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가 쓰러지셨다. 1933년생의 할머니는 올해 94살이 되셨다. 작아지고 작아진 몸으로 코에는 줄을 심었고, 손발에는 보호대가 꽁꽁 묶여 있었다. 앙상한 다리를 덮은 이불을 들쳐보진 않았지만, 어쩌면 소변줄도 꼽고 있을런지 모른다. 총기를 잃은 눈빛은 초점을 알 수가 없었다.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주변 어딘가를 보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야야... 지..베.가야. 힙베... 가...고...시...뻐..."
겨우 귀를 가까이 대고, 신경을 집중해야 그녀의 말을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얼굴 한쪽이 무너져 내렸고, 혀가 굳었다. 중환자실에 들어온 지 삼일째. 탁해진 눈빛에 끈적한 눈물이 고였고, 불안정한 몸짓에 손을 휘저어도 보지만 묶여 있는 손발과 힘없는 근육에 그저 손가락만 휘젓고 있을 뿐이었다.
33년에 구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잠시,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서울에서 시작했던 신혼 생활은 곧 다시 충청도 작은 시골로 그녀를 이끌었다. 강원도에 가까운 충청도 추운 곳에 터전을 잡은 그녀는 1남 3녀의 자식을 두었다. 시골에 땅이 없는 집은 먹고살기 힘들었다. 겨우 손바닥만 한 땅을 마련했지만, 턱없이 모자랐고, 아무리 손이 곱도록 남의 땅을 부쳐 먹어도 가을걷이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그녀와 자식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그래도 아들은 달러빚을 내서 서울로 대학을 보냈다. 할머니에게 셋째이자 하나뿐인 아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랑스러웠고, 희망이었다. 충청도 시골에서 한양이라는 서울 이름이 들어간 대학을 보냈고, 그 날은 없는 살림에도 잔치를 했다. 그래봐야 차마 돼지를 잡지는 못했고, 닭 몇 마리를 잡아 모양새만을 내었을 뿐이다.
84년도 남편이 죽었다. 남편이 죽기 전 아들의 결혼을 서둘렀지만, 끝내 남편은 아들의 장가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여름이 되기 전 남편을 보냈고, 겨울이 되기 전 아들을 장가보냈다. 막내딸 시집갈 때 손 잡아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더 아들을 아꼈다. 그해 그녀의 나이는 이제 갓 쉰을 넘긴 나이였다. 52세 그녀는 남편을 잃었다.
집 안의 기둥인 아들이 서울에서 직장을 잡고, 결혼을 했을 때 그녀는 시골집을 정리하고 아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부푼 꿈을 품고 서울로 상경했지만, 아들의 삶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아들은 직장을 나와 사업을 시작했다. 기술을 밑천으로 대출을 받아 작은 공장을 차렸지만, 다들 그렇듯 겨우 겨우 한 달을 살았다. 며느리는 살림에 보태고자 보험을 시작했다. 서울 상봉동에서 부천으로 이사를 했다. 내심 서울을 떠나는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아들 장가밑천도 제대로 못해준 부모라 그저 내내 미안할 따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향에 그저 머물걸 후회하기도 했다. 여기는 부쳐 먹을 땅도 없었다. 이제는 어디 오도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연년생 큰 손녀며, 작은 손자 모두가 순하고 착해 아이를 돌보는 낙이 있었다. 두 아이 모두 아빠를 꼭 닮은 모습에 더 예뻤다. 다 지 아빠를 닮은 덕이다.
아들의 공장은 그리 잘 되지 않았다. 열심히 움직이는 만큼 돈이 들어오면 좋았으련만 몸만 축나고, 되려 집에 돈이 새어 나갔다. 제법 보험일을 잘하는 며느리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들이 며느리와 싸우는 소리가 들리면 그녀는 부엌 옆의 그녀의 작은 방에 들어가 불경을 되뇌며 염주를 돌렸다. 쾅 소리와 함께 아들이 나가는 모습이 문틈으로 보였고, 따라나설까 하다 며느리와 눈이 마주치고는 가만히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은 집을 나갔다. 그녀에게는 공장에 빚이 많아 위장 이혼을 하는 거라 말했다.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들이 나간 집에서 며느리와 손자 손녀들과 함께 지냈다. 며느리도 어찌 되었던 회사를 나가야 했고, 아이들을 맡길 곳을 새로 찾을 여력이 없었다. 어차피 아침에 나가 저녁에 지나야 들어오는 일상에 차라리 아이들의 할머니가 낫겠다 싶었는지 모른다.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았던 월드컵이 끝나고 3년째 되던 해 아들이 뇌출혈로 쓰러졌다. 공장에서 일을 하던 아들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두통에 제 발로 병원 응급실을 걸어 들어갔지만, 끝내 걸어 나오지는 못했다. 일주일을 병원에 누워있던 희망은 다시 피어오르지 못했다. 너무도 허망하게 삶의 희망이 꺼져버렸다. 그해 아들의 나이는 48세였다. 아직 50도 되지 않은 집안의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가 73이 되던 해였다.
