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use Haven’t Lived 뮤직비디오 제작기
'뮤직비디오를 찍어 볼까?'
무려 11년 만에 정규앨범을 발매한다. 음악산업 관계자 아닌 사람이 봐도 한심하겠지. 그렇다고 사랑받기를 포기한 건 아니다. 더더욱 홍보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컸다. 하지만, 소속사 없는 독립 뮤지션이 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얼마나 있을까.
싱글 'Because Haven’t Lived'를 정규앨범 발매 전에 선공개하는데,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함께 공개하기로 했다. 뮤직비디오를 만들려면 응당 돈이 들겠지만, 가내수공업으로 직접 음악을 만들고 앨범을 제작했듯 스마트폰을 이용해 직접 만든다면 별다른 비용을 들이지 않고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스토리와 아이디어는 넘쳤는데, 밴드 색이 강한 싱글곡에 어울리는 스토리는 두 가지로 좁혀졌다. 하나는 원맨밴드인 만큼 밴드 악기를 한 명이 모두 연주하는 콘셉트로 주인공이 노래도 하고, 기타, 베이스, 드럼도 연주하는 촬영을 하고, 풀샷의 경우 카메라를 고정해 포지션별로 매번 촬영하고 편집으로 한 화면으로 붙이는 형식이었다. 다른 하나는 로봇이나 마네킹처럼 멈춰 있는 연주자들에게 주인공이 악기를 쥐어 주고 각자 연주 파트가 시작되면 해당 연주자가 멈춤이 풀리고 움직이며 연주를 시작하는 콘셉트였다. 주인공이 합주실에 오기 전까지 모닝알람, 전자렌지 알람, 자전거 벨, 엘리베이터 안내음, 스마트폰 알림 등 갖은 알람에 시달리는 모습을 담아 서사를 부여했다. 노래로 의지를 말한 후에는 잘익은 천도복숭아를 우걱우걱 먹으며 내 의지대로 자유로이 살 것임을, 그럼으로써 새콤달콤한 삶의 결실을 맛볼 것임을 의도했다. 고민 끝에 두 번째 콘셉트로 진행하기로 했지만 둘 중 뭘 하든 내가 아닌 다른 배우가 연기하길 바랐고, 이미지나 목소리나 바이브나 주인공에 어울리는 배우는 바로 그 '이민기' 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이런 누추한 뮤직비디오에 귀하신 분이.
민기와의 인연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드라마 <태릉선수촌>을 통해 주연배우와 음악감독으로 만났다. 음악은 후반작업Post-Production 파트라 배우가 OST를 부르지 않는다면 둘 사이에 만날 접점은 거의 없지만, 드라마를 연출했던 감독 덕에 함께 배우들과 모여 함께 본방송을 보고 수다를 나누며 금세 친해졌다. 모임은 자주 이뤄졌다. 나는 시답지 않은 농담에도 개구지게 웃는 민기의 서글서글한 미소와 넘치는 젊은 패기와 호기가 좋았다. 민기의 그런 면은 뮤직비디오로 만들려는 곡의 이미지와도 찰떡이었다.
그렇지만, 개인적 친분과 뮤직비디오 출연은 다른 문제다. 누구나 아는 유명 배우가 출연료도 없고 인지도도 쪼그라든 인디밴드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게다가 뮤직비디오 전문 감독이 연출하지도 전문가가 편집하지도 않고, 심지어 촬영은 스마트폰으로 한다는 아마추어 작품을?
별 기대 없이 민기에게 연락해서 어떨지 의견을 물었다. 이미 그전에 앨범 커버 선택 등에 조언을 구했었기에 민기도 내가 앨범을 낸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민기는 곧 해외에 갈 예정이었지만 고맙게도 긍정적이었고, 해외에서 곡을 충분히 들어보고는 곡이 좋다며 하겠다고 했다! (당연하게도)소속사에서는 당황했지만, (아마도 민기의 설득 덕분에)적극 협조해 주었다. 별도 출연비를 받지 않았고, 심지어 헤어/메이크업과 스타일링 비용도 대신 내주었다!
'누추한 뮤직비디오에 귀하신 분이' 출연해 줬으니 어찌 이런 민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시작은 초라했으나 끝은 상상도 못 했지.
