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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rliner Jul 20. 2015

고상한 바야돌리드 공작

2009년 가을, 스페인 바야돌리드

 "좋은 아침이오."

 새똥이 묻지 않은 벤치를 겨우 골라 막 앉은 참인데 공작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품위 있게 다가왔다. 옷깃을 잔뜩 세웠지만 엉덩이의 부채는 접은 채다.

 "아, 네. 안녕하세요.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응, 아니. 그럴 것까진 없네."

 옆 벤치 등받이 부분에 후다닥 올라앉는다. 행동에 품격이 있고, 하늘을 향해 쳐든 턱에는 자신감이 한가득.

 "식사는 하셨습니까?"

 "응. 방금 전에 하녀, 아니 여기 주민 아주머니가 조에 물에 불린 쌀을 적당히 섞어서 주더군. 다른 공작 몇몇과 함께 들었지."

 공작은 쌀도 먹는구나.


 "바야돌리드에는 공작이 흔해서 말이야. 하나의 나라에 왕이 둘일 수 없듯, 한 도시에 공작은 한 명이면 충분한데. 안 그런가?"

 "네네, 옳으신 말씀. 황송합니다만, 저는 공작님의 위치나 왕과의 관계 같은 건 잘 몰라서요."

 "폐하 다음으로는 우리가 가장 상위일세, 당연히. 흠흠."

 공작은 꼬리를 활짝 폈다가 천천히 다시 접었다.

 "우리는 후작이나 백작, 자작, 남작들보다 상위니까. 그들과 감히 비교될 수 없지."

 공작은 누군가에게 깃털이라도 한 가닥 뽑힌 듯 불쾌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부리를 딱딱거리기까지 했다. 몹쓸 죄를 지은 것 같아 긴장했다. 다행히 오리 병사들이 달려와 나를 포박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우리 공작은 말이야. 오등작 중에서도 최상이라네. 주민들은 우리를 위해 돈을 벌고 음식을 대접하고 공원을 가꾸고 청소하지. 하지만 거기까지야."

 공작은 먼 산을 지그시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그 모습이 마치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신세를 한탄하는 한물 간 연예인 같다. 날개를 펴지도 않고 폴짝 등받이에서 벤치로 뛰어내려 자기 발을 쳐다보며 말한다.

 "작금은 왕이나 공작이나 힘이 없어. 권력은 녹아 없어지고 허울만 남았지. 텔레비전 속 배우처럼, 동물원 우리에 갇힌 원숭이처럼 주민들의 볼거리가 되어버린 거야."

 "유감입니다."

 '황송하옵니다.'라고 해야 하는 건 아닌지 잠깐 고민했다.

 숙였던 목을 꼿꼿하게 세우며 공작은 풀이 죽었던 말투에 다시 힘을 넣어 말했다.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여기가 나은 편이라네. 바야돌리드에 공작들이 몰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아직은 예절과 품위를 지킬 수 있는 드문 곳이야."

 그래 봤자 공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으면서. 허세를 입고 추억을 먹으며 사는 공작.


 공작이 벤치에서 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순간 중심을 잃을 뻔해서 날개를 반쯤 펴며 들썩였다. 고상하게 보이려 노력하지만 다리는 앙상했고 꼬리는 흙탕물인지 오물이 묻은 채 굳어 더러웠다.

 "그럼 쉬다 가게. 나는 산책을 마무리하고 업무를 볼 게 좀 남아서."

스페인 바야돌리드의 캄포 그란데 공원에서 한 집사, 아니 할아버지가 공작들에게 모이를 준다. 공작들은 서두르거나 경박스럽게 몰리지 않고 각자 우아하게 주위를 맴돌았다.

사족 대신 공작의 꼬리털. 스페인은 공식적으로 여전히 왕과 왕비, 왕자가 존경을 받으며 궁전에서 사는 입헌군주제다. 스페인의 박정희인 보수 독재자 프랑코 장군이 부활시킨 귀족제도도 여전히 존재한다. 유럽이 근대로 넘어오기 전 공작과 같은 최상위층 귀족은 왕과 왕비 앞에서 모자를 벗지 않아도 되는 등의 자잘한 특권이 주어졌다. 그게 뭐 대수냐 싶지만 사사로운 예의와 자존심에 목숨을 걸던 당시로서는 모두의 부러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특권이었다. 스페인 국민이 아니니 나야 상관없지만, 21세기에도 국왕과 귀족이 존재하고 자녀에게 작위를 승계하다니 진심으로 ‘그런 차별은 개나  줘버려!’라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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