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의 이야기 : 너 하나 꽃 피어의 주인공 이야기
어릴 적 미술 학원에 다니며 알게 된 단어가 있다. ‘깍지’이다. 깍지는 속이 텅 빈 원기둥 모양으로 연필 뒤에 꽂아서 더 오래 쓰게 하기 위한 물건이다. 처음 깍지를 받은 건 내 4B 연필이 몽당 연필이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짧아진 연필 뒤에 깍지를 끼우자 연필이 길어졌다. 긴 막대를 연필에 꽂으니 길어졌다는 건 당연한 거지만 그때의 나는 왠지 신기했다. 뭔가 진정한 미술인이 된 것 같은 마음이었달까? 그리고 지금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인연에도 깍지를 끼울 수 있지 않을까?
때는 2024년, 중학교 2학년이 시작되는 익숙하면서 어색하기도 한 그런 때였다. 새로운 친구들과 새로운 반, 새로운 선생님들, 거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이끌고 만난 이 글의 주인공은 미술 선생님이었다.(이하 깍지쌤)
깍지쌤의 첫인상은 꽤 인상적이었다. 작으신 체구에 털털한 성격을 가지신 분이셨다. 또 학생들을 부르실 때 ‘아가야’ 하고 부르시는 것이 충격? 어쨌든 놀랐다.(지금 생각해 보니 마땅한 호칭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름을 다 외울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미술 학원을 다녔어서 미술에 관한 관심과 기대가 있었는데 여러모로 좋으신 선생님께서 오셔서 안심이었다. 수업들도 잘 맞았다. 기억나는 것을 몇 가지 적어보자면 유명한 그림을 오마주 해서 재해석한 그림을 그린다든지, 고려청자의 색깔을 가져와 자신만의 자기를 만든다든지 하는 재미있는 수업들이 많았다.
생각나는 일화도 두 개 정도 있다. 어느 날은 그림에 정육면체 소묘를 하고 있었는데 막히는 부분이 생겨 선생님에게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음.. 검은 색깔이지?” 하고 물어보셨다. 나는 아니었지만 아니라고 하기에는 어려워서
“어.. 네” 하고 대답했다. 그날 뒤로는 소묘에서는 손을 뗐다.
이 일화가 약간 웃픈 이야기라면 깍지쌤에게 감사했던 에피소드도 있다. 2학년 말, 내가 회장 선거에서 당선되고 나서의 일이다. 연말이기도 하고 회장 선거에 당선된 지라 해야 할 일이 좀 많았었다. 그래서 약간 힘에 부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던 미술 시간이었다. 작품을 대충 마치고 검사를 받으러 갔다. 당연하게도 빠꾸를 먹었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아있으니 선생님께서 오셨다.
“선생님이 있다가 도와줄까?” 본래 이런 요청을 잘 받지는 않지만 일단 수락했다.
“네, 조금만 도와주세요.”
“음.. 너 체스 좋아하지? 그러면 체스판 무늬로 꾸며보자” 선생님은 곧바로 선을 찍찍 그으셨다. 그 와중에 나는 죄송하게도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자기 작품 건드는 거 안 좋아하는구나?”
“아뇨, 선생님께서 저보다 미적 감각이 좋으신데 당연히 수정하셔도 되죠. 그냥 요즘 할 일이 많아서 그래요”
“아이구.. 애기야 벌써 힘들면 나중에 더 힘들어..”
나는
“네” 하고 고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미술 시간이 끝났고 미술실을 나서려 하자 깍지쌤이 나를 불러 세우셨다.
“애기야 힘들어?”
“네, 조금요?”
“쌤이 도와줄 건 없고?”
“네 거의 다 끝내서 괜찮아요”
“너무 힘들면 쉬면서 해."
”네 감사합니다 “ 그렇게 깍지쌤 덕분에 힘든 때를 넘길 수 있었다.
이렇게 도움만 받아온 2학년을 보내고 3학년이 되었다. 3학년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회장 활동이 시작됐고 깍지쌤과 만날 일도 많아졌다. 학원에 다니며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2학년 아이들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새로운 2학년을 담당하시면서 힘든 기색이 역력하셨다. 솔직히 선생님께서 호통치시는 모습을 3학년 들어와서 처음 보았다.
선생님 눈도 약간 초췌하시고 기운도 너덜너덜하셔서 보고 있자니 눈시울이 찡했다. 내가 보탬이 되어 드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다. 그러던 와중에 내 글을 보시고 기뻐하시던 영어 선생님과 우리 글쓰기 결과물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는 국어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렇게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진심을 글로 담기로 했다.
깍지쌤은 종종 2학기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허탈하게 웃으시곤 한다. 나는 그때마다 확신이 없는 그 웃음에 참 깊은 아쉬움을 느낀다. 선생님께서 없는 교무실은 어떨지 상상도 해본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고 있자니 미술 학원 필통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깍지가 떠올랐다. 어느 연필이든지 끼우면 길어지던 그 깍지를. 어쩌면 선생님과의 인연에도 깍지가 있지 않을까 하며 말이다. 그리고 짧아져 가는 그녀와의 인연의 깍지가 이 글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