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은 아주 짧지만 매우 강렬하다.
하루종일 퇴근 후 먹을 음식 생각을 머릿속 한 구석에서 떨쳐내지 못한다. 일을 하면서도 미리 선정해 둔 저녁 메뉴를 내내 되뇌는데 이런 것도 나름의 멀티태스킹이라면 멀티태스킹이려나.
점심은 약속이 있다거나 식후에 챙겨 먹을 약이 있다던지, 너무 배가 고파 도저히 집중이 안된다는 둥의 부득이한 사정이 없는 한 먹지 않거나, 커피빈 머쉬룸 수프 혹은 천하장사 소시지로 간단히 해치운다. 1분 1초라도 빠른 퇴근을 담보하기 위해서다. 퇴근 후 할 일은 딱히 없으나 월급 쬐끔 받는 대가로 하루 꼬박 갇혀있던 3평 남짓한 이 방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가지 않고는 베기지 못하는 노예인 것이다.
월요일의 단골 메뉴는 마라샹궈와 맥주 한 캔. 주말까지 헤쳐나가야 할 날들이 온전하게 4일이나 오롯이도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 속이 부대끼기 때문에 혀끝과 속을 탁 하고 쳐주는 강렬한 매운맛이 적절하고 절실하다. 마라탕은 아무 데서나 시켜도 대부분 성공적이지만 마라샹궈는 아무렇게나 시켰다가는 흔하게 실패를 면치 못하므로 퇴근 전까지 화장실에 들리는 족족 배달앱 화면을 켜고는 리뷰를 샅샅이 훑어봐 줘야 한다.
아! 그리고 마라탕이든 마라샹궈든 기름에 절은 새우 계란 볶음밥 추가는 필수다. 다 먹고 나면 투명한 박스에 누우런 기름이 흥건히 남을 정도로 밥이 기름에 절어있어 줘야 마라의 품격에 어우러진다.
사리로는 건두부, 두부피, 부죽의 두부 3인방을 잊지 않고 넣어준다. 질깃하고 처음 몇 입을 씹으면 자극적인 마라소스가 입안에 쏴아 퍼지지만 곧 구수한 두부 맛을 느낄 수 있는데 그 맛의 간극이 다채롭다. 청경채, 배추, 숙주로는 다른 사리들을 싸 먹어줘야 하므로 담뿍 추가한다. 질겅하거나 눅진하게 씹히는 소고기, 피시볼, 비엔나소시지에 채소의 아삭함이 더해져야 비로소 식감에 재미가 생긴다. 팽이버섯과 느타리버섯도 잊지 않는다. 팽이버섯은 아그작 아그작 소리가 나는데 그 매력은 두말하면 입 아플 노릇이고, 느타리버섯은 쫄깃한 채로 마라 향을 잔뜩 품고 있어서 놓칠 수 없다. 국수는 옥수수면만. 분모자나 중국당면은 과하게 탱글 해서 씹다 보면 곧 속이 느끼해진다. 화룡정점은 누가 뭐라 해도 고수이다. 고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씹을 때마다 코 끝을 때리는 특유의 향긋한 꼬릿함이 마라 향을 녹진히 배가시킨다. 크리미 한 고수운 땅콩소스에 푹푹 찍어가며 한통 비우는 동안 맥주 캔도, 새우 기름밥도 종적을 감춘다.
물론, 다음날까지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리게 되는 걸 감수할 가치가 충분하다.
화요일엔 주로 집밥이다. 국물 없는 식사는 허전하고 심심하니 찌개나 국은 필수다. 김치찌개와 고등어구이 그리고 치즈 계란말이는 아주 오래도록 우리 집의 스테디 세트메뉴로서 그 위치를 공고히 다져왔다. 김치찌개에는 돼지고기도, 참치도 아닌 반드시 스팸이 들어가야 한다는 게 우리 집안사람들의 절대적인 신념이다. 진득하게 우려낸 멸치육수에 김치를 한소끔 끓여낸 뒤 스팸을 두툼하게 썰어내 잔뜩 집어넣는다. 그 외 다른 사리는 불필요하다. 그저 많은 스팸 그리고 그저 많은 김치만으로 찌개는 아득히도 완벽하다.
