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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Aug 22. 2020

49. 황 반장님.

마음이 자꾸만 갈피를 못 잡고 이리로도 저리로도 가지 못한다.

다들은 자기 자신을 꽤나 알겠다는데, 나는 도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남부럽지 않게, 아니 오히려 남들이 다들 부러워할 만큼 떵떵거리며 펑펑 쓰며 살고 싶다가도 한편으론, 정말 그런 삶을 진정으로 염원하며 앞으로를 살게 될까 흠칫 두렵다.


어느덧 한해의 반절을 훌쩍 넘기고 있다. 장마와 폭염을 거쳐 곧 아른거리는 추석 연휴 덕에 시간만 나면 괜스레 캘린더를 다음 달로 넘겨본다. 지난달엔-믿을 수 없게도-곧 결혼을 앞둔 오랜 친구와 재미 삼아 사주를 보러 갔다(너마저 가니 가니 떠나려고 하니~). 꽤나 신통하게 들렸던 건 친구도 나도 팔랑귀여서일까. 그래도 듣기 좋은 소리를 잔뜩 들어 기분은 좋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무엇보다 작년부터 계속해서 수명을 갈아 공부하는 것의 결실을 제때 맺을 수 있단 소리에 이상하리 마치 퍽 안심이 됐다.


그분은 말미에 나라는 사람의 인생 목표는 그저 재미있게 사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돈 벌어, 돈 쓰는 것이 나에게 있어 재미라고도.

그 지점에서 나도, 나를 오래도록 봐온 친구도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웬걸, 그 시점 이후로 점점 내 마음이 그쪽으로 기우는 것만 같다.


이럴 거면, 첫 직장인 증권사에 얌전히 다녔어야 하는 건데. 선한 의지로 벼려 공익을 추구하고자 방황했던 지난 시간들과, 무턱대고 입학까지 해버린 로스쿨에서 현재 진행 중인 어나더레벨의 쌩고생은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재미 삼아 본 복비 5만 원짜리 사주풀이에 맞추어 인생을 재설계할 만큼 팔랑귀인 걸까,

아님 그저 자신조차 속여왔던 속내가 드러나버려 조금은 솔직해진 걸까.


얼마나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버린 건지,

도대체 뭘 먹고 싶은지도 도통 모르겠다. 이렇게 되고 나니 누군가 챙겨주지 않는 매 끼니가 참 곤욕이다.

별로 먹고 싶지도 않은 음식을 차리고, 먹고, 치우는 일련의 과정은 피곤하고 지난하다.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입에 떠 넣다 보니 되려 전보다 더 많이 먹는다.


그날은 밥을 차리고 간만에 TV를 켰는데, 유퀴즈온더블럭 재방송이 막 시작되던 참이었다.

유튜브로 제헌절 특집 편을 재밌게 봤던 터라, 재심 변호를 하시는 박준영 변호사님이 언급하셨던 황상만 반장님이 직접 출연하시길래 잘됐다 싶었다.


황반장님은 유쾌하셨다. 재미도 있었지만, 그분이 지나온 시간엔 울림이 있었다.


물론 박준영 변호사님도 정말 훌륭한 분이신데, 그분의 이야기로 내 마음이 동요되진 않았다.

그는 다다를 수 없는 어느 경지를 초월한 듯하여, 그 견고하게 빛나는 지난 시간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 듯싶다. 고귀하고 투철한 도덕적 신념을 주어진 그 모든 시간 동안 흔들림 없이 관철하는 대단하고 위대한 인격체.

그런 위인이 현세에도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싶은 마음이었지만, 평범한 나는 결코 걸을 수도 없고, 걸을 생각조차 않는 그런 길이라서.


반면 황반장님은 고뇌하고 또 괴로워하며 흔들리고, 망설이기도 했지만 결국엔 한 사람의 인생을, 그리하여 그 자신의 인생을, 더불어 사회를 바꾸어냈다.