아들이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맬 때 며느리는 다시 혼인 신고를 했다.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아들은 눈을 감기 전 전처와 다시 혼인하게 되었다. 얼마인지도 모를 보험금은 손자들 몫보다 그녀의 몫이 더 커져있었다. 어차피 아이들은 엄마를 따라갈 테니 상관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저 이제 그녀는 갈 곳이 없었다.
아니 아직 그녀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큰 딸은 내 팔자를 닮았는지 젊은 날 남편을 잃었다. 막내딸은 몸이 아팠고 얹혀 살 형편도 아니었다. 둘째는 여적지 고향에서 살고 있었고, 아이들도 모두 대학을 다니며 손이 갈 것도 없었다. 그녀는 아들이 죽고도 며느리의 집에서 한 해를 더 몸을 기댔다.
아이들이 모두 대학을 들어가고, 독립하기 전까지 살림을 도맡아 했다. 며느리 아침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의 방을 치웠다. 어린 시절 아빠를 쏙 빼다 박았던 손자들의 얼굴에서 더 이상 아들의 모습이 찾아지지 않게 되자 그녀는 그곳을 떠났다. 차마 발걸음을 옮기기 미안했던 둘째 딸네 집으로 갔다. 그렇게 그곳에서 20년을 더 지냈다.
둘째 딸은 고생을 많이 했다. 집 모두가 굶는 날이 많게 되자 둘째 딸을 식모로 보냈다. 착해서인지, 모자라서인지 큰 불평 없이 묵묵히 남의 살림을 맡았다. 먹고살기 힘들어 그랬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꼭 그래야만 했었나 후회하기도 했다. 딸은 끝까지 고향에 남았다. 잠깐 타지로 일하러 다니기도 했지만 고향에서 선을 보고 고향에 터를 잡았다. 비슷한 처지의 가난한 농가의 막내아들을 만나 단칸방부터 시작해 억척스럽게 살았다. 아이들을 다 키워 낸 후엔 배우지 못한 한을 검정고시로 풀어냈다. 그 기특함에 10원 하나 보태지 못했다. 어쩌면 참 염치없는 부모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저 몸을 뉘일 수만은 없었다. 아직 움직일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갚아야 했기에 걸레질을 하고, 설거지를 했다. 아니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는 그저 하루를 보내는 것에 위안을 삼았다. 다행히 딸과 사위가 무던해 큰 불편 없이 지냈다. 때로 아파트 경로당에 놀러 가기도 하고, 명절이면 손자를 만나러 서울로 먼 길을 떠나기도 했다. 서울에서 손자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사탕을 물어도 입이 늘 썼다. 자꾸 먼저 간 아들이 눈에 아른 거렸다.
생때같은 아들을 보내고 채 10년도 되지 않아 둘째 딸의 막내아들이 죽었다. 어린 시절부터 소아 당뇨를 앓던 손자가 이제 겨우 서른을 넘기고서 세상을 등졌다. 그녀는 내 전생 업보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팔자가 대물림되는지 세상이 야속하다 생각했다. 해준 것 없는 부모가 괜히 자식 잃는 팔자만 물려준 것 같아 속상해했다. 귀신은 뭐 하길래 이런 늙은이를 내버려 두고 생때같은 아이들만 데려가는지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이제 82세가 되었다.
힘없는 두 다리를 겨우 딛고 장례식장에 들어섰을 때 둘째 딸 큰 아들이 그녀를 보고 주저앉아 무릎 꿇고 한참을 울었다. 그녀의 굵게 패인 주름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등만 어깨만 한참을 어루만졌다.
뚱한 표정으로 내려 보고 있는 영정사진에 마음이 아팠다. 손자가 아까우면서도 딸이 걱정되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고 싶지도, 알려주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제 그녀와 그녀의 딸은 같은 상처를 짊어진 채 살아가야 했다.
