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한부 선고, 그 끝자락에서_소식

그 끝자락에서

by Frank

#무소식이 희소식

2018년 06월 29일. 금요일



전화벨이 울렸다. 아빠였다.

불안해졌다. 좋은 일로 연락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나는 가족에게서 전화가 오면 늘 불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월말 정기회의 중이라 전화를 받을 수 없어서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 놓았다. 잠시 뒤, 아빠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다. ‘무슨 일이지’ 몸이 좋지 않다는 아빠의 답장. 황달 등 여러 증상이 있다는 얘기였는데 불안감은 더 커졌다. 동생에게도 연락이 왔다. 아빠에게서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1년 전, 우리 가족은 흩어졌다. 엄마와 동생은 고향 강원도를 떠나 먼 곳에 살고 있었고 난 그 중간에서 양쪽을 모두 왕래하고 있었다. 그런 가족이었다. 그런데 아빠가 동생에게 연락을 했다.

‘얼마나 안 좋으면 연락을 했을까?’ 이런 생각들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회의가 끝나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대화를 해보니 병원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내일 병원 가보자. 저녁에 갈 테니 아빠도 주말에 갈 수 있는 병원 좀 알아봐.”

이후 난 회의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원에서 근무했던 친구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했다. 친구는 주말이라 비용이 조금 더 나오기는 해도 응급실에 가서 진료를 받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아빠에게 내일 강릉에 있는 병원으로 가서 진찰을 받아보자는 연락을 했다.


불안함 속에서 하루 일과가 지나갔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준비를 하고 차를 끌고 강원도 고향으로 향했다. 칠흑 같은 어둠속을 달렸다. 마치 내 마음속을 달리는 듯했다. 그렇게 3시간을 달려 밤 11시쯤 강원도 고향집에 도착을 했다. 3개월 만에 다시 집을 찾았다. 아빠는 아직 잠들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만난 아빠는 이전과는 달리 조금 야윈 듯 보였다. 그리고 몸이 전체적으로 약간 노란빛을 띄고 있는 것 같았지만 밤이고 피곤함에 봐서 그런지 그리 심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빠와 아들은 내일 아침에 일찍 강릉 병원으로 가자는 몇 마디만 나눈 후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고려장

2018년 06월 30일. 토요일



오전 7시, 잠을 깨고 방에서 나왔다. 거실에서 먼저 일어난 아빠를 마주했다. 나는 순간 놀랬다. 어제 밤에는 아빠가 이렇게 노란빛을 띄고 있었는지 몰랐다. 아빠의 눈도 마찬가지였다. 밤이라 조명과 피곤함에 나는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불안감은 다시 찾아왔다. 한의학관련 공부를 했던 짧은 지식으로 눈에 나타나는 증상이면 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최악이면 간암이다.’

이 생각이 내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내 예상이 틀리기를. 제발 심각한 상황이 아니기를 빌고 또 빌었다.


오전 9시, 우리는 강릉 아산병원에 도착해 응급실로 들어갔다. 아빠는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했는데 어떤 수치가 좋지 않은지 CT를 찍자고 한다. 병원에서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잠시 후, CT촬영을 하고 나온 아빠에게 말했다.

“제발 중한 게 아니길 빌어. 심각한 거면 답이 없다.”

아빠는 경제적인 대비가 없는 사람이었다. 흔한 보험 하나가 없었다. 아들이 능력이 좋아 다 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 역시 내 앞가림만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별일이 아니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에서의 시간은 빠른 듯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아빠는 환자가 되어 응급실 침대에 누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뒤, 관계자가 나를 따로 불렀다. 왜 굳이 따로 부를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췌장에서 종양이 나왔고, 간에도 얼마가 전이됐으며…”

다음 말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안 좋다는 말이라는 건 이미 충분히 알았다.

“종양이요? 그럼 암 아닌가요?”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CT결과가 100% 확진이 아니라는 위로 아닌 위로로 나에게 말하고 있지만 내 머리는 아파오고 있었다.

“MRI를 찍으면 확진…”

“찍으시죠.”

난 말을 다 듣기도 전에 MRI촬영을 하자고 했다. 남아있는 10%에 희망을 걸고 싶었다. CT결과가 틀렸을 수도 있는 그 10%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차마 아빠에게 방금 들은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충 얼버무리며 MRI촬영을 더 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시 하염없는 기다림에 들어갔다.


