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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민박집

제 03화.상처입은 여자

by 성준

비가 내린다.


기차의 창문은 내리는 빗방울에 얼룩얼룩 일그러진 풍경을 비추고, 덜컹덜컹 리드미컬한 기차 바퀴는 수인을 얕은 잠에 빠지게 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 옆 사람의 풍경은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고, 기묘한 낯선 감정을 느꼈다.


문득 10년 전 타보았던 기차가 그리워졌다. 불편했던 좌석, 특유의 냄새, 훨씬 더 덜컹거렸던 차체. 그때에 비하면 좌석도 좋아지고, 창문도 넓어진 듯했다. 기차 특유의 냄새도 사라졌다. 모든 게 좋아졌다. 하지만 수인은 좀 당황스러웠다. 수인은 편한 의자에 앉아 예전의 기차를 기억하려 애썼다. 조금만 앉아 가도 허리가 뻐근해져 계속 몸을 뒤척였던 기억. 울렁거림과 멀미의 불편했던 기억들 속에서 수인은 한 장면을 애써 기억해 냈다.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려 옆에 앉은 누군가에게 기대어 느꼈던 안정감. 함께 창밖의 풍경을 헤아리며 깔깔거리며 웃었던 기억들. 터널을 지나고, 산을 건널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에 커져 버린 눈동자들. 수인의 기억 속에는 그런 기차가 달리고 있었다.


기억 속 장면처럼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무심하게 핸드폰을 내려보고 있는 낯선 이의 얼굴에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좌석은 편해졌지만, 마음은 더 불편하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짝!


옆 라인의 초등학생쯤 된 아이가 무엇이 신났는지 크게 손바닥으로 손뼉을 쳤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숙이며 입 모양으로 '죄송합니다.'하고 사과를 한다.


짝! 소리가 들리자, 수인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뺨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그 짧은 순간에 손이 축축해지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 맺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분에 속마저 울렁거렸다. 가슴 속이 답답해지고, 다시 기분 나쁜 울적함과 기억이 머릿속에 쏟아져 내렸다.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고 턱을 괴듯 무릎에 기대었다. 옆에서 핸드폰을 보는 남자는 수인이 멀미하는 줄 아는지 에헴 하며 헛기침하고는 다리를 통로 방향으로 꼬고는 몸을 비틀어 시선을 피했다.


옆 남자의 시선을 느낀 수인은 몸을 추슬러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썼다. 기차 창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건'이 지나고 벌써 3~4주쯤 지났다. 3주쯤은 병원에서 지냈다. 천만다행으로 얼굴에 골절된 부분이나 함몰된 곳은 없었고, 다행히 눈, 귀도 망가진 곳도 없었다. 부어오른 눈과 뺨 그리고 터져버린 입술. 치아는 두어 개쯤 흔들리고 있다.


지구대에서조차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손님은 다음날 술이 깨자마자 두 손이 발이 되게 빌었다. 과연 어제의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멀쩡한 손놈은 다른 사람이었다. 매너가 몸에 배어있는 듯한 말투와 행동들 그리고 말솜씨는 어제 일어난 일들이 이 사람이 아닌 쌍둥이의 짓인가 싶을 정도였다.


-어제의 일에 대해서 어떤 위로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먼저 이 돈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치료부터 하시고, 몸 먼저 추스르세요. 원하시는 처벌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술을 너무 마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일단 치료부터 하셨으면 합니다. -


그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잘못을 빌었다. 당황스러웠다. 왜 이런 사람이 그런 짓을 해야 했을까 생각하니 더 머리가 아팠다. 차라리 적당히 비열하고 치사한 사람이라면 수인도 어떻게 행동해야겠다 다짐한 부분도 있었는데 오히려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모습에 더 놀랐다.


남자는 수인에게 합의를 종용하지도 않았다. 먼저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떠한 이유도 변명이 될 수 있기에 섣부르게 자신의 상황을 말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 잘못됨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잘못된 일에 대해서 상응하는 벌을 받겠다고 했다.


그에 앞서서 수인에게 자신의 잘못을 먼저 사과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합의의 여부를 떠나 치료비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 어제의 일에 대해서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이라는 위자료라며 천만 원이 든 현금 봉투를 건네고 갔다.


오히려 수인이 당황스러웠다.


- 경찰관님 저…. 그 사람 고소 취하할게요. 제가 잘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거 보면 정말 반성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요. 예.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말씀 주세요 -


하루 꼬박 고민하고 수인은 담당 경찰관에게 전화를 걸어 합의했다고, 필요하다면 서류도 만들어 주겠다고 이야기했다. 경찰은 사무적으로 잘 처리 드리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가게 사장님과 매니저에게 합의 했다고 이야기했다. 아르바이트 퇴근하는 길에 당한 일이라 모두 적잖이 걱정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진행 상황을 알려드리는 게 도리라 생각했다.


- 어휴 그래 다행이네! 잘 되었어. 그래 그렇게 잘 마무리하면 된 거야 그래그래


가게 사장님은 본이 미안하다며 수인에게 사과했다. 좀 더 잘 챙겨야 했다고 몸 잘 추스르라고 하며 약간의 돈을 주었다. 수인은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맞아본 적도 없었고, 갑자기 이렇게 돈이 생긴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폭행 당사자가 이렇게 진심으로 반성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기에 당황스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합의해 주고서는 스스로 너무 속물이 아닌지 자신을 스스로 비난하기도 했었고, 그와 동시에 이런 사람이라면 정말 실수겠다는 자기 합리화를 하기도 했다. 퇴원할 무렵에 매니저는 한 번 더 병문안을 왔다.


