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척은 지겨워』은 지겨워를 읽고,
김한민 작가는 나의 오랜 이상형이다. 자고로 이상적인 존재란 현실감이 없어야 하고, 작가란 그에 부합하기도 하고 라며 길게 사족을 늘어놓을까 싶지만, 이유는 없다. 덕분에 나는 그래픽노블graphic novel이라는 세계를 알게 되었고, 비건에 대해 그리고 동물권과 생태환경에 대해 작가님의 컨텐츠를 징검다리 삼아 찾아들었다.
김한민 작가님 작품은 장르에 따라 결이 다르다. 아마도 가장 많은 독자를 만났을 『아무튼 비건』은 건조하고, 객관적이다. 현재 일어나는 사실들이 피를 뚝뚝 묻히고 있어도, 그걸 그대로 보여준다. 마치 논문을 읽듯이 한걸음 한걸음 어린사체와 그걸 먹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 나가고 나면, 그 얇은 책이 단지 한 권의 책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래픽노블은 전혀 다르다. 종이를 넘기고 있지만 큰 고함소리나,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화가 나있고, 무언가를 휘두르는 것 같다. 『비수기의 전문가들』, 『카페림보』는 다들 지나치게 화가 나있거나 낙담해 있었던 것도 같다. 높낮이 격차가 큰 도시 뒷골목의 비포장 도로를 걷는 것 같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26235
p230
이젠 뭔가 못 이룰까 봐 지레 겁부터 먹지는 않으려고 한다.
“결과는 아무것도 아니다, 운동이 전부다”✓라는 말을 전적으로 믿어서는 아니다. 결과도 중요하지.
다만 이 길 말고는 진심으로 겪어 볼 가치가 느껴지는 과정이 없다.
『착한 척은 지겨워』는 2021년 12월이 끝날쯤 나온 5년 만의 그래픽노블 신간이었다. 카페림보보다는 화는 누그러든 '나'라는 존재가 이야기를 하고 있고, 모든 화를 내지만 누구보다 단호한 '마야'가 나오는 이 책을 나는 자꾸 길을 헤매는 것처럼 읽었다. 21년생이지만, 12월생인 이 책은 22년 생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쯤의 나는 새로운 회사로 자리를 옮겨서 새로운 자리에 적응할 때라 책은 자꾸 겉돌았다. 지금 필요한 실용서들이나 등을 두드려줄 책으로 가게 되지, 자꾸 화를 버럭버럭 내는 책으로는 앉은자리가 잘 돌아앉지 않았다.
그리고 2025년 11월 회사생활을 종료했다. 인스타그램에 퇴사에 관해 올린 나의 첫 문장은 '내가 정한 마지막 출근일이 이제 3주 앞으로 다가왔다.'이다. 운이 좋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았고, 좋은 사람들을 자주 알게 되었으며, 하는 일이 새로운 세상과 빈번히 만나 탐험가처럼 살고 싶은 호기로운 마음도 잘 다독이면서 일할 수 있었다.
'살면서 일을 멈추는 것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런 날이 왔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회사라는 큰 체제를 떠나는 때이다. 나도 여러 가지 이유로, 거대한 체제 안에서 나왔고, 요즘은 입버릇처럼 '곱게 자란 회사원'은 너무 고달퍼서 자꾸 무릎이 꼬끄라지는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나는 오롯이 내가 원해서, (무려 회사에서 계속 다니길 원했다는 것이 이제사 이렇게 위로가 될 줄은 영영 몰랐다. 그냥 다시 와요라고 말하며 같이 낄낄 거리거나, 씁쓸하게 웃던 실장님, 부사장님 얼굴이 보험처럼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좋다니) 그만두었다는 것이 매번 큰 위안이 된다.
그리고 덕분에 이제서야 김한민 작가의 『착한 척은 지겨워』를 읽었다. 퇴사하면서 혼자 이야기하지 않기 위해 시작한 모임에서 사람들과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징검다리로 쓰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에게도 이 책을 제대로 걷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냥 지나가는 징검다리가 아니라. 그 안에서 충분히 있고 싶었다.
『착한 척은 지겨워』는 15년 차 NGO활동가 '나'의 퇴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유학준비생인척 하며 처음에는 자유를 그다음에는 다가오는 그저 그런 감정을 걷던 한 달쯤에 '마야'에게 기후정당'불가능한당'을 창당하자는 제안을 받고 같이 6개월을 일하며 창당을 준비한다. '마야'가 읽으라는 <우쭈쭈의 심리학>을 읽고 '쓰레기가슴'절제술을 한 '나'는 이전과 다르게 마야의 이야기가 잘되고,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결국 창당은 무산된(것처럼 보인)다.
겁먹지 않으려 한다로 시작하는 저 문장은 마지막의 '나'의 독백 중 하나이고, “결과는 아무것도 아니다, 운동이 전부다”✓라고 인용된 문장은 수정주의 (Revisionism)의 창시자이자 사회민주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 말이라고 한다.