어느덧, 나는 아빠의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아무도 없고 나 혼자이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옳은 건지. 쉽사리 결정하기가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와 동생 그리고 아빠의 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조금이나마 도움을 받고 싶었다.


아빠의 아빠인 할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 당시,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많은 것을 일군 사람이었다. 꽤나 영향력이 있던 분이었다. 하지만 병은 우리 집안의 많은 것을 가져갔다. 할아버지가 투병 생활을 하던 몇 년간 집안의 기둥은 대부분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대기 중에 췌장암이 어떤 병인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내 희망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가족들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가망이 없다면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뽑을 기둥조차 없는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MRI촬영이 끝났지만 결과는 바로 알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지금 아빠의 상태를 설명하며 입원을 권유했지만 난 그 권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현실이 나를 너무 비참하게 만들었다. 비참하고 또 비참했다. 입원을 안하고 퇴원을 하겠다고 하자. 여러 절차들이 벽처럼 내게 나타났다. 담당의사와 대화를 해야 하며, 어떤 서류도 작성을 해야 했다. 그때, 날 바라보던 간호사의 눈빛이 잊히지가 않는다. 마치, 이 사람은 도대체 뭔가 하는. 날 쓰레기처럼 바라보는 듯했다.


아빠도 설득해서 퇴원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불안해했지만 이내 받아들였다. 아빠도 지금 본인의 현실을 인정하는 듯했다. 또 다시 대기를 하며 아빠와 여러 대화를 나눴다. 아빠는 할아버지도 췌장암으로 투병 생활을 했다는 얘기를 해줬는데 암이라는 건 알았지만 췌장암이었는지는 몰랐다. 할아버지는 내가 7살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잘 기억에 잘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 당시의 장면이 부분부분 기억에 남아있다. 할아버지의 상여를 여러 사람들이 들고 마을을 돌던 장면. 할아버지의 관을 집 근처에 있는 산소에 묻는 장면. 그리고 그 앞에서 처음으로 아빠가 울고 있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결국 저녁 6시쯤 우리는 병원을 나오게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긴 하루였다. 병원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프지 않아도 아파지는 것 같았다. 강릉에서 돌아오는 길, 아빠에게 저녁을 먹고가자 했다.

“아빠,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빠는 속초에 있는 어느 고깃집을 말했다. 난 아빠가 원하는 저녁을 사주고 싶었다. 왠지 최후의 만찬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녁을 먹으며 소주 한 잔을 마셨다. 그 어느 때보다 씁쓸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 조만간 약을 사서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서울로 향했다. 어쩌면 난 이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나는 깊은 산속에 고려장을 하고 돌아오는 불효자가 된 기분이었다.




#짧으면 한 달 길면 6개월

2018년 07월 03일. 화요일



강릉행 KTX에 몸을 실었다. 아빠의 MRI 결과를 확인하러 가는 길. 내 마음과 달리 날은 맑고 따뜻했다. 주말 이후, 난 많이 바빠졌다. 가족들과 아빠의 상황에 대해서 여러 대화를 나누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 방안들을 고민했다. 가족들은 모두 각자가 알아볼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내 시간은 바쁘게 지나가다 고요해질 때면 두 눈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조용한 기차안에서 책을 펼쳤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책의 제목처럼 내 마음은 더욱 먹먹해지기만 했다.


병원에 도착했다. 10%의 희망을 기대하며 이곳에 왔다. 접수를 하고 담당 의사를 기다리는 그 시간은 길게만 느껴졌다. 담당 의사는 내게 결과를 알려준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고 작은 희망은 사라지는 순간이다. 췌장암 말기. 여러 시술이 필요하나 상의 중이고 함암 치료를 하지 않을 경우 통증 완화를 위해 호스피스 치료가 적절하다는 담당 의사의 소견서를 받았다. 그리고 주말에 아빠에게 줄 약을 챙겨서 병원을 뒤로했다.


‘짧으면 한 달 길면 6개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라고 한다. 아빠에게 결과를 정확하게 말하지는 못했다. 주말에 보자고, 약 챙겨서 가겠다고만 했다. 차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나는 나에게 말했다. 정신차려야 한다고. 나까지 흔들리면 안 된다고. 다른 무언가에 집중을 해야 했다. 가만히 있으면 슬픔의 늪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역으로 가는 택시 안.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경포대로 방향을 틀었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었다.

잠시나마 답답한 내 마음과 다른 바다를 보고 싶었다.




