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나씨의 전시를 보아온 시간들
한남동에는 어울리지 않는 당구장 간판이 있었다.
지금만큼 세련되기 이전 한남동은 조금 휑한 구석이 있어, 덕분에 선명한 원색의 당구장 표지판은 더 도드라져 보였다. 어색함을 이겨내고 계단을 내려가면 무려 갤러리가 있다. 미술관이나 예술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 같은 문턱을 한껏 내려놓은 같아 2015년의 그때의 '구슬모아'를 좋아했다.
대림미술관이 운영하는 이 갤러리에서 여러 전시를 했고, 나는 되도록 다 보았던 것 같은데, 망을 걸러서 하나의 커다란 구슬만 잡은 사람처럼 단 하나의 전시만 오래 남았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아니 어느 누구라고 말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단순한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는 전시였다. 무나씨라는 작가의 개인전이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인지, 워크숍인지를 가졌던 것 같고, 무나씨의 그림 위의 색을 덧대거나 그림선을 덧대는 작업이었는데 그림만큼 담백하게 칭찬해 줬던 기억이 있다. '작가 시네요'라고 말씀 주셨는지, '작가만큼 자신의 색이 분명하네요'라고 말씀 주셨는지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난 작가에 준하는 눈이 있다고 나 혼자 믿어버릴 법한 칭찬이었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그냥 와 좋네요. 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볼 때 그의 생애를 아는 것이 작품을 즐기는 방법의 하나라는 이야기를 한다.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보는 즐거움을 그것과 비견한다며, 내가 그의 작품과 생의 연결고리를 같은 시간대 안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2024년, 그의 어느새 14번째 개인전인 찰랑을 두어 시간 앉아서 꼼꼼히 즐기다, 문득 나는 작가의 삶을 SNS라는 작가가 정리한 개인의 역사적인 사건물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구나 싶어졌다. 이전 작품에서는 여러 명이 서로를 얽고 있어도, 그것이 '나'가 아닌 존재라고 느끼기 어려웠는데, 찰랑에서 두 손을 마주 잡고 있거나 손을 잡아주는 존재들은 '나'가 아닌 '너'였다. 작가님의 결혼 소식이 떠올라 작품에 엉겼다.
'기분의 강'의 눈물을 떨어트린 사람 어깨의 다정하게 손이 올라가 있다. 떨어진 물방울의 파동이 아직 빙그레 도는 걸 보니, 눈물은 방금 떨어졌고 손은 원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다급함 없이 안정적인 걸 보면 아마도 다정한 손길이 눈물을 흘리게 해줬나 보다 싶었다. 어쩌면 다정한 손길이 있어 기분의 강이 만들어진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만들어진 기분의 강에서 우리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균형의 연작들도, 손을 맞잡거나 혹은 뒤에서 안아 올려주는 손길이 '나'가 아니라 '너'인 것이 느껴졌다.
'찰랑'은 움직이는 순간이다. '철푸덕'이라거나 '똑똑' 같은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나, 바닥이랑 부딪힌 물이 내는 소리니까. '찰랑'은 그것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현재가 아닐까.
공간에 음향작업이 들어가거나, 영상작업이 더해진 걸 보면서 작가님이 얼마나 멀리 와있는지 새삼스러웠다.
그리고 2025년 겨울에 다시 또 작가님의 개인전에 서있었다.
이전보다 전시관 규모가 커졌다. 입구 앞에서 한참 이상한 적요가 일었다. 나는 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프랑스에 간 작가님, 프랑스에서 전시하는 작가님, 배경에 새로운 공간적인 요소가 들어서던 작품들,.. 내가 아는 무나씨 작가의 시간들이 문득 점점이 지나갔다. 나는 그가 아님에도 조용히, 꾸준히 작품을 따라다니며 마음을 보낸 관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적요는 무엇이었을까.
'나'를 들여다 보는일, 내 안의 감정의 동요를 들여다보는 그의 작업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가 하는 말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나'를 들여다보는 일에 여전하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에도 여전하다. 다만 달라진 것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더 정교해졌다. 달라진 배경이, 정물들이, 재료들이 그의 세계를 좀 더 정교하게 전달한다. 기어코 나는 전시장 한 중간에서 혼자 울컥하고 말았는데, 그건 정확도가 높아진 화살촉이 날아와 박힌 것이기도 했고, 내 안에서 일종의 열등감과 시기 질투 같은 것이 유독 일렁거려서 상처가 큰 덕분이기도 했다.
오래 보아온 작가들이 있다. 작가들의 작품이 멀리멀리 날아가는 것을 조용히 감탄하고, 박수치며 바라봐온 시간들이 있다. 나는 왜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자꾸 동경을 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