나와 함께 이 낯선 책을 탐험할 사람들을 위해 책을 읽고 다시 또 읽으며 여러개의 질문을 정리했다."‘내’가 세상을 위해서 하고 있는 일이 있나요?" 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우리는 우쭈쭈의 사회학을 통과하며 자본주의를 낯설게 보고, 동물들을 먹는 세계를 새롭게 걸었다.
나처럼 이상형의 책이라 빠진게 아닌, 낯선 이야기를 탐하는 사람들과의 조심스러운 탐험은 책을 더 음미하게 해주었다.
모임에서의 마지막 대화주제는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사람이 먼저 변해야 할까요? 아니면 시스템이 먼저일까요?"로 귀결되었다. 모두들 자신만의 결론으로 걸어가고 있는 와중에 문득, 그 모임안에 있으면서도 나는 혼자 있는 기분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는 데 나를 가장 크게 추동한 문장은 책 속의 '나'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이 길 말고는 진심으로 겪어 볼 가치가 느껴지는 과정이 없다."
일을 하지 않은지 4개월이 지났다. 정확히는 월급생활자의 일상을 멈춘 지 4개월이 되었다.
마지막 1년은 원하는 일을 원하는 만큼의 권한을 받고 마음껏 했다. 분명히 핵심부서였고, 핵심적인 보고들과 의사결정 사이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일이 가치 없게 느껴지는 날들이 잦아졌다. 회사에서는 명확히 중요한 일이지만, 그래서 새벽 2시고, 새벽 6시고 사무실에 있는 날들이 잦아졌다. 근무시간도 물론 잘못되었지만, 그걸 차치하고 잘못되었다는 기분을 버릴 수 없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맞물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이유로 퇴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인류세의 정의에 대해 이제사 정확하게 할 수 있게 것도 퇴사한 뒤의 일이다. 어린이와 매일 아침식사를 같이 하게 된 것도, 매일밤 책을 읽어줄 수 있게 된 것도 퇴사한 다음이다. 회사에서 했던 일들이 이보다 가치 없다거나, 이 일들이 회사에서 했던 일을 무가치게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등가를 명확히 할 수 없고, 부등호를 만들 수 없는 것들이다.
내 삶의 중요한 것들이 모양을 달리하고, 현대라는 이 괴상한 지금이 몸을 틀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고, 나라는 물리적인 조건도 달라지고 있었다. 돈을 버는 일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회사 안에서도 이 엄청난 변화를 인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다만 아직 명확하게 잡히지 않고 답을 하지 못한 것이 말하고 있었다. "다만, 이 길 말고는 진심으로 겪어 볼 가치가 느껴지는 과정이 없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1958)》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하며, 특히 노동(labor)은 생존을 위한 소비적 활동, 작업(work)은 불멸성을 지닌 인위적 세계를 구축하는 제작 활동으로 정의하여 둘을 엄격히 구분했습니다
아렌트는 노동과 작업을 넘어,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정치적 행위(Action)야말로 인간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고,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하게 하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보았습니다
『착한 척은 지겨워』는 촘촘한 사상의 각주로 지어진 견고한 성과 같다. 그 많은 각주 중 한나 아렌트의 문장을 발견하고 가늠한 내 상태값은 일을(laber or work) 멈춘 게 아니었다. 나는 쓸고 닦고, 먹이며 일 labor 했고, 미뤄두었던 그림작업 work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들이 나를
현재 나의 상태값의 나침반은 결국(?)은 ‘행위’Action을 가리키게 되는 것일까.
충무로의 공유서재 공간을 마련했다.
보증금을 지불하고, 가구를 사서 넣고, 조명을 사서 넣었다. 전구를 잘못 사서, 전구가게에 두 번 다녀왔다. 유어마인드 이사 때, 무려 30분 먼저 도착해서 줄을 서서 부적 같은 마음으로 겨우 구매한 책장은 결국 어울리지 않아서, 사용하지 않고 창고에 넣어두었다. 지난주는 두성종이에 가서 종이를 잔뜩 사 와서 맘에 드는 종이를 골라다 문장을 출력해 공간에 비치했다.
끊임없이 소비하고 있지만, 나는 소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다. 자본주의가 원하는 어떤 톱니바퀴에도 끼어 있지 않다. 새삼 “결과는 아무것도 아니다, 운동이 전부다”라는 문장을 다시 끌어안는다.
나의 ‘노동(labor)’과 ‘작업(work)’이 방향을 틀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와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작되었다. 더 이상 전년 대비 성장하는 그래프를 그리는 사업계획서를 쓰지 않고, 프라이싱 작업을 하지 않는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그의 톱니바퀴 사이에 껴있지 않다. 그때는 당연한 것들의 요구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톱니바퀴에서 빠져나와서 저지르는 이 일련의 행위, 운동들은 어떤 톱니바퀴에서 만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