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eam Essay Aug 02. 2018

안녕

by Obstinate


그날은 그냥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곧 새해가 찾아온다는 사실, 새해가 오면 입대를 해야 한다는 예정된 미래,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 이것 말고 특별한 건 없었다. 말 그대로 여느 때와 다름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상투적일까? 그렇지만 정말 그날은 비 오는 거 빼고 평범했던걸.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것 빼고, 비가 너무 많이.   


5살 즈음에, 구리에서 울산으로 엄마와 외할머니 집으로 내려왔다. 구리에 있던 이모할머니와 다르게 외할머니는 예의범절에 엄격했다. 떼를 써도 통하지도 않는 것은 기본이었고 먹는 것. 특히 콩밥을 먹을 땐 콩과 밥을 가려서는 안 됐다. 또 어른이면 무조건 인사를 시키셨고, 토를 달거나 까불면 그날은 눈물콧물이 다 빠지는 날이었다.

    

할머니는 무서웠다. 그래서 뭐든 떼를 쓰면 사 주시고 나라면 뻑 죽는 이모할머니 집에 갔다가 다시 울산으로 돌아가는 날이면 세상이 무너져라 울어댔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에게 정이 쌓였다. 부모님 집에 갔다가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달밤에 울면서 할머니를 찾았던 적도 있었다. 대학교에 들어간 뒤 할머니에게 그런 적이 있었노라 하고 말하면 할머니는 그래? 하고 웃어넘기셨다.


아직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 아침에 나를 깨운 건 무엇을 넣고 돌리는 지 모르는 믹서기 소리였다. 믹서기 날을 몇 번씩 바꿀 정도로 오래된 것이라 돌아가기 시작하면 싱크대도 갈아버릴 소리를 냈다. 여름에 날 깨운 건 식혜 삶는 냄새였다. 어떻게 만드는 지 기억은 안나지만, 나무 막대기로 모시 삼베 헝겊에 끓인 밥을 넣어 주리를 틀면, 집 한가득 구리한 냄새가 퍼졌다. 그걸 몇 번 끓이고 밥풀을 넣어 냉장고에 넣으면 식혜가 됐다. 겨울엔 할아버지가 새벽에 일 나가시기 전 두텁게 옷 여미는 소리에 깼다. 부시시 일어나면 할아버지는 일어났냐며 픽하고 웃으셨다. 그러고 없는 정신머리로 잘 다녀오시라하면 빙그레 웃고 나가셨다. 봄엔 <아침마당> 소리에 깼다. 늦잠을 자고 비몽사몽 헤매면 할머닌 그만 자고 밥 먹으라고 제철 나물을 반찬으로 주셨다.    


아, 제철 나물 하니 봄, 여름엔 할머니와 함께 산책을 나가면 항상 조그만 과도와 비닐봉지를 챙겨가셨던 게 떠오른다. 늘상 가던 길가에 냉이, 쑥, 달래 그리고 이름 모를 먹을 수 있는 나물을 봉지 가득 채우셨다. 그걸로 냉이 된장국, 쑥떡, 달래무침을 해 먹었다.

    

학교에 입학한 뒤부터는 항상 수업이 끝나고 놀다가 <6시 내 고향>을 할 때쯤 집에 들어갔다. 할머니는 거실에 불도 켜지 않은 채 옆으로 누워서 배를 내놓고 티비를 보셨는데, 배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거나 입술을 대고 바람을 불어 소리를 냈다. 그러면 항상 살을 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럼 빼지 못할 거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내 고향>이 중반쯤 진행되면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먹을 저녁을 준비하셨다. 다 같이 먹는 저녁 상엔 뭐든 차 있었다. 고기 반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상은 항상 가득 차 있었다. 밥을 먹고 나면 할머니가 과일을 깎아주셨는데, 수박 먹는 날엔 할아버지랑 누가 더 많이 먹는지 대결하겠다고 허겁지겁 먹고 씨 뱉기 놀이를 하기도 했다.

