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년 1개월

겨울동화 차회를 연 어느 날

by bobae

김하나 작가의 육아일기이기도 한, 이옥선 작가님의 <빅토리 노트>에는 육아일기의 마지막 시점이 5세이다. 이제 5세가 된 김하나 작가에게 이옥선 작가님은 덤덤하지만 예민한 존중이 담긴 배경을 적으며 이제 육아일기는 끝이라고 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좋은 글이라면 그 부분을 가지고 와야겠지만, 이 글은 그렇지는 못하다.

어쨌든 육아일기는 언제까지 써도 괜찮은 걸까? 육아란 무엇일까? 그저 몸을 키우는 일이라면 그 기록은 이옥선 작가님처럼 5세에 멈춰야 하는 게 아닐까. 혼자 걸어보기, 혼자 옷 입어보기 또는 혼자 심부름하기 같은 것들은 그 나이쯤이면 각각의 처음을 지나, 더 이상 일기에 적을 만큼 뜻깊은 것들이 남지 않으니.

"사람의 아동기는 나머지 동물들과 아주 다르다. 아이의 뇌는 5세 무렵에 완전한 크기의 90%까지 자라지만, 그러고 나서 제대로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렇게 성장이 느린 아동기는 문화 학습을 위한 적응 기간이다. 아동기는 자신의 문화에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학습하는 도제 기간이다."
조너선하이트, 『불안세대』 p105


그치만 어린이에 대한 자랑이라면 기준이 다르지 않을까? 우리 애가 반에서 몇 등을 했는데! 같이 세속적이지만 지극히 원초적인 자랑 같은 것은 도통 누구에게든 세련되고, 맵씨 있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육아일기로 적으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근질거리는 입도 막을 수 있고, 또 언젠가 좌절하고 있을 본인이 읽기에도 유용할 테니 자랑은 써도 되는 게 아닐까?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고, 아이는 이제 꽉 찬 8년을 살았다. 사실 처음에는 아이가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걷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체온조절도 못하는 아기를 데리고 나서는 일은 지극히 온전한 약자가 되는 방법인데, 10cm의 굽을 신고 색색의 옷을 입고 다니는 소위 '아가씨'로 길가를 호가호위하다가 떨어지는 일은 워낙 낙차가 커서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8년 정도 지나며 제 주제를 알게 되고, 아이는 말도 하고 필요에 따라 귀마개를 나에게 찾아 척척 쓰고 이 겨울의 눈밭 속을 뛰어놀 줄 알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자랑은 아니다. 아주 많은 자랑거리들이 있었다. 그것들에 비하면 이것은 정말 자랑이 아니다.

예를 들면, 지난 3월에는 아직 봄이 오기 이른 날씨인데 포근한 날씨에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등교하던 발걸음은 멈추지도 않고 아주 태연하게 "영원한 계절은 없으니까요"라고 말했다. 내가 너무 멋있어서 폴짝거리고, 기필코 일기를 쓰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어린이가 으스대지도 않고, 우리가 같이 읽은 책의 나온 구절이라고 일러줬다. 김지안, 튤립호텔』창비 (2022)

이 것 말고도 셀 수 없이 많지만, 내가 이 사회적 지위에 익숙해지고 어린이가 사회문화를 배워가는 사이 어린이에 대한 자랑은 그저 내 주변 사람들의 애꿎은 여가시간을 빼앗아 가는 데 쓰이고 말았다. 나는 종종 어린이가 얼마나 멋졌는지, '너는 정말 멋진 어린이야'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 사람들의 여가시간을 빼앗아 쓴 잘못 때문인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고,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아서 결국 그냥 무턱 되고 우리 어린이가 얼마나 멋진지만 열댓 번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래서, 아직 어린이는 문화 학습의 단계로 크는 중이니까, 그리고 언젠가 네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냐면 같은 걸 이야기할 때 충분한 단서가 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더 이상 애꿎은 주변인들의 여가시간을 좀먹지 않기 위해 육아일기를 당분간은 다시 쓰기로 해본다.

만 10세가 되면 멈춰야 할지도 모르지만, 나의 아기 '봄동' 이야기를 다시 쓴다.

IMG_8906.jpg 어린이랑 동네에 자주 가는 찻집에서 무려 '겨울동화 차회'를 진행했다.

24년의 가장 큰 변화는 차를 마시기 시작한 일이다. 늦은 저녁 집 근처를 배회하다가 거짓말처럼 들어가 앉았다가, 나는 덥석 이십육만 원이나 하는 임창대수차를 사가지고 나오고 말았다. 반년이 넘은 지금 이제는 매일매일 차를 내려 마시는 사람이 되었다. 내 차는 '임창대수차' 하나밖에 없고, 차를 내리는 사람도 결국 나뿐이니 편하게 차를 마시고 싶은 나는 차회와 시간만 맞으면 후다닥 뛰어가서 내려주는 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오는 차고래가 되고, 옆에서 '나도 한잔만 내려줄래?' 하던 어린이는 어느 날 찻집에서 50년 된 어르신 보이차도 꿀떡꿀떡 잘 마셔내는 장한 어린이 차고래가 되고 말았다.

