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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사회생활과 어린이가 없는 사회생활

당신은 알고 있는 어린이가 있나요?

by bobae

다 계획이 있어


“거기 언덕 아니야? 아니, 왜 그리로 올라가는 거야..”

어린이는 오늘은 데리러 오라고 말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는 경의선숲길 공원이 있다. 이제는 운행하지 않는 기찻길을 공원으로 만들어 둔 터라, 외국 공원 같은 넓고 탁 트인 운치는 없다. 그저 길이 이어지거나 두 개로 갈리는 수준인데, 아이는 아파트 쪽에 가까운 길을 두고 다른 길을 택했다. 분명 같은 방향을 향한 길인데 걷다 보면 아이가 걷는 걸 올려다보는 구간이 생긴다. 우리는 서로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각기 다른 길로 두 블록 정도를 함께 걸었다.

이러려면 왜 데리러 왔으며 좋겠다고 이야기한 걸까. 이 생각은 잠시이고, 나는 부지런히 어린이의 보폭을 맞춘다.

우리는 처음에 얼추 비슷한 것 같다가 어느 순간 아이가 나보다 먼저 공원을 벗어나, 횡단보도 앞에 서있었다.


“오 대단해 오 어떻게 벌써 온 거야."

어른으로 어린이에게 뭐가 무언지 잘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아무 말은 사실 몇 개 없다. 잘했어~ 우와~ 정말? 진짜? 아니 어떻게 한 거야? 같은 하나마나 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게 된다. 난 아이를 혼내지 않는 어른이라고 친구에게 티 나지 않게 거들먹거릴 때가 많은데, (운이 좋아 나는 만 6세까지 어린이를 한 번도 혼내지 않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었다.) 어쩌면 어린이는 굳이 말리거나 저지시키지 않아도 괜찮을 행동을 하는 때가 많고, 나는 굳이 막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거나, 그저 동의만 하는 사람은 아닐까 싶다.


“ 다 계획이 있는 거야, 저기 내려오는 곳이 조금 내리막길이거든, 그럼 가속도가 붙어서 엄청 속도가 빨라져. 그럼 이렇게 여기에 빨리 도착하는 거야."

'가속도'나 '속도' 같은 단어를 더 또박또박 발음하며 아이는 다시 또 자신만의 하굣길, 계획된 하굣길 루트를 설명했다. "그리고 여기, 저쪽에 신호등 보이는 자리 있지? 거기서 빨간불이 보이면 그냥 몸을 맡기고 내려온 체로 천천히 걸으면 되고, 초록색 불이 보이면 조금 속도를 붙이면 신호등을 오래 안 기다려."

계획된 루트를 타고 아파트 단지 초입까지 다다른 어린이는 매주 월요일, 금요일에 가야 하는 피아노 학원으로 갔다.


애들은 금방 친해지니까요.

사실, 이제 어린이는 내가 등하굣길을 굳이 같이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회사에 다니지 않는 엄마라니! 아이생에 처음 있어보는 신기한 경험인지라, 혼자 집에 오는 오늘도 특별히 하굣길 초청을 받았다. 오늘은 학교 앞에서 조금 먼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등하굣길 보호자가 필수값이 아닌 만큼, 집에서 반대방향으로 난 카페여도 이 정도 거리야 싶었는데, 막상 카페에 가는 길은 차도이자 인도이고 날은 춥고 사람과 차는 서로 자꾸 스텝이 엉키는 걸 보자니 불안해졌다. 어린이가 오는 길 방향에 창을 향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 아이를 찾아보다를 번갈아 하고 있는데 테이블 앞쪽으로 조금 덩치 큰 고학년 아이가 쓱 나타났다.


“엄마 가자!”

어린이는 등 뒤에서 서프라이즈를 외쳤고, 방과 후 수업을 같이 듣는 6학년 형님이라고 소개해줬다. 6학년 형님은 정말 키가 크구나. 아니 중학교 가는 6학년 형님이라고! 내 전공인 다시 우와 소리를 연발하며 허겁지겁 그림 재료와 종이를. 챙겨 넣었다.


“아 저는 예체능 계열을 전공할 거라 중학교를 그렇게 선택했는데요~ ”

“아, 원래 금양초에 계속 다녔는데, 3학년 때 제주도에 가서 5학년때 다시 금양초로 전학 왔어요 ~ 동네가 진짜 변한 게 없더라구요" 6학년 형님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유려하게 이야기했는데, 어색함을 깨려는 아무 말 대잔치인 아주머니의 질문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조금 뻘쭘하거나 어색해하는 건 외려 내쪽이라, 요즘에는 많이들 시골 유학을 간다는데, 어린이도 갈까 하며 너스레를 한 번 더 떨었다.