기름기를 가득 머금은 짭조름한 흰 고등어 살코기를 김이 나는 밥 위에 척하니 얹고는 숟가락으로 가득 퍼 입안으로 나른다. 보통은 젓가락으로 밥알을 깨작거리며 먹는 나지만 이 신성하고도 감미로운 조합에는 감히 젓가락을 올리지 않는다. 입안에 밥과 고등어를 씹으면서 삼키기 전, 연이어 멸치 육수에 야들해진 찌개 속 김치를 건져먹고는 국물을 한 모금 꿀떡 삼키면 다음 한입을 위해 손이 바빠진다.
소금 간을 한 계란에 계란이 말릴 수 있는 한 최대치의 모짜렐라 치즈를 쏟아부어 완성한 샛노란색의 계란말이는 터져 나온 치즈들이 누룽지처럼 들러붙어 부드럽고 진득하다. 뜨겁고 부들거리는 계란말이를 차갑고 새콤한 토마토케첩에 찍어서 또 한입.
아, 하루 종일 굶은 노예여, 이처럼 완벽한 저녁 식사 한 끼를 마주하기 위해 오늘 하루도 참 고생이 많았다.
수요일, 칠부등선을 넘어간다. 금주해야 할 일은 아직도 한그득인데 시간은 갑자기 가쁘게 흘러간다. 주말에 일할 셈이 아니라면 이쯤 노예의 일 근로시간은 8시간을 거뜬히 초과하는 수 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 밥 먹는데 소요되는 시간만큼 자유에서 멀어지므로 쫄쫄 내리 굶고는 악에 받쳐 일을 쳐낸다. 난폭해진 신경머리에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굶주린 자의 업무처리속도는 배부른 자의 그것 대비 족히 2.5배는 빠르다.
어두워진 밤, 퇴근 시간이 지나 널널한 버스 안에서 배달앱을 켜 맥도날드를 검색한다. 쿼터파운더 치즈 라지 세트, 맥너겟 4조각, 소스는 케이준 소스, 코울슬로, 마지막으로 초코 선데이 아이스크림까지 신속 정확하게 거침없이 장바구니에 담아 주문하면 하루종일 먹지 못해 날카로이 날뛰던 분노가 어느 정도 진정된다.
음식이 도착하면 선데이 아이스크림을 냉동실에 넣어두고는 배달 오느라 눅눅해진 감자튀김을 꺼내 에어프라이기에 3분 정도 돌린 뒤 허둥지둥 티브이 앞에 앉아 정신없이 포장을 풀어헤친다. 기름기로 반질거리는 햄버거를 한입 그득 베어문다. 맥도날드 특유의 녹진하고 꼬릿 한 치즈향. 대충 우물우물 씹어 꿀떡 삼키곤 따끈, 바삭한 감자튀김 두세 개를 매콤한 케이준 소스에 콕 찍어 한입에 넣어주면 짜증이 사그라든다. 맥날 세트 메뉴는 세트라는 이름에 걸맞게 참 멋들어지게 어우러진다. 햄버거 한입, 감자튀김 한입, 콜라 한 모금, 햄버거 한입, 코울슬로 한입, 콜라 한 모금, 다시 감자튀김 한입.
그렇게 햄버거를 반절쯤 해치워 어느 정도 배가 차면 맥너겟을 꺼내든다. 맥너겟은 동그란 모양과 한반도 모양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한반도 모양이 좋다. 맥날 케이준 소스통은 동그란 모양 너겟을 푹 찍어 담기에는 작아서 소스를 맘껏 찍을 수가 없는데, 한반도 모양의 너겟은 호랑이 앞발 부분이 소스통에 쏙 들어가 소스를 흠뻑 찍을 수 있다. K-치킨이 대세라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치킨은 단언컨대 매콤하고 부드러운 케이준 소스를 담뿍 찍은 꼬숩고 부드러운 순살 치킨 너겟이다. 또다시 끝없는 순환이 시작된다. 너겟 한입, 감자튀김 한입, 콜라 한 모금, 햄버거 한입, 감자튀김 한입, 코울슬로 한입, 너겟 한입, 감자튀김 한입, 햄버거 한입, 콜라 한 모금.
끄억- ㅎ
케이준 소스 덕에 맵싹 해진 입을 냉동실에 잘 쟁여놓은 차가운 초코 선데이 아이스크림으로 달래준다. 꾸더억 달콤한 초코 소스는 충분해서 아껴먹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까지 완벽히 마치면 고된 하루도 또 무사히 잊혀진다.
