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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rliner Sep 07. 2016

뮤지션 이승열과 함께한 싱글 '칼끝' 작업기

티어라이너 - 칼끝 (feat.이승열)

ㅣ 2015년 여름 - 생명의 탄생ㅣ

여름이었다. 여름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감정이고 멜로디였다.

불편하거나 우울한 작품을 보고 듣기 꺼리는 사람이라면 화들짝 놀라며 피할 마이너minor 감성이긴 하지만, C#m로 시작하는 곡은 내게 그리 흔한 시작은 아니었다. 나오는 대로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구성을 짜며, 로파이 사운드에 드림팝으로 작업하면 곡에 알맞겠다고 생각했다. 악보를 그릴 줄 몰라서 코드를 적지 않으면 어떤 곡이었는지 알지 못하고, 설사 코드를 적었다고 해도 자기 곡을 자기가 커버하고 연습한 후에야 겨우 연주할 수 있는 지독한 음악맹이기에 메모장에 코드를 적으며 그 옆에 '라디오 효과 & 로파이, 혹은 장엄 신스'라고 영어로 끄적였다.

8월 당시 녹음된 조악한 음질의 데모는 헛기침으로 시작해 'When you feel alone~'이라는 스캣을 가사랍시고 흥얼거리고 있다. 한여름밤 불어낸 생명의 탄생은 조촐했다.

그날 나는 여섯 곡을 작곡했고, 그중 마음에 드는 세 곡을 MP3 플레이어에 데모로 녹음해두었다.


ㅣ 2015년 겨울 - 첫 옷을 입히다.ㅣ

드라마 음악을 준비하며 나는 그해 작곡한 곡들을 추려 편곡자들에게 드라마 연주 편곡을 부탁했다. 그간 혼자 작업해오다 그해 초 tvn드라마 '하트투하트'를 작업하며 처음 편곡자 세 명과 함께 했고, 겨울이 되어 다음 드라마 '치즈 인 더 트랩'에는 한 명이 더 참여했다. 그가 친애하는 '센티멘탈 시너리(이하 센시)'였다. 센시는 편곡을 부탁한 지 이틀도 되지 않아 열다섯 곡을 보내왔고, 그중에 이 곡의 짧은 연주 버전이 들어있었다.

나는 듣자마자 이 편곡에 반해버렸다. 아니, 그가 보낸 대부분의 편곡에 매료됐다. 그 곡들은 내 멜로디만 차용했을 뿐, 다른 감정을 가진 곡들로 들렸다. 한 아이는 슬픔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아이였는데 큰 소리로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개성 넘치는 아이로 변했고, 어떤 아이는 소심하지만 잘 웃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옆구리를 쿡 찌르고 도망가는 개구진 장난꾸러기가 되어 돌아왔다. 보내온 편곡 중 몇 곡은 보컬곡으로 재작업해도 훌륭할 거라며 나는 핸드폰이 닳도록 그를 칭찬했고, 기회가 되면 꼭 보컬곡으로 작업하겠다고 했다. 감정 표현이 옅은 센시는 조용하고 짧게 감사하다며 호응했고, 말보다 음악으로 표현하는 그였기에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곡은 그러니까 세련된 센시의 옷을 입은 덕에 빠르게 빛을 본 행운아였다, 내 다른 1200여 자작곡들이 10년이 넘어서도 데모 상태로 카세트테이프나 1~2메가 바이트 남짓의 한없이 하찮은 음원으로 하드디스크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현실에 비하면.

ㅣ 2016년 봄 - 유럽 10개국 여행ㅣ

드라마를 마치고 감정적 고갈에 허덕이던 나는 몸에 묻은 끈적이는 것들을 떼어낼 틈도 없이, 입을 가득 채운 텁텁한 말들을 채 뱉어낼 새도 없이 배낭을 메고, 비행기에 올랐다. 동유럽을 떠돌며 나는 웃고 울었고, 먹거나 굶었으며, 노래했고 동시에 침묵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시작한 여행은 한 달 보름 간을 이어지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르렀다.

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나는 얼마나 많이 걷고 멈추고, 보고 듣고, 감탄하거나 냉소했던지! 예술과 문화의 도시답게 건물과 거리는 전쟁의 포화에서 잘 복구되고 재정비되었지만, 사람들의 표정과 시선에서는 여전히 공산국가 특유의 무표정과 차가움이 어려있었다. 2차 대전 중 그렇게 많은 생명들이 꺼져갔던 도시는 이제 공원 한구석 기념비로나 남았을 뿐이었다. 나는 이런 도시에서 늦여름에 발표할 곡의 얼개를 구상했다. 이 곡 외에 다른 곡은 감정과 맞닿지 않으며, 이 도시 외에 다른 도시와는 감히 '사맛디' 않을 그런 곡을.

ㅣ 2016년 다시 여름 - 이승열이라는 무게ㅣ

내게 이 여름은 혹독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불면증에 걸려버렸고, 면역력이 극도로 저하된 몸을 폐렴이 점령했다. '라즈베리필드' 소이 씨와 함께 노래해서 7월 초여름에 발표하려던 싱글 '우리들의 다섯 번째 계절'은 내 목소리를 담을 수 없어 작업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나는 노래 대신 밭은기침만 했고, 사람들을 만나는 대신 병원을 들락거렸으며, 해와 바람이 부는 강가나 공원 잔디밭 대신 어두운 방 침대에 뒹굴었다.

