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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민박집

제 04화.밤은 생각보다 어둡다.

by 성준

- 여기 노을이 꽤나 볼만한데... 오늘은 조금 힘드려나 싶네


해진은 수인의 눈물에 당황했다. 어찌할 바 몰라 허둥거리다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해진이 멋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가 늦어질 무렵에 다행히 비가 그쳤다. 아쉽게도 오늘은 비 온 터라 그 노을은 볼 수가 없었다. 수인은 해진이 안내해 준 방에 간단히 짐을 풀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대어 온몸에 힘을 빼고 그저 멍하니 건너 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천천히 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아이씨~ 내가 왜 그랬지? 아고 요 바보 같은 년 아.... 쪽팔려...'


아까의 일이 생각난 수인은 방 안에서 홀로 소리 없는 이불킥을 시전하고 있었다. 혹여 해진에게 들릴까 베개를 입에 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바람은 차가웠다. 이상하게 시골로 가면 금방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해가 저무나 싶기 무섭게 금방 주변이 캄캄해졌다. 수인은 시골에 살아본 적이 없어 이런 어둠이 낯설었다.


수인이 알고 있는 어둠은 아무리 해가 지고 밤이 되어도 주변에 불빛이 항상 있기 마련이었다. 발아래가 어두워 무서워 본 적 없었다. 오히려 밤의 가로등은 따스한 느낌마저 드는 불빛이었다. 하늘 위의 빛나는 태양이 온갖 예쁘고 반짝이는 불빛들로 내려왔을 뿐 밤은 낮의 그것과 별다를 바 없는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방에서 나와 단층의 건물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조명이 닿지 않는 코너를 돌자 정말 말 그대로의 어둠이 덮쳐왔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짙은 어둠에 달빛도 별빛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어둠이 손이 만져질 듯했다. 만져질 듯한 어둠을 손으로 휘저어 보았지만 손조차도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잠깐을 꼼짝도 못 하고 어둠에 조금 익숙해질 무렵이 되자 저기 아주 멀리에 있는 집들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암막 커튼을 치고 바라본 희미한 반딧불이 같은 불빛이었다.


몇 걸음 더 걸어보고 싶었지만, 처음으로 발아래가 무서워짐을 느꼈다. 발아래 무엇이 있을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기에 수인은 걸어온 걸음을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코너를 다시 돌자 거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처음 경험한 어둠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빠졌다. 수인은 거실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바람도 차고 기온도 추운데 이마에 땀이 송골 맺혀 있었다. 손으로 차가워진 땀을 닦아내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마치 나는 살아있다는 신호 같기도 했다. 오늘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정신없이 시작한 여행이고, 평소와는 다르게 떠나보자고 마음먹어서 숙소 주변에서 대충 때우려 했는데. 주변에 식당이나 편의점은 고사하고, 이 어둠을 뚫고 과수원을 걸어내려 갈 엄두가 나지도 않는다. 오늘은 별 수없이 굶어야겠다.


- 혹시... 배고파? -


마당 건너 창고 같았던 건물에서 해진이 다가오며 묻는다. 수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같이 먹을래? -


이번에도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인다.



익숙한 듯 간단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밥을 안치고, 약한 불에 임연수를 얹혀 놓고는 감자와 호박을 예쁘게 썰어내어 된장국을 끓인다. 된장이 끓는 사이 예쁜 계란말이가 뚝딱 완성이 되고, 중간중간 생선이 타지 않게 뒤집어 먹기 좋게 구워낸다.


수인은 그 모습을 거실에 앉아 무릎 위에 얼굴을 얹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군더더기 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춤은 추는 것 같기도, 무용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칼질을 하고 간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그릇에 담아내었다. 꽤나 익숙한 풍경에 수인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 와아..


수인의 탄성에 혜진은 슬쩍 눈길을 주고는 한껏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쓱쓱 쓸어낸다. 어디선가 몸 몹쓸 제스처를 흉내 내는 것 같아 우스웠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자신을 위해 밥을 차려내는 모습을 본 지 꽤 오랜만임을 깨달았다. 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살짝 코끝이 찡해졌다.


- 오래 기다렸지? 먹을까 이제? -


몸은 정직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은 것 없는 몸은 뚝딱 밥 한 공기를 넘겼고, 염치없음을 아는지 배시시 웃으며 빈 밥공기를 해진에게 다시 내밀었다. 한 그릇을 더 달라고


- 밤은 꽤 쌀쌀해 든든히 먹어. -


두 번째 공깃밥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었다. 짭조름한 임연수도 맛있었고, 하트 모양으로 잘라낸 계란말이는 폭신했다. 김치는 아삭아삭, 된장국은 포근한 맛이었다. 두 공깃밥을 먹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몸에 기운이 났다. 몸에 기운이 났더니 무언가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냥 둬 조금 있다가 정리하면서 할 거야. 괜찮다니까. 수인이는 손님이잖아 -


한사코 거절하는 해진을 거의 밀어내다시피 부엌에서 쫓아내고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집에서도 잘하지 않았던 설거지지만 몇 개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제법 익숙해졌다. 그때는 억지로 했던 일이지만 지금은 하고 싶다. 그랬더니 기분이 좋아졌다.