    

밤 10시가 되면 할아버진 방에 들어가 주무시고 나랑 할머니는 거실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어떤 날엔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고, 어떤 날엔 커서 착한 사람이 돼야 한다느니 하는 할머니의 조그마한 소망을 듣다가 잠 들었다.    


대학에 들어가선 할머니의 기억도 듣게 되었다. 어릴 적 내가 혼나고 울다 지쳐쓰러지 듯 잠을 자면, 하루 종일 죄책감에 잠을 설치셨단 얘기, 더운 여름 모시 삼베 옷을 입고도 잠을 못 자면 옆에서 부채질을 해 주시며 괜히 부모 떠나 있는 모습에 마음이 쓰라리셨단 얘기 등등. 할머니와 함께 나도 모르던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할머니가 나이 드셨다는 게 슬펐다.    


잠깐 만나고 헤어지는 명절 날에 할머닌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리셨다. 부모가 이혼하고 친아비 얼굴 모르고 자란 게 자기 탓 같아 미안하고 그래도 번듯한 대학 가고 똑똑하게 자라서 고맙다고 우셨다. 매번 부담이었다.  마지막으로 우신 건 16년 9월 추석이었다.   


12월 26일. 그날은 신경도 안 썼는데 유독 비가 많이 내렸다. 야속하게 비가 내렸다. 미리 개워낼 울음통을 쏟은 거였나? 친구랑 통화하는 중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시간은 밤 9시였다. 이 시간에? -어~ -종민아. "아"에서 툭 떨어지는 말투는 연극 할 때 슬픈 걸 참는 중이란 걸로 배웠다. -어 왜?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무슨 소리야? 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화를 내버렸다. 그리고 울어버렸다. -종민아, 진정하고 내일 내려와.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나 지금 내려갈 거야.    


KTX가 끊겨서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3개월 동안 연락이 끊긴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종민아, 지금 내려가나? 그렇게 전화를 할 때는 안 받더니 할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연락이 왔다. 이 사람은 누가 죽어야 연락하나 보다.    


도착한 장례식장엔 멍한 바람과 무거운 숨소리만 가득했다. 그러고, 입관 전 할머니를 뵀다. 유난히 차갑고 편안해 보였다. 편안해 보이는 만큼 우리 마음의 무게는 무겁겠지. 어쩌면 장례식에서 모두가 울었던 건 무거운 무게에 짓눌려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던 게 아닐까?   


발인 전엔 영정을 들고 집에 찾아갔다. 할아버진 애처럼 우시며 이제 꽃신을 누가 신냐고 집어던지시고, 차 옆 자리엔 누가 앉냐고 소리 지르셨다. 베란다엔 소주가 한 박스였다. 모이면 술병에 쓰러질 정도로 먹는 우리 가족이었으니까, 곧 올 설날을 준비하신다고 사셨을 것이다. 된장찌개는 식어도 그 특유의 냄새가 향수를 자극했다. 세탁기보다 손빨래가 더 잘된다고 하시며 그날도 내 나이만한 양철 대야에 빨래를 넣어놓으셨다. 모든 건 제자리인데 할머니만 없었다. 집이 이렇게도 컸나, 아니 비었나.

   

발인이 끝나고 밀양에 수목장을 했다. 관리도 해주고 볕이 잘 들어서 좋다나. 왠지 죽어서 요양원에 보내는 느낌이라 꺼림칙했다. 할머니는 며칠 동안 꿈에서 계속 밥을 해주셨다. 난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할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다가 울어버렸다. 깨어 있는 동안에도 뜬금없이 생각이 나서 울었다.   


이젠 꿈속에서 뵐 때마다 운다. 항상 운다고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안녕, 명혜씨 내 오래된 세상. 저기선 주름살만 늘렸던 우리는 잊고 사셔. 혹시 그래도 보고 싶어서 오면 밥은 꼭 내가 하고 싶어.


안녕.

작가의 이전글 물고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