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쪼렙 스타트업의 독특한 채용공고, 두 번째 이야기
멋진 프리킥에 관해 얘기할 때 사람들은 호날두, 베컴을 말합니다.
맞습니다. 호날두는 끝내주게 멋진 프리킥을 차는 선수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프리킥이 한 사람만 찰 수 있는 건 맞지만
심지어 프리킥도 결코 혼자 넣을 순 없습니다.
누군가 옆에서 공을 밀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같이 달려줘서 골키퍼의 타이밍을 빼앗아야 합니다.
상대 수비수 사이에 끼어들어 공간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호날두의 환상적인 프리킥 골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그걸 잘 이해하는 동료들이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인생의 골의 넣을 수 있도록
저희가 공 밀어드리겠습니다.
개발 때려치우고 치킨집하고 싶다는 생각 안 들도록 개발자가 신나서 개발할 수 있는 환경 만들어드리겠습니다.
(...)
*저번화와 마찬가지로 위 공고는 현재 모집 중인 내용이 아닌 이전 채용공고의 복사-붙여넣기입니다. 이번에도 오해하시면 당신은 못 말리는 오해쟁이.
'북산' 이후로도 새 팀원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의 특이한 채용공고는 계속되었다. 위 공고는 북산에 이은 두 번째 채용공고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분은 이전화를 참고해주세요)
"농구 한번 했으니까 이번엔 축구로 해보자"는 단순한 생각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는데, 이때도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북산 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분들이 지원해주셔서 다른 업무에 차질이 생겼던 점을 감안해 이때부터는 로켓펀치 한 군데만 먼저 올렸다. 반응을 보고 지원이 뜸하다 싶으면 한 군데씩 추가하는 식이었다.
그간 총 4번의 팀원 모집이 있었고, 매 채용 시마다 눈에 띄는 컨셉을 고민했다. 생각보다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공고를 올려도 묵묵부답인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에 비하면 훨씬 생산적인 괴로움이었다.
그간 우리의 채용공고를 정리하면 이렇다.
1. 북산같은 스타트업에서 강백호같은 개발자 찾습니다
= 슬램덩크의 북산 같이 근성과 열정 넘치는 '드림팀'을 함께 만들어갈 팀원을 찾는다는 컨셉.
2. 한 골 넣고싶은 개발자의 공 밀어드립니다
= 축구에서 프리킥을 찰 때 동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주는 것처럼, 개발자의 '인생골'을 넣을 수 있게끔 신나게 개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는 컨셉.
3. 인턴이 말하는대로 다 되는 '개이득' 인턴모집 (부제: 감언이설로 뽑아놓고 손발 다 오그라드는 UCC 만들게 하는 대기업 인턴은 개손해)
= 정규직이 하기 싫은 단순노동을 맡길 사람이 아닌, 당장 포트폴리오 앞쪽에 실을 수 있는 가치있는 일을 함께 할 인턴을 찾는다는 컨셉.
4. 개발>>>>>>>>>>>>>넘사벽>>>>>>>>>>>>>치킨집
= "개발 접고 치킨집이나 차려야지"라는 말을 우리는 늘 이해하지 못했다. 개발은 재밌게 돈 버는 몇 안 되는 귀한 일중 하나이고, 개발자는 장래성있는 좋은 직업이라 늘 생각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기획해본 '치킨집이 아닌 개발이 땡기는, born to be 개발자'를 찾는다는 컨셉.
매번 이렇게 특이한 채용공고를 올리는 이유는 간단한다. 우리가 아직까지 쪼렙이기 때문이다. 가만있어도 수천 명씩 지원자가 몰리는 대기업이라면 이런 수고스러운 작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같은 쪼렙 스타트업에서 좋은 사람을 뽑으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 (돈 없고 백 없는 쪼렙 스타트업의 업무는 비단 채용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대부분 그러하다. 날로 먹을 수 있는 게 없다 흑흑)
데모데이 이메일 뉴스레터를 받아보면 한 달에 적어도 35곳 이상의 스타트업들이 개발자를 뽑는다. 평범한 공고로는 승산이 없다는 소리다. 개발자 구인공고의 홍수에서 떠밀려내려가지 않으려면 어쨌든 눈에 띄어야 한다. '채용도 마케팅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좋은 서비스를 만들고 있다면, 그걸 적극적으로 알려보시기 바란다. 위트도 좋고 진심도 좋다. 중요한 건 채용공고도 마케팅처럼 어쨌든 클릭해서 읽게 만드는 게 먼저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컨셉이 특이하면 일단 유리하다. 피가 빨간색인 마린 사진을 걸어놓고 "메딕을 찾고 있다. 당신만 있으면 우리는 다시 스팀팩 맞고 미친 듯이 일할 수 있다" 이런 개드립을 쳐서 이목을 끌더라도, 그 밑에 있는 대표님의 진심 어린 구인내용을 읽게 만든다면 조회수 한 자릿수의 평범한 채용공고보다는 나을 것이다.
띠링. 누군가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떤 회사에서 우리 채용공고를 복사 붙여넣기해서 쓰고 있다고 말했다. 뭐지 싶어 들어가봤더니 정말이었다. 오투잡이라는 회사였고, 복사 붙여넣기였다. 우리도 그 회사에 이력서를 넣어보았다.
이렇게 보내면 뭐라도 답변이 올줄 알았는데 아무런 답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저 회사는 저 공고를 아직까지도 쓰고 있다. 별 대단한 것도 아닌데 좀 쓰겠다고 메시지라도 하나 보내주셨으면 좋았을걸. 혹시 오투잡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욕쟁이할머니의 당락 여부를 알려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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