"이거 이번 달 월급이야. 사장님이 일단은 빠지는 거 없이 꽉 채워 주셨어."".. 고마워요…. 안 그래도 걱정했는데…. 그래도 죄송해서…. ""참 그리고 일단 일은 조금 쉬어. 종종 벌어지는 일들이긴 한데 바로 일하다 보면 더 힘들어. 손님 상대하기도 힘들고, 하필 가게 바로 앞이라 출퇴근할 때마다 기억날 거야. 정말 괜찮아질 것 같으면 연락 줘도 돼. 아 그렇다고 너 자른다는 거 아니야. 다른 가게로 갈 거 같으면 그냥 출근해도 되는데 나는 일단 조금이라도 쉬었으면 좋기에 그래…. 그래서 사장한테 내가 부탁 좀 했어…. 수인아…. 나는 네가 솔직히 말하면 그만 나왔으면 좋겠어. 아르바이트도 중요한데 너 공부 더해 봐. 그게 멀리 보면 나아"


"... 언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수인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맙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자신은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주변에 어리광을 피우고 있는 것 같았다. 수인은 매니저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일단 가게를 그만두었다. 눈에 부기와 멍이 아직 남아있고, 입술도 붓기가 여전하다. 그래도 예전의 누군지 몰라볼 것 같은 얼굴은 많이 가라앉았다. 갑자기 여유가 생겼다. 시간도 돈도. 불과 몇 개월 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이 생겼고, 다시 시간도 생겼다. 물론 좋은 일이 벌어져서도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나쁜 상태가 아니게 되었다. 수인은 가해자의 표현대로 어떤 위로를 받기 위해 그 돈을 일부 사용하기로 했다.


당일 출발하는 기차표를 끊었다. 이왕이면 가보지 않은 도시를 방문하고 싶었다. 수인은 옷가지 몇 벌 만을 챙기고는 여행을 떠났다. 필요한 게 있다면 도착해서 준비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가는 길에 숙소를 예약했다. 얼굴이 꼴이 말이 아니기에 이왕이면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마침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숙소를 찾았고 예약했다. 메시지로 도착 시간을 알리고 픽업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응답은 바로 왔다.


숙소까지 예약이 되니 수인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예전에는 며칠 전부터 예약하고 확인하고 일정을 짜고, 주변의 관광지며 맛집 등등을 다 따져가면서 여행을 다녔다. 숙소는 최소 리조트 혹은 호텔이었다.


' 민박이라니 참…. 사람은 변하는구나….'수인은 피식 웃었다. 기차에서도 벗지 않는 선글라스에 옆 사람이 슬며시 쳐다보곤 했었는데 피식 웃는 모습에 경계심이 생기나 보다 아예 수인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통로 쪽으로 몸을 비튼다. 수인은 차라리 잘 되었다며 볼륨을 크게 하고는 비 내리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기차역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여행 어플 메시지에서 안내해 준 장소에 도착하니 미리 안내받은 차 번호가 있었다. 4인승의 픽업트럭이었다. 승용차일 줄 알았는데. 이런 자동차도 처음 타 본다. 여행 온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차는 시동이 걸려있는 듯 테일램프가 빨갛게 빛나고 있었고, 수인은 옆자리 창문을 노크했다. 선팅이 되어 있는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어서 오세요... 예약하.."

"어! 오빠??"

"수인이?"

"오빠가 민박을... 해??"

"... 일단 비가 오니까 타"


해진은 수인의 짐을 뒷자리에 싣고 수인을 옆자리에 태웠다.


비가 내리는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픽업트럭이 달리고 있다. 능숙하게 운전하는 솜씨는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기차역에서 30여 분 시골 도로를 달리니 잎이 거의 다 떨어진 과수원이 보인다. 과수원 꼭대기에 집이 한 채 있다. 아마도 저곳이 민박집 인가 보다.


차에 타자마자 이것저것 물을 것 같았던 해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는 동안 주의 깊게 운전하고, 백미러를 보고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수인도 되도록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조수석 창밖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과수원을 신기롭게 보았다. 저곳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나? 싶었는데 해진이 내려 과수원의 대문을 열고는 다시 차에 올랐다. 두 개의 색깔로 나눠진 블록 길을 트럭은 잘도 올랐다. 다행히 집 바로 앞에까지 길이 이어졌고, 해진은 능숙하게 수인의 캐리어를 들어 마루에 올려두었다.


차에서 내릴지 말지를 고민하는 수인에게 해진은 손을 내밀어 내리기 쉽게 도와주었다. 손을 잡고 길에서 징검다리처럼 놓인 돌조각들을 밟고 집으로 향했다. 처음 잡은 손도 아니지만 빗속에 추워서였는지 수인은 해진의 손이 따뜻하다고 느꼈다.


수인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일부러는 아니지만 이런 곳을 찾고 있었던 거 같은 느낌이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바람에 풀이 스치는 소리. 낯익은 얼굴.


수인은 갑자기 안심이 된다는 기분에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반가웠다. 입꼬리는 웃고 있는데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괜찮아졌다는 긴장감이 한꺼번이 몰려왔다.


선글라스 너머로 해진이 당황하며 허둥대는 모습이 보인다. 다행이다 싶다. 이곳으로 여행을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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