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민낯: 보이지 않는 프레임
“내일 당장 경영회의에 참석하라고요? 저는 그저께 밤에 스코틀랜드에 도착 했다고요.”
티제이는 아직 회의실 위치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주변 직원들의 얼굴도 파악하지 못한 처지인데, 루이스의 갑작스러운 경영회의 참석 요청에 당황했다. 루이스는 경영회의의 참석자와 안건 그리고 회의의 중요성에 대해 티제이에게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회의는 한 달에 한 번 이뤄지는데, 회의 시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걸린다고 했다.
“하루 종일이요?”
“분기별로 이루어지는 경영회의은 보통 1박 2일간 이어져요. CEO, CFO와 기획 임원을 포함한 현업의 주요 임원들이 참석합니다. 비즈니스 성과와 현황을 논의하는 것은 기본이고, 다양한 의사 결정도 즉석에서 이루어지곤 하죠.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주요 임원이라면,,,“
“임원 중에서도 일부만 참석하는 일종의 최고 경영회의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영회의에 참석하는 임원은경영위원회 멤버로 인정 받습니다. 경영위원회 멤버와 거기에 속하지 않은 임원 간에는 보이지 않는 구분이 존재합니다. 티제이는 일단 내일은 특별히 참석하게 되는 것이고요. 앞으로 정기적으로 참석할지는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
티제이는 눈앞의 실무 데이터와 경영위원회의 아젠다가 머리속에서 동시에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을 상상했다.
“티제이가 앞으로 경영회의에 정식 참석한다는 것은, 회사의 중대한 의사결정 과정에 걸맞는 기여를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와 더불어, 회사의 수익성 개선 활동을 직접 설계하고 추진하는 책임도 잊으면 안되겠죠.”
“제가 추진하는 활동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군요.”
티제이는 장점을 생각했다. ‘현업 담당자부터 중간 리더들까지 단계별로 설득하여 공감을 얻고, 최종 경영진의 의사 결정을 받기 위해 필요한 여러 단계를 패스트 트랙으로 진행하여 의사 결정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기대 만큼 성과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비난에 노출되는 속도 또한 빠를 것이다.’
“물론입니다. 티제이는 오히려 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해야 합니다. 경영회의에 참석하는 최고 경영회의 참석자라는 사실만으로도, 현업에서는 티제이의 의견에 더 동의하려 노력하고, 무시하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생기게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내일은, 제가 회의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면 될까요? 사실 뭘 준비 하려해도 할 게 없긴 합니다만,,,”
“내일은 아무런 준비 없이 참석해도 괜찮습니다. 회의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고, 이후에 티제이가 이 회의를 어떻게 활용하고 기여할지에 대해 논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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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클로이가 알려준 빅릭스라는 아이스크림 집에 둘렀다. 티제이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아이스크림이 특히 당겼다.
가게를 보자마자 이 곳은 로컬 그리고 아이스크림 노포라는 이미지가 바로 떠올랐다. 가게의 외관은 깨끗했지만 프랜차이즈에서 풍기는 지나치게 규격화 되지 않은 모습이 더욱 좋았다.
아이스크림의 맛은 환상이었다. 마치 아이스로 된 크림을 먹는 듯 했다. 아무래도 낙농업의 품질이 아이스크림의 맛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듯 했다. 매일 오게 될 까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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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제이는 회의실에 30분 일찍 도착해 있었다. 경영 회의에 보고자로서는 참석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회의 멤버로서 참석하는 긴장감은 달랐다. 아직 회의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날씨 탓인지 아니면 긴장 탓인지 문을 여는 손잡이가 차가웠다. 가벼운 심호흡을 하고 들어서자,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회의실은 널찍하게 펼쳐져 있었고, 출입문 반대편으로는 넓은 창 너머로 건물 앞의 잔디 광장이 펼쳐져 보였다. 차갑고습한 스코틀랜드의 겨울은 햇볕은 드물지만 비가 많이 와서 이 곳의 한랭지 잔디는 이맘때가 가장 초록색이 풍성하다. 낙엽이 떨어진 앙상한 나무 가지와 대비되는 풍성한 초록색의 잔디밭의 풍경은 이국적이었다.
회의실 안쪽엔 화상 회의를 위한 큰 모니터가 벽에 걸려 있고, 가운데엔 타원형의 회의 테이블이 이어져 있다. 의자에앉아 공간을 둘러보며, 어디에 앉는 것이 가장 무난할까 고민했다. 그저 조용히 숨죽여 있어야 할 신입생 같은 기분으로가운데는 피해야 했고, 너무 구석은 존재감을 없애 버릴 것 같았다. 적당히 중앙에서 벗어난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면 고정 좌석은 피했을 거야.’
잠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순간,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이번에 새로 오신 티제이겠죠? 저는 앤토니 입니다.”
티제이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치 아무도 없는 공간에 몰래 들어갔다가 들킨 느낌이었다.
“네,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음, 제가 늘 앉던 자리입니다. 물론, 그대로 앉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다른 데로 가면 되니까요.”
그의 말은 앉아도 된다는 말 같기도, 비켜달라는 말 같기도 했다.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살짝 어색한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 제가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티제이는 얼른 몸을 일으켜 테이블의 코너 쪽으로 이동했다.
“그 자리에 제가 오래 앉다 보니, 다른 자리는 조금 어색하더라고요.”
루이스가 이야기한 경영회의에 참석하는 임원과 그렇지 못한 임원 간의 보이지 않는 구분은, 회의 테이블의 좌석 위치에서도 분명히 존재했다.
회의 참석자들이 하나 둘 회의실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티제이를 대부분 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 더 이상 자리를 옮겨 달라는 사람은 없었다. 티제이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를 띄우려 애썼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어색했다. 한국에서 어색할 때마다 수없이 지어왔던 ‘저는 괜찮은 사람입니다’라는 표정이 이곳에선 왠지 잘 어울리지 않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때, 문 쪽에서 짧고 묵직한 인사 한마디가 공간을 울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낮고 굵직한 목소리는 그의 육중한 걸음걸이와 함께, 마치 해머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회의실의 분위기는 눈에 보일 듯 긴장으로 굳었다. 짧은 머리의 금발인지 갈색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 머리에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외모, 영국인 치고도 제법 큰 키에 약간 과체중 체형. 압도되는 분위기는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