지만은 못하구나. 생존은 늘 다급하구나. 빈곤의 시기는 물론, 굴욕의 시간도 있겠구나. 돌아보면 초기 스타트업의 생존도 아주 다른 얘기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