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째 깜빡이는 커서만 쳐다보았지만 나는 끝내 선 한 줄을 그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겨울 CAD 프로그램을 열심히 배웠다. 디자인 툴 프로그램을 다뤄본 적이 없어 단축키 하나하나 낯설었다. 강사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첫 디자인툴이 낯선 수강생들을 끝까지 끌고 가려는 열정보다는 자신의 강의를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들이 답답하다는 듯한 한숨이 짙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는 말을 몸소 배웠다. 갑과 을이 명확한 39시간의 강의가 끝이 나서 어느 정도 캐드에 대해 기초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선과 면을 그릴 줄 알게 되었고 이제 내가 원하는 인테리어 도면을 작성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동안 만들고 싶었던 전원주택의 도면을 그려보고자 캐드를 열었다. 캐드의 모눈종이가 눈앞에 펼쳐지고 커서는 깜빡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끝내 도면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릴 줄 몰라서가 아니라 무엇을 그려야 할지 도통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크게 기지개를 켜며 방을 둘러보다 책상에 꽂혀 있는 수많은 글쓰기 책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하면 글쓰기를 조금이라도 익숙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팁과 강의가 있는 책들이었다. 몇 권의 책들을 읽었고, 또 그중에서도 공감하며 꼭 적용해 봐야겠다는 챕터, 문장들 그리고 밑줄 친 곳곳의 문장들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변변한 글 한 편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왜 아직도 글 한편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직도 더 많은 팁과 강의가 필요한 걸까? 강의와 글의 내용을 아직 몸소 체화하지 못했기에 그런 것일까?
캐드의 빈 도면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짓고 싶은 집이 어떤 모습일까 그려보았다.
높지 않은 언덕에 경사진 땅을 골라 지하로 주차장을 만들고, 계단을 올라 집 마당에 오를 수 있는 집. 위로 솟은 집이 아닌 옆으로 널찍한 단층의, 혹은 2층 정도의 계단이 있는 집. 주차장 옆의 지하 공간에는 성큰을 만들고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알파룸이 있는 공간. 중정을 두어 햇볕이 드는 거실과 천정으로 창을 내어 채광을 즐길 수 있는 집. 마당을 나가 바라보는 풍경에는 크지 않은 물길이 흐르고 주변의 산들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 손님을 맞이할 데크에는 넓은 테이블이 있는 그런 집. 나는 그런 집을 짓고 싶다. 그러면 내 안의 무언가가 완성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캐드에 선을 그리기 전에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집의 풍경을 떠올려 보았다. 도심에서 살짝 벗어나 인적이 붐비지 않는 곳. 천천히 산책을 할 수 있는 경사가 심하지 않은 길이 나 있는 곳. 집 뒤의 산에 둘러싸여 바람이 심하지 않은 곳. 내가 원하는 집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떠올려보니 어떤 곳에 살고 싶은지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선을 그리는 기술보다 어떤 집에 살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이란 어떤 것일까? 지금까지 한 권의 책을 내보고자 아등바등거렸지만,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돌아본 적이 있을까? 서점을 기웃거리며 수많은 책들 중에 내 이름이 적혀있는 책 한 권 놓고 싶다는 욕심안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죽여 있을지 충분히 고민해 왔던가?
나는 무엇을 쓸지 정하지도 않은 채, 선 긋는 법과 문장 다듬는 법만 외워왔다. 이야기의 구조는 세웠는데, 정작 그 안에 넣을 풍경이 없었다. 뜬구름 속에서 한 치 앞의 장면도 그려보지 못한 채로 계속 같은 자리를 빙그르 돌아가고 있었다.
조금은 더 천천히 써도 될 것 같다. 조금은 더 머물러도 될 것만 같다.
글이라는 욕심에, 정작 무엇을 쓸까인지에 대한 고민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나는 선을 그리는 법을 문장을 다듬는 법을. 이야기를 구조를 세우는 법만을 익혀왔는지 모른다. 어떤 집을 지을지 어떤 한 문장을 말하고 싶었는지를 나는 아직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셈이다.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입력하지도 않은 채 달리는 자동차는 의식의 흐름대로, 도로의 사정대로 흘러만 가고 있었던 것이다. 목적지가 분명해야 막히더라도 신호를 기다리고, 교통흐름을 파악하며 나아갈 수 있다. 가야 할 곳이 분명하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목적지에 다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목적지가 없는 운전을 가야 할 곳을 모르기에 도통 끝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노트북의 자판 대신 노트를 한 권 집었다. 그리고는 키보드가 아닌 펜을 들고는 한 줄 한 줄 적어내었다. 어떤 집에 살고 싶은가? 내 삶의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오늘은 이렇게 두 줄만을 적어내었지만, 적어 낸 그 문장 뒤에는 보다 많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