처음 생각과 달리 일은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졌다. 애초 민기에게 연락하기 전에 각오했어야 했다.
나 혼자가 아니라 둘이 촬영하면 테이크 당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겠기에 배우이자 유튜브 드라마 감독인 20년 지인 '유용'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흔쾌히 돕겠다는 답을 들었다. 얼마 후에는 유명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한 박종철 촬영감독을 민기가 직접 연결해 줘서 촬영 퀄리티를 비약적으로 올려주었다. 촬영 전에 미리 만난 박종철 촬영감독은 열정이 넘쳐서 가볍게 접근했던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곧이어 박종철 촬영감독은 직접 옥성준 촬영감독을 추가로 섭외했다. 지인들은 내가 인복이 있다고 응원해 주었지만, 나는 그저 도와주는 분들께 제대로 보상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었고, 부끄럽지 않은 작품으로 보답해야겠다는 부담감이 엄습해 밤에 잠들기가 힘들었다.
민기는 내가 엉망으로 적어 보낸 콘티에 대한 의욕 넘치는 질문 공세에 퍼부었고, 미리 연습한다기에 기타 연주 영상을 촬영해 보내주었더니 제주도 출장에도 기타를 어렵게 가져가 연습하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어찌 이런 민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여기에서는 나만 잘하면 된다.
드디어 촬영 당일. 민기는 멋진 의상과 주인공의 아우라로 다섯 명의 소속사 스태프들과 마치 구세주처럼 합주실에 들어왔다. 연주자들은 민기에 뒤지지 않아야 한다며(응? 그게 된다고 생각해?) 각자 헤어/메이크업을 받고 왔다. 박종철 촬영감독은 본인 소유의 촬영 장비와 조명들을 직접 챙겨 왔다. 촬영을 맡기로 했다가 대신 조감독 역할을 하기로 한 유용은 나보다 앞서 상황을 조율하며 부지런하게 진행을 도왔다. 현장 상황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프로페셔널하게 돌아갔다.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나만 잘하면 됐다.
아직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죽을 수 없어!
곡명에 'die죽다'가 들어가면 유튜브 등에서 문제가 돼서 곡명을 줄였지만, 'Can't Die Because Haven't Lived아직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죽을 수 없어'는 싱글곡의 원래 곡명이자 주제다. 이 주제처럼 죽기 전에 제대로 뮤직비디오 한 편 정도는 만들어봐야지, 암.
스토리에 살을 붙였기에 촬영 시간이 부족할 수 있어 분 단위로 일정을 치밀하게 세워 갔지만, 촬영은 큰 문제나 시간 지체 없이 흘러갔다. 민기는 노래나 기타 연주 관련해 따로 연기를 디렉팅 할 필요도 없이 나보다 더 록커처럼, 뮤지션처럼 보였다. 전문 촬영감독의 열정 넘치는 촬영은 말해 무엇하랴. 나는 틈틈이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며 원하던 콘셉트가 구현될 수 있도록, 누락되거나 동선이 어그러지는 씬이 없도록 연출에 최선을 다했다.
촬영을 끝내고 온 밤은 에너지가 방전되어 흐늘거렸고, 소파고 바닥이고 틈만 나면 들어 누웠다. 다음 날은 무릎을 굽히기 힘들 정도로 허벅지에 근육통이 심했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른다.
연출보다 편집이 더 문제.
'유명배우 모셔놓고, 촬영 전날 유튜브로 파이널컷 1시간 기초 강의 보고 뮤비 편집 하겠다는 사람 어떤데…(도와준 스태프들에겐 비밀)' - 촬영 전 트위터(X)에 남겼던 글.
정말이었다. 호기롭게 뮤직비디오를 만들겠다고 떠벌렸지만, 연출은커녕 편집도 할 줄 몰랐다. 비록 방송예술대학을 졸업해 방송국 예능팀에서 FD(진행)와 AD(조연출) 일을 한 적은 있지만, 20년이 넘었고 아날로그 테이프 편집이라 시스템이 달랐다. 편집 기술을 모르는 초짜에게는 매사가 난관이었다.