8월이 되어 몸이 괜찮아지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구상했던 곡을 작업할 생각에 수염을 깎고 못 입던 외출복을 입었다. 냉면집에서 센시와 물냉면을 먹으며 '내가 부르고 싶지만, 나보다 이 곡에 어울리는 보컬이 누가 있을까?' 의견을 물었고, 그가 이승열 선배를 추천했다.

아, 이승열! 겨우 싸구려 베이스나 튕겼지 작곡은 꿈도 못 꾸던, 그러나 온종일 음악을 듣던 90년대 록키드 시절 그와 방준석 선배가 하던 듀오 밴드 '유앤미블루'의 앨범을 얼마나 들었던가. '활동하다 보면 함께 공연할 날이 있겠지, 드라마 음악을 하다 보면 함께 작업할 날이 오겠지.' 막연하게 기대했던 터라 무작정 회사로 전화해서 매니저 연락처를 물어 전화로 부탁하고 내가 노래한 데모곡을 첨부해 메일을 보냈다.


3주를 기다려 하겠다는 답을 듣고 만난 녹음 당일, 이승열 선배와 악수하며 나도 모르게 90도 인사와 함께 '존경합니다'라고 말해버렸다. 다른 뮤지션과의 협업은 언제나 즐거운데, 만들어내는 곡이 곧 삶과 관계의 연결이자 기록이 되는 건 뮤지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행복한 보람일 것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녹음은 나의 실수로 한순간에 엉망이 되어버렸다. 연주 중 한 트랙이 딜레이 타임 문제로 박자가 맞지 않았는데, 이게 노래하는 데 방해가 되어 제대로 부르기 힘들었다. 직접 데모 보컬을 불렀으면서도 그 점을 알아채지 못하고, 후에도 모니터링 등을 통해 제대로 수정하지 않은 내 탓이었다. 잘못을 사과하고, 싱글 발표일이 코앞으로 닥쳤기에 무리하게 3일 후로 다시 녹음을 잡았다. 바쁜 와중에도 이승열 선배는 다시 시간을 내주었고, 집에 돌아간 후에도 녹음을 하지 못한 것에 오히려 미안하다며 다시 전화를 주었다. 나는 다시 '존경합니다'라고 말할 뻔했지만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이번에는 꾹 참았다.

다시 만나 진행된 녹음은 다행히 잘 마무리되었다. 이승열 선배는 나의 우유부단하고 조심스러우며 자주 답답했을 프로듀싱과 디렉팅을 쏙쏙 받아들여 원하는 대로 불러주었다. 뮤지션 이승열의 짙은 보컬은 경쾌한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묘하게 섞여 한 몸으로 흘렀다. 내 자작곡이 센시의 편곡으로 새 감정을 내고, 록키드 시절 동경하던 뮤지션의 목소리로, 마치 그의 노래인 것처럼 어울리게 들린다는 게 즐거웠다.


첫 보컬 녹음이 틀어진 다음날, 거짓말처럼 가을이 엄습했다. 그날 사람들은 추위에 놀라 장롱에서 긴팔을 꺼내 입었고, 창문을 닫았으며,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고, 심지어 보일러를 틀기도 했다. 태풍이 러시아 공기를 밀어내서 일어난 일시적 현상이라고는 했지만, 가장 뜨거웠던 여름은 그렇게 기세가 꺾여 힘없이 물러났다.

ㅣ 2016년 가을 - 감성 공유ㅣ

9월 6일, 마음에서 입을 거쳐 새어 나온 감정을 정확히 1년 만에 존경하는 뮤지션들의 도움으로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연주곡일 때 '별을 기억하라'였던 곡명은 믹싱이 끝나고 발표날이 거의 다가와서도 이름을 얻지 못했다. 믹싱이며 모니터링에도 '별을기억하라', 'DEMO' 혹은 '이승열9월곡'이라는 몸에 맞지 않는 이름으로 실체 없이 떠다녔다. 나는 이 곡이 어떤 감정적 극단에 서길 원했으며, 잡다한 이야기보다 하나의 감정에 온전히 닿길 원했기에 제목도 그것에 가깝길 바랐다. '칼끝'은 그렇게 마음을 찌르고 나왔다. 날카롭고 매서워도, 그래서 듣기에 미간이 찡그러져도, 이 곡의 이름은 '칼끝'이 어울렸다. 나는 그렇게 나를 설득하고, 곡을 다독였다.

 

이 곡에 망치질을 하고, 칼날을 다듬어 준 이승열 선배와 센시에 대한 고마움으로 글을 마감해야 한다. 지독하게 게으른 한량인 나 혼자였다면 발표되지 못했을 것이며, 다른 수많은 자작곡들처럼 어쩌면 앞으로 10년 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정신의 병으로 떠난 여행과 육체의 병으로 거른 시간들이 이 곡에 자양분이 되어주었길.


칼끝 @St.PETERSBURG      

아티스트 티어라이너(Tearliner)

발매일 2016.09.06.

[출처]포크라노스 PICK] 티어라이너 / 뮤지션 이승열과 함께한 새 싱글 작업기

이 글은 싱글곡 '칼끝 (feat.이승열)' 작업기로 포크라노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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