“애들은 금방 친해지니까요~, 괜찮아요!"




어린이들의 사회생활


어린이는 6학년 형님과 이전 하굣길도 같이 한 적이 있다고 집에 와서 알려줬다. 6학년 형님은 릴스나 뉴스에서 우려하는 밈이 난무하는 말을 쓰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 없는 축약어도 쓰지 않았다. 둘은 대단히 어린이 같은 인사도 어른 같은 인사도 없이 페이드 아웃으로 헤어졌다.

어린이는 학교에서 같은 반 친구만 아는 게 아니라 형님도 아는구나. 그러고 보면, 어제 어린이 피아노 학원 선생님은 5,6세인 본인 아이를 데리고 지나가며 아이가 우리 어린이를 너무 좋아한다고, 우리 어린이랑 키즈카페를 가고 싶어 한다고 웃으며 칭찬했었다. 직전 피아노 학원에서도 형님에게 키즈카페를 권했다고 하는 5,6세 아이는 나를 한 번 가만히 살펴볼 뿐 계단을 천천히 오를 뿐이었다. '형님은 이제 그런 곳 갈 만큼 어리지 않다'라고 잘 설명한다며 선생님은 웃으며 지나가셨었다.

어린이는 학원에서 미취학 아동하고 인사도 하고, 대화도 하는구나.


알지 못하고, 영영 알 수 없는 어린이의 넓고 다양한 사회생활을 상상해 본다. 내 지인의 이름도 종종 잊어서, (정말 너무 보고 싶어도, 이름을 잊고 마는 때가 있다.) 연락을 못하는 나에게 어린이의 관계를 같은 반 친구 이상으로 상상하는 일은 너무 어렵다. 일전에 갑작스럽게 맹렬하게 추위가 들이닥쳤던 날에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어떤 할아버지 차를 타고 하교한 적도 있다. 거침이 없고, 맹렬하게 웃으시는 할아버지는 나에게는 알은체를 거의 하지 않으시는데 어린이만 보면 오 친구! 하시면서 즐겁게 인사하고 일과를 물어보신다. 우리는 같은 아파트에 10년 살고 있고, 출퇴근만 해왔던 나와 달리 이곳에서 나고 자라고 여분의 시간의 대부분을 보낸 토박이 어린이의 삶 속에 친구는 여러 선을 넘나 든다. 어린이의 사회생활을 상상하는 일은 접는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좋다.


“나는 애가 없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여행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는 어느새 한국에서 살아온 날만큼 해외에서 산 날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친구를 둥지 삼고 기둥 삼아 보름간의 여행을 하고 돌아왔었다. 우리는 다시 열일곱이 되어 이제는 무용無用한 서로가 잘빠지는 각기 다른 잘생긴 남자스타일에 대해 깊고 넓게 떠들고, 해외살이의 어려움 밥벌이의 어려움으로 돌아왔다가, 한국 사회의 가파른 변화, 최근 한국과 국제사회관계 변화로 갔다가 런던 MZ들도 그 모양이 있다는 것까지 전방위적인 수다세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그 세계가 막힌 부분은 다름 아닌 '어린이'였다.

나와의 여행이 60번째 나라였던, 견문이 넓은 친구는 고등학교 화장실에서도 막힘이 없었고, 그 세월을 모두 넘어온 지금에도 막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이나, 그 선택을 설명하는 그 모든 과정에서도 주저함이 없었던 친구다. 헌데 내가 알던 그녀라면 당연히 대화가 이어졌을 법한 '촉법소년의 나이 기준'에 대해 막혔다. 장시간의 모바일 사용을 영유아에게 허용하는 문제에서도! 당연히 같이 우려하거나, 혹은 토론의 여지가 있어 이전 같으면 신나게 뛰어들었을 대화의 주제들이 막히는 부분은 다름 아닌 "나는 애가 없어서"라는 부분이었다. 아이를 양육하는 어려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영유아의 모바일기기 사용에 대해, 혹은 무리한 영상노출이 나쁘지만 의견을 내기 주저된다는 친구의 말이 이상하게 불쑥 화가 나기도 하고 한편 무리해서 이해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여행지에서 왜 이런 주제들에 대해 그녀가 주저하는지, 나는 또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깊게 이야기 나눴지만 돌아와서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고 마음의 질문으로 남아 있었다.