목요일은 새로운 금요일이다(Thursday is the new Friday). 어떤 일이든 어쩐지 다 해치울 수 있을 것도 같은 자신감과 에너지가 용솟음친다. 주말의 그림자가 이만치나 가까워졌다는 사실만으로 어제와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오늘의 세상은 조금쯤 더 살만한 세상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엄마의 별명은 여러 개지만 그중에서도 음식과 관련된 것을 하나 꼽으라면 '카레와 미역국의 여신'이 있다. 물론 그 외 음식들도 엄마가 만들어준 쪽이 다른 어디서 먹는 것보다 더 훌륭하지만, 카레와 미역국은 차원을 뛰어넘는다고나 할까. 어쨌든 범접불가의 무언가다.
그중에서도 오늘의 메뉴는 카레다.
여신님께서는 매운 고체 카레를 사용하시는데 건더기로는 감자, 캔옥수수가 아닌 찰옥수수, 두툼히 썰은 부드러운 한우, 집에 있는 버섯(양송이든, 팽이든, 느타리든 노상관!), 그리고 냉장고에 당근이 똑 떨어지는 행운이 자주 오지 않는 탓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당근까지.
짙은 구리색의 카레는 마녀의 수프(여신의 수프처럼 보이진 않는다)처럼 부글부글 동그란 기포를 터트리며 용암마냥 끓어 넘친다. 따끈한 흰쌀밥에 뜨거운 카레를 흥건히 쏟아붓고는 반숙 계란프라이를 얹는다. 집 앞 정육점에서 파는 수제 돈까스도 곁들인다. 적당히 잘 익은 김치(J호텔 배추김치)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카레를 넉넉히 뿌린 덕에 질척 질척해진 밥을 부드러운 감자와 함께 한술 뜨고는 아삭하고 시원한 김치 한 조각을 냉큼 집어온다. 매콤하고 뜨거운 카레에 시원한 김치로 화끈함과 개운함 사이를 넘나들며 입안은 달구어졌다가 진정되기를 반복한다. 반숙 계란 프라이를 푹 터트리면 노오란 노른자가 매운 카레 소스를 머금은 밥에 꾸덕히 스며들어 칼칼하면서도 고수운 궁극의 한입을 경험할 수 있다. 버섯 중에는 느타리버섯이 가장 좋은데 그 질깃한 식감이 아삭거리는 팽이버섯보다 카레에 더 조화롭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워진 두툼한 한우 조각들은 소고기 향을 품은 채 카레 소스를 한껏 머금고 있어 씹을수록 풍미가 올라오고, 그 덕에 카레에서는 꼬릿한 버터향까지 풍긴다. 여신님 카레의 포인트는 엄청난 양의 찰옥수수라고 할 수 있는데, 으스러져버리는 캔옥수수와 달리 아무리 끓여도 그 단단한 형태를 잃지 않고 쫄깃하게 자신의 발자취를 입 안에 또렷이 남긴다. 카레밥 한술에 치아 사이에 찰싹 달라붙을 정도로 쫄깃거리는 찰옥수수가 여러 알이나 씹히는데 그 식감이 퍽 일품이다. 바삭하게 에어프라이기에 다시 튀겨낸 돈까스 조각 위에는 연겨자를 살짝 올려 한입 베어문다. 돼지고기가 아삭히 씹히고, 육즙과 기름이 함께 터져 나온다. 카레를 연거푸 먹은 탓에 한껏 화끈해진 혀를 담백한 돼지고기와 가볍게 톡 쏘는 연겨자로 가라앉힌 후 다시 김치 한 조각.
먹는 속도가 느린 나지만, 카레만큼은 허겁지겁 게걸스럽게 해치우고 만다.
아 맞다 참, 당근. 당근은 그렇게 끓여대도 감자나 소고기처럼 부드러워지는 일 없이 꽤나 딱딱하기 때문에 카레 소스를 흠뻑 빨아들이지도 않아 그 특유의 건강한 향을 잃지 않는다. 카레 소스를 한껏 떠 함께 우물우물 삼켜내면 겨우 먹을만하다. 그래도 역시, 2년 내지 3년에 한 번 정도 운 좋게 맛볼 수 있는 당근 빠진 카레가 훨씬 맛 좋다.