#재회

2018년 07월 6일. 금요일



아빠의 소식이 가족들 모두에게 전해지고 하루하루가 바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모두의 생각이 일치하는 건, 아빠를 혼자 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요양 시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서울 근교부터, 충청도 쪽, 엄마와 동생 살고 있는 근처 등 여러 곳을 후보로 두었다. 그러던 중, 엄마가 결정을 했다. 통영에서 직접 간호를 하겠다고 한다. 엄마의 결정 덕분에 모두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아빠가 순순히 엄마를 따라 갈지가 의문이었다. 다들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가능한 많은 가족들을 모아서 주말에 아빠가 있는 집에서 모여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아빠가 반대할 경우를 대비하여 여러 사람들의 한마디씩 거들어 결정하게 만들려 했다.


가족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오랜만이다. 1년여 전 엄마와 동생이 통영으로 떠난 후, 우리 가족은 함께 하지 못했다. 적어도 명절에는 가족들이 함께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난 추억에 빠지곤 했는데 1년이라는 시간 동안은 그렇게 하지 못하다가 이 기회에 다시 모이게 된 것이다. 난 이렇게 가족들이 언제 모일 수 있을까 했었다. 몇 년, 몇 십 년 혹은 가족 내의 경조사가 있을 때에나 모일 수 있을까 했다. 비록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했다. 퇴근 후, 엄마와 동생을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났다. 엄마는 아빠가 좋아하는 생선과 이것저것을 챙겨왔다. 답답한 서울을 빠져나가는 길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3시간 이상을 달려 강원도 고향집에 도착했다. 우리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던 곳. 우리의 기억이 남아있던 곳.


집안에 불은 켜져 있었다. 아빠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만났을 때, 우리의 눈앞을 눈물이 가리지 않기를 바랐다. 난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다행히 엄마와 동생은 예전처럼 아빠를 대했다. 그리고 아빠도 엄마와 동생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차분하고 따뜻했다. 지금까지 서로 가지고 있던 감정은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가족이 되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가까워진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재회했다.




#다음 추석에

2018년 07월 07일. 토요일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속초로 향했다. 우리 가족 4명이서 함께 속초를 갔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이었다. 어릴 적 가끔씩은 가족들이 모이면 온천에 갔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특별한 날이었다. 어릴 때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지만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고 나니 가족들이 모이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다. 다들 각자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만든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목욕탕에 들어가기 전에는 늘 시간을 협상한다. 늘리려는 엄마와 줄이려는 남자들 사이에서 시간 조율이 끝난 후, 아빠와 목욕탕에 들어갔다. 목욕탕에서 본 아빠의 모습은 많이 야위어 있었다. 내 기억 속 아빠의 모습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모의 모습이 작아 보인다는 말은 들어봤었지만 지금은 직접 느끼게 되었다. 뭐라고 설명하지 못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목욕 후에는 유명하다는 냉면집에서 점심을 먹고, 마트에 들러 저녁거리와 아빠의 옷과 신발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쯤이 되어가자 가까운 친척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명절 때 말고는 이렇게 모이기가 힘들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명절인 듯했다. 오랜만에 모인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지난 시절 얘기들로 분위기가 좋은 저녁 식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아빠에게 말할 시간이 되었다. 아직 아빠의 병명과 상황을 정확하게 말하지는 못했었다. 그리고 이후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다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냐며 나에게 묻고 있었다. 누군가는 말을 해야 한다. 결국, 내가 말을 꺼냈다. 앞으로 아빠의 병간호를 위해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말을 했다. 하지만 아빠는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았다. 아빠는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피하고 있었지만 난 이렇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날, 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유는 아빠를 위해서였다. 이렇게 아빠를 혼자 놔두고 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도 아빠 홀로 먼 곳으로 떠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고, 아빠에게 남은 시간이 6개월도 안 된다고, 여기에서 이렇게 혼자 있다가는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설득이 안되면 이런 말이라도 하려 하고 있었다. 우리는 계속된 설득을 했다. 하고 또 했다. 모두가 아빠를 위한 말 한마디씩을 건넸다. 결국 아빠는 조건부 승낙을 했다. 잠깐만 통영에 내려가 있다가 다음 추석에 다시 돌아오자고 했다. 우리는 알겠다며 대화를 급히 마무리하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 통영으로 떠나자 했다. 다행히 우리가 바라던 대로 아빠를 설득했다.


하지만 우리는 예감하고 있었다.

다음 추석,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