내 친구 같은 사람은 점점 많아질 것이다.

나는 비교적 인구문제를 크게 우려하지 않는 편인데, 인류는 여러 방식으로 번창(하거나 혹은 절멸해) 왔으며 그 방식 중 하나일 뿐이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구는 '닫힌계(Closed System)'라는 점을 상기하자면 사실 무한히 인구가 늘어나는 것이 더 기괴한 편이다. 지구 안의 물의 양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데, 이걸 사용하는 인구만 무한한 증식이라니. 물하나만 가지고 이야기했지만 그 외 기타 등등은 동일할 뿐이다. 어쩌면 인종과 국가 그리고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생기는 많은 차이들만큼 연령의 문제도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다양성의 문제로 들어가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불쑥 화가 났었던 걸까. 혹은 왜 당황했던 걸까.

아이가 없다고 해서, 내 친구에게서 의견을 말하는 입을 가져갈 수는 없다.

아이가 있다고 해서 내가 그 친구가 모르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나는 그녀가 '외국인'의 정체성으로 가지고 있는 넓은 세계에서는 또 다른 문외한이다.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아이의 세계를 모두 알 수 없다. 어쩌면 내가 내 친구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만큼, 내 아이를 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친구가 지금 살고 있는 런던이나, 살아왔던 슬로바키아 어느 시골 마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만큼만 육아의 세계를 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슬로바키아 등산생활을 영영 알 수 없듯이, 친구는 어린이와 보내는 여가를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리고 적어도 내가 등산은 알듯이, 친구는 집안일의 고단함을 알듯이 우리는 서로의 생활을 어림잡아 보고 서로가 대견할 뿐이다.


문득 화가 올라왔던 건, 내 친구의 입을 막았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친구는 거침없으며 용감하고, 현명하다. 같이 낄낄거리며 떠들며 우리는 여러 의미로 즐겁다. 가까운 친구가 넓은 세계에 있는 덕분에, 내가 모르는 세계를 깊고 넓게 듣는 즐거움이란! 상습 책추천러인 나에게, 실제로 내가 추천한 책을 읽은 사람은 골드노트에 적혔다는 전설이 있는데, 친구는 그 멀리서 추천한 책을 기꺼이 구해 읽는 사람이다. 내가 아는 이야기 모르는 이야기를 믹스해서 나눌 수 있는 청명한 즐거움이라니. 문득, 이 걸 우리 어린이는 전혀 알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어린이에게 (종종 한때는 스위스, 또 한때는 독일이었다가 현재는) 런던이모 이야기를 하는데, 내 친구를 자기 친구로 여기고 가깝게 지내는 우리 어린이에게 천하의 이땡땡(실명은.. 넣어두자.. 보호해줄게..)이 주저한다니! 어린이는 이런 종류의 도파민을 맛볼 수 없다니!

런던 MZ친구에게 당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지금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한 가치관과 현실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진심으로 우려했었다. MZ를 우려하거나 응원하는 것은 가깝게는 내가 혹은 내 친구가 그들의 동료이기도 하지만, 멀게는 이 시대를 함께 사는 동료시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MZ다음 세대를 알파세대라고 하는데, 어린이는 알파세대의 한중간에 속한다. 알파세대도.. 사실 그 확장한 개념 안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아이를 키우는 삶을 살 수도 있고, 아이를 키우지 않는 삶을 살 수도 있다. 나처럼 내내 한국에 있을 수도 있고, 친구처럼 여러 나라에서 살아볼 수도 있다. 그저 서로가 가진 스펙트럼이 다른 색을 가지고 있을 뿐이고, 내가 어린이의 사회를 모두(어쩌면 전혀) 알지 못하지만 어린이도 또 다른 색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거대하게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까지 이야기가 둥실둥실 떠 오르기도 했지만, 발 딛고 떤 땅이 말랭해져버려 이 것부터 수습해야 하는 요즘이라, 이 숙제는 다시 잘 넣어둔다.

지금 넣어두면 다시 일상을 살다가, 또 다음 챕터를 뒤적이다가 어디쯤에서 잘 무르익어 싹을 틔어내고, 다른가지를 낼거라 믿어본다.

이 땡땡아 우리 그 때까지 열심히 살다가, 다시 만날때는 더 거침없이 떠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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