편집을 하다 보면, 현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겨 있어 체감할 수 있고, 현장에서 연출하느라 정신없어 놓친 부분들도 상세히 알 수 있다. 민기가 덥고 힘든 상황에서도 반복해서 얼마나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는지, 연주자들은 때로 주인공 뒤에서 병풍처럼 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들었을 마네킹 연기를 군말 없이 해 주었는지, 촬영 감독은 내가 오케이 했음에도 베스트샷을 위해 계속해서 추가 촬영을 제안하고, 몸을 사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촬영해 주었는지, 매 테이크마다 조감독 용은 열정적으로 현장을 진행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분위기를 북돋웠는지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이런 놀라운 협업작을 내 엉성한 편집으로 망칠 수는 없었다.
촬영 영상을 외장하드에 담는 법도 제대로 몰라서 하루를 날렸고, 편집 기초도 제대로 몰라서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었다. 느려 터진 컴퓨터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운 돼서 껐다 켰다를 반복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한 프레임 씩 편집을 해 나갔고, 결국 4일 만에, 예정됐던 시간보다 하루 일찍 편집을 마무리했다.
타이틀은 빨간색으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가 조명이 들어오면서 함께 확 빠지도록 연출했는데, 공포영화 같다는 주변의 반대여론이 극심했음에도 밀어붙였다. 나는 뮤직비디오가 최대한 강렬하길 원했고, 전후 맥락을 통해 사람들이 타이틀을 호러스럽게 느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엔딩 크레딧에는 음원 관련 크레딧을 일부러 넣지 않고 뮤직비디오 관련 크레딧으로만 큰 글씨로 채워 도와주신 분들에 감사의 인사를 담았다. 그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 같았다.
READY, STEADY, GO!
뮤직비디오가 완성됐다. 방송 심의를 신청했고, 전체 관람가(ALL)를 받았다. 두 편의 티저를 만들어 미리 홍보를 하고, 싱글 발매와 함께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뮤직비디오를 즐겨 주었으면. 흔쾌히 출연한 애정하는 배우 민기와 십시일반 도운 스태프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기를-!
tearliner THANKS to.
소속사도 제작비도 없는 인디뮤지션의 신곡 뮤직비디오 제작에 조건 없이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친애하는 배우 이민기 군, 그대가 아니었다면 애초 기획도 못 했을 거네. 내 엉터리 콘티를 꼼꼼하게 체크해 하나하나 묻고 준비하고, 영어가사와 기타연주까지 미리 연습한 열정 존경해. 무더운 촬영날 내 어리바리한 연출을 찰떡같이 연기해 줘서 나보다 곡의 주인 같더라. 천상 배우.
모든 촬영장비와 조명까지 직접 챙겨 오시고 현장에서 저보다 더 적극적으로 임해주신 (무려 <데시벨>, <비상선언>, <악의 연대기>, <연애의 온도>, <최종병기 활> 등을 촬영하신)박종철 촬영감독 님의 열정은 그저 영광이고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함께 촬영 도와주신 옥성준 촬영감독님도 감사합니다.
유명배우의 빠듯한 일정에도 하루를 비워 주시고, 헤어•메이크업•스타일링 비용까지 대신 지급해 주신 상영 엔터테인먼트 박형준 대표님 감사합니다. 저와 직접 연락 주고 받으며 관련 일을 꾸려주신 이은혜 팀장님을 비롯한 스탭분들께도 다시 감사드립니다.
메이크업까지 받고 한껏 개성있게 꾸미고 온 키보드 이미영, 리드기타 배한슬, 베이스 이성호, 드럼 김진우. 우리 연주자들도 마네킹처럼 멈춘 연기와 쉽지 않았을 반복된 연주 연기하느라 고생 많았고 감사합니다. 즐거운 경험으로, 재밌는 추억으로 간직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에너지 넘치고 주변을 즐겁게 만드는 좋은 배우이자 유튜브 제작자이자 연습실 사장이자 내 애정하는 20년 절친 유용의 조감독 역할이 없었다면 나는 촬영을 마치기도 전에 뻗었을 거야…
도와주신 분들의 노력이 바래지 않도록 뮤직비디오 편집 등 후반작업에 정성을 다 했습니다. 이제 세상에 선보였으니 앞으로 홍보와 뮤지션 활동도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Because Haven't Lived 선공개 싱글 음원과 배우 이민기가 주연한 뮤직비디오는 9월 9일 12시에 발매 및 공개되었습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