금요일이면 특별나게 성가신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한켠에 꽁하니 숨겨두었던 너그러움을 뽐낼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평온하다. 그러니까 새로운 일을 맡게 되더라도 주말의 나 혹은 다음 주의 나에게 마음껏 미뤄버리고 오늘의 나는 그저 한가로이 평화를 만끽한다. 오늘만큼은 곧 죽어도 6시 칼퇴다(무슨 일이 생겨도 주말에 일을 함으로써 금일 자 칼퇴는 사수해 낼 수 있다).
금요일엔 칼퇴를 반드시 사수해야 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냐고 한다면 당연히 있다. 금요일만큼은 6시에 퇴근하고 말겠다는 오래된 나 자신의 단호한 결의가 하나의 이유이고, 나 자신과의 저녁 약속이 또 다른 이유이다.
퇴근길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사고 시원하게 먹기 위해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에 넣고는 주문한 떡볶이가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린다.
엽기적으로 매운 바로 그 떡볶이를.
엽기적인 떡볶이(이하 '그 떡볶이'라 한다.)에, 맵기는 오리지널, 모짜치즈(방구석 미식가인 내 짐작으로는 자연치즈임이 분명하다), 햄(햄이라 쓰여있으나 실상은 소시지인 그것), 우동 사리를 추가하고 사이드로 계란찜과 단무지도 필히 챙긴다. 금요일 저녁, 그 떡볶이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하고, 나는 한 시간 이상을 인내한 끝에 그 떡볶이가 담긴 묵직하고 뜨끈한 둥그런 흰색 통을 무사히 건네받는다.
추가한 덕에 흰 통에 젓가락을 꽂을 때마다 엉겨 붙어버리는 치즈, 매운 양념이 덕지덕지 붙은 탱글 하다 못해 투명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떡을 넓적하고 긴 어묵으로 감싸먹으면 황홀경의 탄식이 절로 나온다. 갑작스레 무지막지하게 치고 들어오는 매운 양념에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데 볼품없는 색(회색과 노란색 사이 그즈음 어딘가)의 미지근한 계란찜을 한술, 새콤하고 싱싱하게 아삭한(싱싱하지 않은 단무지는 무르다) 단무지 한입이면 또다시 흰 통으로 가는 젓가락을 막지 못한다. 흰 통에 우동사리를 쏟아 넣고는 이렇게 무아지경으로 먹는 동안 우동사리 역시 매운 양념에 꾸덕꾸덕히 숙성되어 간다. 소스에 절여진 우동사리도 마찬가지로 얇은 어묵이나 흐물거리는 양배추에 싸 먹는다. 인중에는 땀이차고, 두피에서 열이나 정신도 혼미해져 가지만 시원한 맥주 한 모금으로 열기를 잠재우고는 계속해서 식사에 정진한다. 흰 통을 휘휘 젓다보면 가끔씩 얻어걸리는 햄(소시지)도 또, 또, 어묵이든, 우동사리든, 양배추든지에 싸 먹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금요일의 화려한 그 떡볶이 흡입은 계란찜과 단무지가 끝장날 때까지 이어진다. 남은 그 떡볶이는 다음날 냉장고 속 비엔나소시지, 냉동실 속 우동사리와 모짜렐라 치즈를 넣으면 새로이 재탄생해서 흰 통은 다시금 묵직하고 뜨끈한 상태로 내 앞에 놓인다. 식사를 도와줄 단무지는 더 없지만, 중탕으로 샛노랗게 쪄낸 계란찜을 양 많이 준비하면 문제없다.
주말엔 최대한 늦게까지 침대에서 뒹굴다가, 날이 어스름해지면 술 약속을 나간다. 메뉴는 다양하다. 와인, 소주, 막걸리, 소주, 와인, 소주, 그리고 소주, 그리고 다시 또 소주. 그날의 주종에 따라 안주를 정한다.
낮시간에 기분이 내키면 가끔은 테라스가 멋진 해방촌에 위치한 좋아하는 생면 파스타집으로 향하는데, 그 집에서 파는 꿀 맥주가 또 일품이다.
어쨌든지 간에 그저 주말이라는 사실만으로 주말의 세상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은 자유에서 온다.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먹고 싶은 장소에서 먹고, 심지어 좋아하는 사람들과 먹는다. 주말 이틀간은 평일과 달리 그날의 끄트머리에서야 당도하게 될 음식을 마주할 순간만을 그리며 보내지는 않기에 음식이 주는 충만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그래서 난, 매일이 주말처럼 자유로웠으면 한다.
{그래서 난, 돈 걱정 없이 자유만을 쫒을 수 있을(돈 많은 백수가 될) 그날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