단 두 명의 식사 설거지라 금세 끝이 났다. 씻어낸 그릇들을 잘 마르게 정리하면서 찬찬히 주방을 둘러보니 넘치지는 않아도 모자란 것 없이 구색은 갖추어져 있었다. 널찍한 싱크볼과, 아일랜드 식탁과 나름 구색이 갖추어진 그릇들과 컵들. 전자렌지, 커피 머신, 미니 오븐까지. 맘만 먹으면 웬만한 요리들은 다 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양념들. 수인은 싱크 주변의 물기를 훔치고 커피 머신에서 신중히 커피를 골랐다. 어떤 캡슐이 어떤 맛인지 감이 안 와서 어떤 색이 좋을지 색깔로 고르기로 했다. 오늘의 커피 선택이 나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두 잔의 커피를 내렸다.


커피를 들고 마당으로 나서니 해진은 화로대에 불을 붙이고 있다. 불멍이 취미인지 이동형이 아니라 원형으로 낮은 벽돌을 쌓아 만든 고정형 화로대였다. 해진의 불 붙이는 솜씨는 조금 어설퍼 보이긴 했지만, 불멍 하기 위해 만든 자리는 꽤나 근사하게 지어져 있었다.


- 이거 오빠가 만든 거야? 꽤나 근사하게 만들었는데?

- 아! 이거? 이거는 우리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거야. 어때 꽤 근사하지? 여기 불멍자리랑 주변에 뭐 방화수, 의자, 장작, 여기 바람막기 담벼락 이거 다 손수 만드신 거야. 아버지 취미가 불멍이셨나 봐.


수인은 지난번 해진은 만날 때 해진의 아버지 소식을 들었다. 돌아가신 해진의 아버지가 만드신 공간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더 유서 깊고 의미 있는 공간처럼 보였다. 괜히 의자의 팔걸이를 한 번 더 쓸어내어 보고, 일렁이는 모닥불을 감싸는 벽돌을 애정 있게 훑어보기도 했다.


제법 굵어 보이는 장작들도 불이 붙기 시작했다. 모닥불 옆에는 두 개의 캠핑의자와 작은 테이블이 있었고, 해진이 준비했는지 캔맥주와 간단한 견과류가 있었다.


- 일단 맥주도 가지고 오긴 했는데... -

- 응. 나는 커피 내려왔어. 커피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예쁜 색 캡슐로 고르긴 했는데 -

- 아! 그래? 땡큐 땡큐 그럼 있어봐. 밤공기가 좀 차가우니까 내가 담요 하나만 가지고 나올게 -


해진이 담요를 가지고 나온 사이 불은 제법 타올랐다. 배도 불렀고 불꽃은 일렁이고 아까의 쌀쌀함은 낭만으로 바뀌었다. 해진이 가져온 담요를 두르니 이제는 포근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일렁이는 불빛인지 맥주의 알코올 때문인지 얼굴이 바알가케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여기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신이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 오빠가 어떻게 여기에 민박집을 하게 된 거야? 그것도 갑자기? 취업은 어쩌고?


- 그때 너 서울에서 너 만나고 왔을 때. 사실 그때 서울 고시원 정리하려고 올라갔었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거든. 여기는 아버지가 하시던 과수원이야.


여기를 어떻게 할까... 팔까 말까 고민하다가.. 잠시 여기서 시간을 좀 보내기로 했어. 나도 올해 취업 실패하고 시간이 좀 생겼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취업도 그렇고, 이제 이곳도 그렇고


좀 차분히 생각해 보자 하고 여기에 머무르고 있었어. 그러다가 재미 삼아서 에어비엔비 등록도 했는데 수인이가 여길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사실 수인이가 여기 세 번째 손님이야.


첫 손님은 여기 오자마자 미안하다고, 이렇게 주변에 뭐가 없을 줄 몰랐다고 환불해 달라고 해서 그냥 보냈고, 두 번째 손님은 산이며, 나무며 시골 사진을 찍는다는 사진작가가 와서는 하루 종일을 과수원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갔어. 그리고 수인이가 여길 온 거고. 엄청 신기하게. 아까 역에서 차 문을 두드리는 널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


그나저나 수인이는 어떻게 이런 시골로 여행을 다 왔어? 그것도 민박집 스타일에? 좀 더 세련된 스타일 쪽 아니었어?


해진이 단어를 고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진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걱정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도 하고 생각도 했지만 정말 해진의 물음을 받고 나니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 그게... 오빠 나는....-


수인은 해진의 눈빛을 피해 일렁이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불꽃을 보며 자신의 지난날과 생각들을 털어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바람소리, 타닥 장작소리, 그리고 낮게 울리는 수인의 이야기들이 밤을 채워가고 있었다.


주변의 어둠 때문인지, 일렁이는 불꽃 때문인지, 그들 외는 아무도 들을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수인은 이곳에서 정말 많은 말들을 했다. 서로 눈빛을 나누지도 않았고, 일렁이는 불꽃에 눈을 고정한 채 수인을 이야기를 하고, 해진은 맥주를 마셨다. 수인 몫으로 가져온 맥주도 해진이 다 마실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잠시 감정이 격해져 울음이 터져 버린 수인을 울게 두고 해진을 몇 개의 맥주를 더 가지고 나왔다.


불꽃은 일렁거리고, 그들은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쉽게 어디에서도 하지 못했던 서로의 밑바닥까지 토해내듯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제대로 된 불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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