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isu so bar in osaka

어느 여행자의 시간여행

by 성준

긴 산책을 마치고, 겨우 10시가 넘어서야 시간이 났다. 벌써 하루 종일 걸었던 터라 쉬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지만, 낯선 곳이라는 긴장감이 자꾸 발걸음을 잡았다.


모퉁이에 작은 바를 만들고, 길거리에 두어개의 테이블을 놓은 것이 전부. 작은 바 테이블에는 온갖 위스키 병들로 가득해서 내 술잔과 재털이 하나만 놓기에도 벅찼다. 서너 걸음이면 충분한 안쪽 공간에는 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주인장이 바쁘게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옆으로 질끈 문 담배연기는 조명을 받아 아지라이 흩어졌다.


겨우 한 자리를 잡아 위스키를 주문했다. 어제 추천해준 위스키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이곳에서 밤을 마무리했다. 주인장이 호기롭게 추천해준 오사카 로컬 위스키였다. 츠루키라는 이름이지만, 뜻은 잘 알지 못했다. 위스키를 추천해주며, 내일은 이걸 마셔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어제에 이어 홀린듯 다시 찾아와 그 위스키를 한 잔 주문했다. 잘 얼려 투명한 얼음이 위스키 잔을 가득 채우고, 보리빛 술이 주변을 매끄럽게 돌아 녹이고 있었다.


어제의 그것 보다는 조금 더 날카롭고, 조금 더 목을 쳤지만, 나쁘지 않았다. 나는 이미 술의 맛과 향보다 이 곳의 낯선 분위기에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어제는 멕시코 친구들이 많은 일본인과, 여러나라를 여행 중인 미국인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나보다 10살쯤 많아 보이는 일본인은 멕시코 친구들도 많고, 한국의 파주에서 일을 한 경험도 있으며, 편견속의 일본인들과는 다르게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를 이끌어 내곤 했다. 나야 늘 그렇듯 버벅거리며, 겨우 몇 단어를 말하고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반쯤은 내 귓가 어딘가에 멤돌다 사라져 버렸다.


늘 그랬다. 다음 번에 올때는 조금더 언어를 공부하고 와야지. 하며 다짐하고 후회하고는 했지만, 여전히 외국여행을 나갈 때는 버벅 거리기만 한다.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같이 여행을 한 딸에게 제발 언어하나만은 배우는게 어떻겠냐라며 부탁했지만, 그 나이의 나처럼 아이는 시큰둥 흘려 버렸다. 나이들어서 두고두고 후회할 표정의 모습이 그려지지만 어쩔 수 없다. 나도 그랬고, 억지로 해줄 수도, 능력도 없으니까.


둘째날도 그런 대화를 기대했는지 모른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의미없지만, 나누는 소소한 대화가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외국어로 이야기하고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금요일의 도톤보리 근처는 꽤나 시끄러웠다. 아니 골목 자체는 조용했지만, 관광지의 분위기와 텐션이 이곳까지 흘러들었다. 타지에서의 화려함과 이국적인 모습에 신이난 관광객들의 목소리는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고, 경찰이 와서는 조용히 해줄 것을 당부하고서야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나는 그 사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옆자리의 젊은이는 자신의 연인과 막 시작한 사회 생활에 대해서 신이나 떠들었다. 반포에 사는 아버지와 일본에서 일을 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구 마구 쏟아내었다. 연인의 이야기를 들어줄 법도 한데. 그들이 떠나는 그 순간까지 여성의 이야기는 채 열마디도 듣지 못했다.


반대편의 금발의 남자는 꽤나 바쁜 사람인 듯 했다. 두 대의 핸드폰을 번갈아가며 메시지를 보내고, 영상을 보고 또 핸드폰을 바꾸어 연락을 하며, 그 와중에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나 혼자만 시간이 멈춰 있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를 찾아왔으니까. 오랜만에 술집에 앉아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찌르르 넘어가는 위스키에 담배를 피우니 머리가 핑 돌았다.


빙그르 돌아가는 느낌처럼 시간도 돌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그 시절 이렇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질끈 눈을 감았다 떴지만, 여전히 오사카의 한 술집. 건너편엔 담배를 물고 있는 주인장이 컵을 닦고 있었다.


두 잔째 위스키를 주문하자 바텐더가 말했다.


"it's last shot"


어느새 옆자리의 커플도 떠났고, 핸드폰 두 개를 번갈아 사용하던 남자도 떠났다. 큰 목소리에 주의를 받았던 일행도 더 시끄러워도 좋을 만한 곳을 찾아 떠났다.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호기롭게 원샷을 외치고 일어섰다.


어느새 나 혼자 남아있었고, 바텐더는 길가의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직 얼음이 덜 녹아 더 날카롭고, 향기로운 위스키가 반이나 남아있었지만, 이제는 일어서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자리에 앉은 후로 아무와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술 두어잔에 몇 개피의 담배만을 태웠다. 밤은 늦었고, 사람들은 취기에 신이 났으며, 고민을 이야기 하기도, 여행의 설렘을 말하기도, 낯선 곳에서 낯선 인연의 즐거움을 나누고도 있었지만, 나는 그 공간에 앉아만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잠시나마 젊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고, 그 여행의 일행이 된 것도 같았고, 고민을 나누는 젊은 커플이 된 것 같았다. 순간 순간 스쳤다 찰라처럼 사라지는 감정들은 반가우면서도 꽤나 길고 씁슬한 뒷맛을 남겼다. 마치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위스키처럼 묵직하게 목구멍을 타고 내렸다.


"today is my last day in japan."


마지막 손님이 되어 바를 떠나기전 그래도 바텐더에게 내 감정을 전하고 싶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어색한 영어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는 휘적휘적 골목을 걸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골목엔 아스라이 가로등도 깜빡이고 있었다. 골목안 어느 술집 문틈 사이로 목청껏 부르는 노래소리가 새어나왔고, 그 노래소리를 비집고 바텐더가 내게 들려주었던 마지막 인사가 따라왔다.


"everybody have last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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