그녀는 딸이 아들을 그리워 숨죽여 눈물 훔칠 때면, 또 염주를 돌렸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돌리고 또 돌릴 뿐이었다. 그렇게 또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화들짝 놀라 손발을 휘저어 보는데 몸이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야야~ 야야~"
겨우 소리를 내어 딸을 부르니, 딸의 눈이 한 껏 커졌다.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손발을 주물러 주는데 감각이 무디다. 얼굴도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흔이란 나이가 지난 지도 벌써 3-4년쯤 흘렀다. 어쩌면 이렇게 생이 꺼진다 해도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둘째 딸의 얼굴을 보니 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을 그리고 일반병실에서 또 일주일을 보냈다. 쓰러지신 지 첫날보다 말소리는 나아졌지만, 결코 쉽게 알아듣거나 눈에 띄게 좋아지지는 않았다. 굳어버린 혀 때문에 숨 쉬는 것이 어려워졌다. 콧줄을 뺄 수가 없었다. 그 때문일까? 병원은 집으로의 퇴원을 허락지 않았고, 할머니는 결국 요양원으로 가야만 했다.
시간이 흘렀을 때 작은 이모는 내게 말했다. 할머니는 병원에 있을 때 요양원인줄 알았던 것 같다고, 예전에 친척분이 요양원에 있을 때 손발이 묶여 있던 것을 보고 충격을 받으셨는데, 중환자실에서 묶여 있던 손발에 그곳에 요양원인줄 아셨던 것 같다고 말해 주셨다. 그래서 그렇게 집에 가고 싶다는 말만을 반복하셨는지 모른다. 작은 이모는 입혀져 있는 옷에 병원 이름을 보여드렸고, 그제야 할머니는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덜 하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셨을 때는 이미 화장마저 다 끝난 후에나 돌아오셨다. 집으로 오신 할머니는 여전히 뜨거운 온기를 품고 계셨지만, 이제 이 온기가 흩어지면 다시는 따스해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조문을 오신 손님들을 맞이하다 낯선 얼굴들이 보이곤 했다. 그러면 그분들이 먼저 20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아들 친구였음을 알려주셨다. 20년 전에 죽은 친구 어머니의 장례에 찾아오신 것이다. 그 아들이 이제 마흔쯤 되었고, 세상을 떠났을 때 친구 나이가 40 후반이었으니, 아들의 모습에서 친구의 얼굴이 보였나 보다. 상주 자리에 서 있는 우리 사촌 지간 중에서 망설임 없이 내가 너희 아빠 친구였노라며, 얼굴만 보아도 알겠다며 어깨를 두드리고 위로해 주시는 모습에는 애써 참아두었던 눈물이 또 흘러내리곤 했다. 그럴때면 영정 사진속의 할머니가 조금 더 미소 짓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흔넷을 살아온 삶은 무엇을 남겼을까? 한 번도 넉넉해 본 적 없고, 남편을 아들을 손자를 먼저 앞세웠던 그녀는 삶의 어느 곳에서 위안을 느끼며 살아왔을까? 평범하다 생각했던 그녀의 삶은 누구보다 고달팠고, 우울했고, 슬펐는지 모른다.
아흔이 가까워질 무렵부터 손수 수의를 장만하고, 경로당의 친구와 둘이 영정사진을 준비했던 그녀. 덕분에 영정 사진의 그녀의 얼굴은 따스했고, 여유가 엿보였다. 그럼에도 살고 싶다던 그녀.
삼 일간의 장례는 그동안 몰랐던 할머니의 많은 부분을 알게 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일생에 어느 한 부분만을 알고 있었고, 그 모자랐던 부분은 장례식장에서 만난 또 다른 사람들로 인해 채워졌다. 내가 태어나기 전 소녀였던 할머니, 젊음이 가득했던 때의 할머니를 나는 알지 못했다. 꿈 많았을, 희망이 가득했을 그 시절의 할머니를 나는 알지 못했다. 그 몰랐던 조각들은 사흘간의 마지막 잔치가 모아다 준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때로는 미화된 조각들이라도, 그녀의 삶은 되도록 온전하게 모아져 남은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을 정리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가진 각자의 조각들을 모아서 한 사람의 인생 모자이크를 채우는 것이다. 각 조각들은 크기도 형태로 색상도 모두 제각각이지만, 모아놓고 보면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의미 없을 것 같던 이야기들이 모이고 모여 한 인간의 삶으로 다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외할머니를 잃었지만, 누군가는 어머니를, 장모님을, 고모를, 이모를, 누나를, 작은 어머니를, 친구를, 동생을 잃었다. 그리고 그 모든 조각을 하나로 겹치고 모아보면, 1933년생 서월분이 완성되는 것이다.
아들도, 손자도, 남편도 다시 만나 그동안 힘들었던, 고생했던 삶
투정도 많이 하시고, 외로웠다, 힘들었다 불평도 하시고
보고 싶었던 얼굴, 손 한번 다시 잡고
그리움, 외로움 달래세요.
이제는 조금 더 마음 내려놓고, 너울너울 넘어가셔요
미안합니다 보다는 고마웠어요. 사랑합니다로 마지막 인사 할래요.
할머니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