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2/5)

숫자의 민낯: 보이지 않는 프레임

by 티제이

CPS의 CEO인 앤드류였다.


그가 천천히 들어서자, 모두가 일제히 "안녕하세요, 앤드류" 라거나 "굿 모닝, 앤드류"와 같은 짧은 인사를 건넸다. 임원들의 목소리는 살짝 경직되었고,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앤드류는 그런 임원들의 일일이 인사를 받아주면서, 천천히 회의 테이블의 정중앙에 앉았다.


그는 대답 없이 오늘 회의 자료를 들춰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회의 참석자들은 그의 고갯짓을 신호로 기다렸다는 듯이 회의를 시작했다. 프린트물은 폰트 크기만으로도 기가 질릴 만했다. 10포인트로 빼곡하게 인쇄된 거의 100쪽짜리 자료. 다행히, 주제마다 발표자의 이름이 적힌 간지가 끼워져 있어, 숨 고를 틈은 있었다.


회의 시작은 인사 임원의 오프닝으로 시작되었다.


“이번 달의 오프닝 테마는 ‘구성원의 육성’입니다.”


원래 오프닝을 매번 HR 임원이 하는 것인지, 이번 달의 테마가 ‘구성원의 육성’ 이어서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그는 구성원과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미리 준비한 우수 사례를 함께 소개했다. 몇몇 참석자들은 테마와 유사한 자신의 사례를 짧게 나눴고, 서로에 대한 격려도 이어졌다. 의도는 좋아 보였다. 이질감까지는 아니지만, 어딘가 자발적이기보다는, 짜 맞추어진 기획물의 결과라는 느낌이었다.


다음은 앤드류의 아젠다. 그가 최근 만난 고객사 동향과 주요 이슈를 공유하면서, 몇 가지 지시를 덧붙였다. 프린트물엔없는 내용이었지만, 모두 조용히 메모를 하거나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질문은 없었다. 티제이는 귀를 기울였지만,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앤드류의 지시는 명확했지만, 그 내용만으로 당장 떠오르는 액션은 불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회의는 소프트한 주제에서 점점 경영 안건으로 움직여가고 있었다.


"중동 시장에 새롭게 진출할 것인가에 대해, 전략 및 영업 조직에서 논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척된 내용이 있습니까?" 앤드류가 무표정하게 영업 임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영업 임원인 윌리엄은 순간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바뀌며 대답했다.


"이건 중요한 논의입니다. 당사의 라이센스를 기반으로 한 플랜트가 중동 지역에 널리 보급돼 있어 시장 진입은 무리가없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지난주에도 몇 건의 고객사와 미팅을 추진했고, 현재로선 곧 윤곽이 잡힐 것으로 보입니다."


티제이는 그의 답변에서 명확한 내용 파악이 어려웠기 때문에, 앤드류의 피드백이 궁금했다. 아니, 좀 더 분명하고 강한피드백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앤드류는 "쉽게 결론이 나지는 않겠죠. 특히 그 고객사는 가격이 중요한 요소일텐데…"라며 말을 닫고, 영업 임원에게믿고 맡긴다는 표정으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HR 평가 시스템 도입 건은요? 구성원 평가의 체계화와 효율성 제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앤드류가 HR 임원과 IT 임원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현재 평가 과정 전반에서 시스템 도입이 필요한 영역을 정리 중입니다. 내부 검토는 일부 진행됐고, 아마 다음 달 중에는 방향성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똑같은 흐름이 반복되었다. 아젠다 자체는 의미가 있어 보였지만, 실체적으로 무엇을 얼마나 진전했는지 파악할 수 없어 답답했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메모를 남기며 자신의 의견을 더하기도 했다. 티제이는 혹시라도 수익성 개선과 관련된 이야기를 놓치지 않을까 계속해서 집중했다.

앤드류는 반복된 피드백 몇 마디를 더 남기고는, 특별한 반응을 기다리지 않은 채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려 했다.


그 순간, 루이스가 잠시 앤드류와 눈인사를 하면서, 앤드류의 말을 미루었다.

“미리 공지해드린 바와 같이, 우리 회사의 수익성 개선 활동을 리드하기 위해 본사에서 티제이가 CPS에 파견되었습니다. 빠르게 회사 구조를 파악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합니다. 앞으로 매월 경영회의에도 참석할 예정입니다.”


티제이는 루이스의 시선을 느꼈다. 눈으로 인사를 하라는 무언의 신호. 생각할 틈은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이채 정리되기 전, 다행스럽게도 앤드류가 개입했다.


“우리 회사의 흑자 전환은 당사 뿐 아니라 모회사 재무 안정에도 핵심적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미 많은 개선 활동을 진행중이지만, 티제이는 그것을 더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또 새로운 접근으로 바로볼 겁니다.물론 단기간에 결과를 내는 것은쉽지 않겠지만, 새로운 시각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티제이가 혼자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동의하고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결국 협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티제이에 대한 소개는 조직 전체를 향한 당부도 빼놓지 않은 것을 제외 한다면, 평범했다.

하지만, 티제이는 스스로 압박감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가, 모두가 자신에게 시선을 옮긴 걸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테이블 전체를 돌아보며 인사말을 시작했다. “흑자 전환이라는 중요한 목표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목표 달성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러분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앤드류의 의견에깊이 공감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는 교과서적이었고, 반응도 거기에 맞춰서 예상 가능한 수준이었다. 옆자리에서는 자료를 넘기거나 간단히 머리를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티제이가 말을 마치자 얇은 박수가 들렸다.

티제이는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무대 위로 홀로 올라선 것 같은 작은 흥분과 적당한 긴장감 같은 것에 익숙해지기시작했다. 이제 그가 기다리던 본격적인 재무 성과 리뷰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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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수립된 재무 목표와 실제 실적의 차이를 점검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티제이는 자신에게 배포된 프린트 자료를빠르게 훑으며 더욱 집중도를 높혔다. 아직 회계연도는 시작된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았고, 본격적인 실행도 이제 막 걸음을 떼는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이번달의 실적은 이미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월 목표를 하회하고 있었다.


CFO인 그렉이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작년과 비교해 올해는 연초부터 목표 대비 차이가 빠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작년 말 적자 폭을 줄이기 위해, 올해 실적을 작년에 미리 당겨서 선 반영한 부분이 있고, 비용 집행도 일부 올해로 미룬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톤은 차분했고, 전체적인 맥락은 이해가 되었고, 논리적인 설명처럼 들렸지만, 티제이는 그 최종 숫자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무엇이문제인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은 여전히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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