"나는 범인이 아니다"라고 3년 동안을 외쳐대는 힘없는 어린아이의 절규를 왜 외면하고 있었는가. 법이라고 하는 것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 하지 않았는가.
"형사도 변호사도 판사도 모두 내 말을 믿어주려 하지 않았어요"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면, 그것이 과연 법 앞의 평등인가.

그 소년이 하다못해 아버지라도 살아있었다면 이와 같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충격이 커 며칠 밤을 내 양심과 싸우느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의 파장을 왜 내가 모르겠는가. 모른 채 덮어둘까?
그러면 범인으로 검거되어 교도소에 있는 그 아이는?
다만 진실이 무엇이며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피곤하다 정말 피곤하다.
몸보다도, 마음이... <황반장님 일기 중>


그렇게 부조리한 현실과 양심 사이 괴리에 달밤을 지새우다 황반장님은 무탈한 본인의 현실을 내어주고, 어린아이의 억울한 현실을 마주하셨다. 누군가의 인생이 말도 안 되게 억울해도, 마음 쓸 겨를 없는 이들이 더 많다. 나 자신의 인생이 억울해지지 않도록 하는 일상에 치여서.


그렇게, '형사도, 변호사도, 판사도 모두' 지나쳐버린 한 아이의 인생은, 원래대로라면 그저 억울하게 끝날 운명이었다. 그런데, 아이의 인생에 황반장님이라는 빛나는 변수가 등장하고, 억울한 아이에게 마음 썼다는 이유로 조금은 더 평탄하게 보낼 수 있었던 황반장님의 시간들마저 동료들의 지탄과 윗선의 압력 그리고 이어진 좌천에 의해 억울함으로 물들었다.


황반장님의 선택, 그리고 이후 박 변호사님의 결단은 평범하게 억울한 어떤 인생을 결국엔 영화로 만들어냈다. 누군가의 억울함쯤이야 외면하는 선택이 더 쉽고 평범해서, 억울한 인생은 그저 영영 억울하게 끝나기 마련이다. 때문에, 평범하게 억울하기만 한 인생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는 거겠지.


황반장님과 박 변호사님의 지난 갈등과 선택이 한 평범한 인생을 영화 같은 인생으로 탈바꿈시키고, 그렇게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최소한 형식적으로나마 반성했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억울함에 미치는 기여도 역시 미세하게나마 줄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황반장님의 고뇌와, 갈등, 그리고 끝내 양심에 내어준 무탈하게 보낼 수도 있었던 그의 지난 시간들에 내 마음이 일렁인다. 무탈하게 쓰였다면 무고한 아이는 여태 지독히도 억울하기만 했을 테고, 누구도 그런 억울함에 관심 두지 않을 테고, 죄 없는 아이의 말을 믿지 않고 흉악범으로 낙인찍은 형사도, 변호사도, 판사도 모두 되려 떳떳하게만 살았겠지.


황반장님은 끝으로, 힘들어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한마디 톡 쏘아붙이셨다.

"너 그때 너무 옹졸했어. 좀 크게 놀아라."


반면, 나는 점점 옹졸해지는 걸까?

최근 모임에서 졸업하면 무슨 일 할 건지 묻는 직장 동기에게

"왠지 모르게 요즘 점점 그냥 돈이 벌고 싶어. 나도 내가 뭐 하고 싶은지 이제는 모르겠다."라고 답했다.

(나보다 5살 많은) 동기는, "나이 먹으면 그런 거야."라고 위로를 건넸다


쌩고생으로 물든 나의 시간들에 보상심리라도 생긴 걸까, 아님 정말 그저 나이를 먹은 걸까?


쉽고, 평범하게 사는 인생이 영 내 맘에 안찰 것 같지도 않다.

물론, 그러지 않는 자신이 더욱 자랑스럽긴 하겠지만.


점점 옹졸해지는 나는, 수명을 갈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계기를 점점 잊어가고, 그렇게 지난 방황들이 수포로 돌아가도 크게 개의치 않을 것만 같다.


지금으로선, 그래도 별 상관은 없다 싶은 마음이지만

다시 또 마음이 왔다가, 갔다가 하다가 평범치 않은 저쪽으로, 폭.

 쓰러지는 때가 곧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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