동화책차회는 사실 오롯이 내 욕심이었다. 이제는 어린이 손이 자주가지 않지만, 너무 좋은 동화책을 혼자만 보는 일이 아쉬워, 책 이야기를 대놓고 하고 싶어서 차담비님께 제안을 드렸는데 흔쾌히 차회를 열어주셨다. 골라놓은 책도 있으니 그저 가서 읽으면 되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7분이나 모집되고 나니,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우리 큰일 났어! 7명이나 신청했데!"

이럴 때는 누구든 옆에 있는 사람을 의지하거나, 혹은 옆의 사람이 의지하게 만들면 이상하게 조급한 마음이 가라앉는다. 아이디어도 제안도 내가 해놓고는 어린이를 슬며시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어 내 옆자리 잡아 앉혔다. 차회는 토요일 10시 반이고, 금요일 저녁을 먹으면서부터 이상하게 둘 다 마음이 든든해졌다. 우리는 저녁을 든든히 먹고 차회를 잘 준비할 거야!

IMG_9017.jpg 치열한 회의의 흔적, 회의록이자 구성안이자 우리의 대본


우선 내가 왜 이 책들을 선택했는지 이야기했다. 존 클라센의 그림은 다양한 무채색이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각도의 빛과 어둠이 화면에서 일렁인다. 특히 준비한 네 권 중 한 권인 동그라미는 그 이상한 공포감 이 스산함과 엮어져, 나도 모르게 괜히 딴청을 피우며 봄 쪽으로 고개를 빼내게 된다.'언제 따뜻한 봄이 오나.. ' 같은 기분이랄까. 물론 거대하게 무섭지는 않고, 조금 소소하고 귀엽게 무섭다. 마치 핼러윈 같달까.

어린이는 사실 이렇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지는 않는다. 특히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리고,..라고 아무 생각 없이 의미 없는 접속사를 이야기하는데 어린이가 의미 있게 외쳤다.

"책 표지를 보고 어떤 내용인지 상상해 보는 시간을 같자."
"오! 구성을 짜자! 우리 구성을 짜자!"

어린이의 다양한 말을 구성으로 다시 짜 내렸다. 책을 읽기 전에 충분히 예열하는 시간에 대해서,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 독자들이 각자의 시간으로 갈 수 있는 때가 언제가 좋을지 몇 분이나 걸리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 내용에 대한 OX 퀴즈 따위를 만들어냈다. 같이 회의하는 순간에 나는 어린이에게 부모보다는 친구가 된 것 같았다. 물론 어린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의 어린이였지만, 나는 티 내지 않고 친구 역할을 해냈다.

내가 없을 때 어린이의 생활을 항상 궁금해한다. 학교에서는 어떤 걸 배우는 걸까? 하고 가끔은 질문을 하지 않으면서 질문을 하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 뭐 배웠어?'를 묻는 방법 말고 이런 것이 있구나.. 나는 신나 하면서도 마음 한 편에 어려운 육아법을 하나 또 배우는구나 한다.

매번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어떤 걸 배우는지 궁금했는데 결국 답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어린이랑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영역으로 나가는 길인 걸까.

IMG_8915.jpg 차회에 오신 단골손님은 항상 그날의 차우를 데리고 오는데, 오늘 온 차우는 소중한 인형을 꼭 안고는, 안겨서 책을 보는 작은 고양이였다.

다정한 사람들은 우리의 낭독 시간을 충분히 기다리고, 지켜봐 주었다. 천천히 모두 우리가 가지고 온 책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 겨울동화 차회 책 목록 : 맥바넷과 존 클라센>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734908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734907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734909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809382

준비한 책 말고 2권은 내가 가지고 간 책이 모두 너무 어둡다며, 어린이가 마지막에 포근하게 덥어주자고 준비한 책이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0484704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11772


어린이는 너무 멋지게 책을 읽었고, 지나치게 으스되지 않고 기꺼이 칭찬을 받았다. 어쩜 그렇게 연기력이 좋냐는 이야기에 학교에서 연극을 배운 게 도움이 되었다고 겸손하지 않게 겸손한 응수를 했고, 이런 기획이나 진행을 어디서 해봤냐는 질문에는 두어 번 해봤다는 부풀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으스대지 않고, 점잖게 느껴졌다. 아마, 내가 이렇게 책을 읽는다고, 우리 집에 이런 책들이 정말 많다고 그리고 우리 어린이가 이렇게 멋지다고 으스대고 싶었던 것과는 달리 그저 그 시간을 온전히 그 시간으로만 받아들이고 대해서 그런가 하고 제법 과한 해석을 내본다.

걱정했던 차회는 안전하게 마무리되었다. 찻집 단골 또는 처음 오는 손님분들인데, 무례하지 않은 분들이 참석해 주신 덕에 어린이는 기대 이상의 환대를 받았다. (아, 그러고 보니 OX퀴즈의 상으로 간식을, 무려 마술쇼로 전달했다는 것을 다 이야기 못했네 격한 박수와 리액션에 다시 한번 감사를 보내본다. )


아이를 키우며 내내 욕심을 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누구보다 욕심을 내는 나를 볼 때가 많다. 이런 기획이 어린이의 생애 또 하나의 역사가 되어 남았으면 하는 과한 바람을 부린다. 지금 자라는 어린이의 시간 속에 이 기획이 대단한 도전과 성취로 남아서 그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든 그 때 이 순간이 어떤 각도로든 밑천이 되었으면 하고. 대단하지 않을수도 있고... 혹은 나중에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수도 있는데 말이다...

나의 아기 봄동, 지금처럼 지금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커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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