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민낯: 보이지 않는 프레임
이익률이 낮다는 말은 있었지만, 어느 부문에서, 어떤 비용 구조 때문인지에 대한 분석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익숙한흐름이라는 듯 참석자들 대부분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렉 역시 이 상황이 익숙한 듯 이어서 말했다.
“올해는 흑자 전환의 첫 해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매출은 전년 대비 30% 상향 설정했고, 순이익은 상징적으로 1파운드 흑자를 목표로 했습니다.”
순이익 1파운드. 상징적인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순이익은 전년 대비 40% 가까이 수익률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CFO는 이 목표가 전사적으로 중요한 도전과제라고 강조했지만, 구체적인 실행 로드맵은 제시되지 않았다. 이후로는 목표 대비 차이가 큰 프로젝트들을 하나씩 언급했다. 그러나 프로젝트 이름과 숫자만 나열되었고, 그 원인이나 개선 방안에대한 논의는 없었다 CFO는 톤을 높여 이야기 했지만, 회의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공격적으로 영업이익 목표를 설정해 놓고, 정작 그 이익의 실현 여부가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프로젝트 실적에 대해서는 이렇게 형식적으로 넘긴다고?’
티제이는 페이지를 넘기며, 무의미한 줄 알면서도 얼마나 많은 이익을 개선해야 하는지 계산을 해보고 있었다. 재무 자료에는 숫자는 있었지만, 각 수치가 어떤 가정에서 나왔고, 무엇을 바꾸면 개선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실적과 계획의 차이는 제시되었지만, 왜 그 차이가 났는지, 그리고 어떤 대응을 준비 중인지에 대한 연결 고리는 빠져 있었다.
’이익률은 낮고, 수치는 빠지고 있는데… 왜 아무도 그 수치에 대한 원인이나 만회 계획을 이야기하지는 않는 걸까.‘
재무와 현장은 숫자는 서로 공유하고 있는 듯 했지만, 서로 연결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익 실현에 대한 책임은 현장으로 떠넘겨지고, 재무는 목표를 제시할 뿐 목표 달성을 위한 디테일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회의는 예정된 재무 리뷰를 끝으로 잠시 휴식에 들어갔다. 누군가 문을 열고 나가자 복도에서 커피 향이 문틈 사이로 같이 들어왔다.
티제이는 손에 쥔 자료를 덮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회의실 옆 작은 방에는 케이터링 업체에서 준비한 차와 커피, 쿠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커다란 보온병 두 개에 각각 커피와 티가 담겨 있고, 그 옆에는 자기 찻잔과 받침 접시가 깔끔하게 쌓여 있었다. 티제이는 찻잔을 하나 집어 들고,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선택을 살폈다. 차를 그대로 마시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우유를 타서 밀크티로 만들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는 이들도 대부분 우유를 타서 카페오레처럼 마셨다. 티제이도 그들처럼 티에 우유를 붓고 조용히한 모금 마셨다.
"티제이, 이 쿠키도 한번 드셔 보세요." 익숙한 목소리로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이건 숏브레드라고 합니다. 스코틀랜드 전통 쿠키죠. 밀가루는 거의 없고, 버터랑 설탕으로만 만들다시피 했어요. 맛이없을 수가 없습니다. 살찌는 건 별개고요."
티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쿠키를 집어 들었다. 씁쓸한 홍차, 부드러운 우유 그리고 고소한 버터의 쿠키는 서로상반된 맛이 충돌하면서도 연결되었다. 회의 시간내내 숫자와 전략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제각각 분리되어 괴로웠던 느낌이 즉각적으로 상쇄되는 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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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사람들은 다시 회의실로 돌아갔다. 일부는 예상보다 늦게 복귀했고, 오전의 두 번째 세션은 당초 계획보다 10여 분 늦게 시작되었다.
2부는 수주 목표 프로젝트의 입찰 진행 상황으로 시작되었다. 수주가 확정되면 회사의 유동성 문제가 단기간 내 상당부분 해소될 수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고, 발주처 동향과 경쟁사 움직임에 대한 논의도 비교적 디테일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티제이가 주목한 건 따로 있었다. 수치가 없었다. 목표도 없었고,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자원의 규모나 역량의 차이도 언급되지 않았다. 전략과 액션 플랜이 흐릿했다.
앤드류의 마무리 코멘트 역시 전형적인 언어로 구성된 ‘다음 달에 확인해보자’였다. 그 뒤로는 기획, 품질, 안전, 법무 등각 지원 부서의 업데이트가 이어졌다. 형식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중요한 안건은 이미 끝났고, 이 시간은 기록을 위한 시간처럼 흘러갔다.
티제이는 손에 쥔 재무 계획 자료를 다시 펼쳤다. 올해 사업 목표는 매출 20% 이상 증가, 원가율 10%포인트 개선, 간접비 10% 절감. 수치로 보면 간단했지만, 실제로는 전년 대비 30% 이상의 수익성 향상이 요구되는 수준이다. 티제이는 나머지 안건을 따라가려 애썼지만, 수익성 목표 달성 생각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회의는 끝났고, 사람들은 자리에서 하나 둘일어났다.
앤드류와 루이스는 잠깐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티제이는 그들이 끝나기를 기다려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루이스, 올해 재무 목표는 수치만 보면 정말 공격적입니다. 직접비 뿐 아니라 경비까지 10%를 줄이겠다는 게… 인상적이더군요.”
루이스는 짧게 웃었다. “그렇죠. 눈에 가장 잘 띄는 비용이다 보니, 손대기도 쉬워 보이죠. 그런데 그만큼 저항도 만만치않습니다. 각 조직의 리더들에게는 실질적으로 자신들의 활동 반경을 제약한다고 느껴지거든요.”
“그렇다면 실제 절감 계획은 아직... 수립된 건 아니네요?” 티제이는 한국에서 루이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뭔가 준비되고 있는 듯한 그의 말과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공감대는 있죠. 목표도 부여된 상태고요. 하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루이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고개를 들고말했다.
“경비 절감은 제가 정리 중이고요. 직접비는 아직 현업 쪽에서 움직임은 없습니다. 다음 경영회의 전까지는 각 리더들과아이디어를 모아볼 생각입니다. 오늘 회의 끝나고 앤드류와 논의했던 것도 그 부분이었어요.” 말은 점점 간결해졌다.
루이스는 피로한 눈빛으로 티제이를 바라보며, 마치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 까지라는 느낌으로, 조용히 다음 단계를 제안했다.
“CFO를 직접 만나보는 게 좋겠습니다. 어차피 재무 개선 목표는 그가 전체를 총괄하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도 도움 받을일이 많을 겁니다. 제가 미리 말해놓겠습니다.” 루이스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들었다.
“사실, CFO인 그렉과는 요즘에도 자주 이야기합니다. 최근 경비 절감 목표를 설정할 때도, 우리가 직접비 쪽에 손을 대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고민을 나눈 적이 있어요. 그렉은 과거 프로젝트별 수익성 구조까지 들여다보는 방식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서, 현업에서 뭐라고 하면 그쪽 말 대로 숫자를 수정해주는 정도였죠. 하지만 지금은 좀 더 근본적인 구조 분석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더군요.”
루이스는 이미 어느 정도 조직과 CFO 조직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도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티제이를 그 대안 후보 중 하나로 고려해 보기로 했다. ‘옵션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으니까…’ 루이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피곤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그는, 매월 반복되는 경영회의를 ‘일단 넘기고 보자는 방식’으로 버텨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