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아니 남편의 병 이름은
남편은 나와 입사 동기였다. 과장따리였지만 일을 특별히 잘했고, 그래서 대기업의 임원진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일했다. 크고 영향력 있는 TF를 혼자 이끌었다. 열심히 일하는 수준에 멈췄으면 좋았는데.. 너무 열심히 일했던 탓이였는지 산재처럼 없던 병을 얻었다.
처음에는 간수치였다. 건강검진에서 확인된 남편의 모든 간수치는 오염된 샘플처럼 어노말리를 찍었다. 40까지가 정상인데 900이 나왔다. 그리고 나서는 감정적으로 격해지면 말을 더듬었다. 아니 정확히는 술을 한두잔 마신 사람처럼 어눌해졌다. 단어를 빨리 선택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얼굴의 근육이 풀리는 것 같았다. 딱 술 마신 사람처럼 주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당시에는 간이 안 좋아서 금주를 하던 시기라서, 금단 증상인 줄 알고 오랫동안 정신과를 다녔다. 그러나 1년 후에서야 알게됐다. 금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병이였다는 것을.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숫자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내가 화를 내면 죄송하다고 꾸벅 사과하며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잤다. 꿈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감정적으로 뭔가 촉발되면 곧바로 말이 어눌해지는 일은 일주일에 한 두번은 꼭 있었고 이 이벤트는 자고 일어나야 괜찮아졌다. 이 증상을 녹화하고, ai가 지금처럼 훌륭하지 않던 약 4년 전의 내가 영어로 중국어로 일본어로 구글을 뒤져 찾아낸 남편의 병명은 기면증이였다.
기면증도 자폐처럼 스펙트럼이 있다. 그 스펙트럼 어딘가에 있는 유전병. 성인이 되서 발현할 확률은 0.1%도 안 되는. 그 중에서도 주간졸림을 동반하지 않는 기면증은 더더욱 드물었기 때문에 아무도 몰랐던 것이였다.
의사들도 과학자였기 때문에 가설을 가지고 접근한다. 내가 기면증이라는 가설을 내밀었을때 모두가 맞다고 했다. 하지만 기면증 가설을 내밀기 전, 남편의 모든 증상을 영상까지 들이밀며 설명해달라고 해도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내가 찾은 것이다.
남편 병의 정체를 알고 난 날의 나는 오히려 후련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 반대였다. 뜻을 가지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 한 명 한 명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목숨을 바쳤는데 결국 과로로 인한 산재를 얻은 것이다. 800이 넘는 간수치를 보고 건강검진센터에서 전화가 먼저 왔고 (처음 알았다. 검진 결과가 좋지 않으면 전화가 온다는 것은) 그에 따라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간수치를 내리기 위한 모든 일을 했다. 그 와중에 기면병은 그거대로 또 치료약을 먹고. 영양제 한 톨 안 먹고 살던 남편이 하루동안 먹는 약들이 점점 늘어갔다.
남편은 열심히 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병가를 썼고, 반 년 이상의 휴직을 했다. 휴직을 끝내고 돌아가서 다시 일하다가, 간수치는 잡혔지만 이제 평생 반려질병으로 데리고 살아야 하는 기면병을 등에 업고 두 번째 휴직을 신청했다. 다행히 12년간 열심히 다녀온 회사에서는 어떻게든 남편을 돕기 위해 휴직을 내 주었다. 두 번째 휴직이 끝나고 나서는 편하게 일할 수 있는 부서인, 남편이 10년 넘게 다닌 부서로 발령을 내 주었다.
목숨을 걸고 일하던 젊고 뜨거운 날들이 끝났다. 회사 바닥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보고하고 사우나에 가던, 무한할 것 같은 체력을 담보로 모든 것을 태우던 남편의 회사생활은 이제 산 뒤로 넘어간 해처럼 잔잔한 노을만 남기고 있었다. 이제 남편은 남은 삶동안 행복하고, 건강만 잘 유지하고, 적당히 벌면 되게 되었다.
아직 30대고 젊으니 크레파스 한 세트 활짝 열어 남은 삶을 어떤 색깔로 색칠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안에 새빨간 크레파스 하나는 이제 없는 걸로 해 두자.
정말 길고 긴 시간이였다.
결혼하기 싫었고,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싶었던 나는 남편보다 백 배는 더 혼란스러웠다.
어쩌다 보니 난 이제 평생 남편의 병과 같이 살아야 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내 나이에 아이를 갖던데.
나는 병이 있는 남편이 생겼다.
그래서 일에 더 몰입했다. 납득할 수 없는 BM을 가진 회사에서도 연봉을 많이 올려준다고 해서 잠깐 일했다. 그렇게 올린 연봉을 들고 더 큰 회사로, 더 큰 회사로 찾아갔다. 그렇게 지금 회사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