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끝자락에서
#고향을 떠나다
2018 07월 08일. 일요일
아침부터 우리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우리나라 가장 위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먼 길을 떠나야 했다.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전기, 수도 등 이것저것을 확인했다. 한동안 집에 사람이 없기에 꼼꼼히 체크했다. 그리고 아빠 마음이 변하기 전에 통영으로 가려고 서둘러 10시가 조금 넘어 우리는 차에 몸을 실었다.
드디어 강원도 고향을 떠난다. 아빠는 살면서 며칠씩 집을 비운적이 없었다. 특히 겨울에는 연탄불을 갈아야 한다며 일정한 시간에는 꼭 집에 가던 사람이었다. 그만큼 이렇게 집을 오래 비운다는 건 아빠에게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집을 떠난다는 생각이 마음속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강원도 고향에서 통영까지 500Km가 넘는 짧지 않은 거리이다. 그 거리를 나 혼자서 운전을 해야 하기에 난 다소 서둘렀다. 그럴수록 액셀을 더 힘껏 밟았다. 다들 피곤한지 잠을 잘 자고 있어서 차 안은 조용했다. 중간중간 휴게소에 몇 번을 들러가며 통영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6시간 정도 걸려 목표로 했던 저녁식사 시간 전에 통영에 도착했다. 먼 길을 달려와서인지 몸에는 피곤함이 가득 묻어났다. 바로 서울로 돌아가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날 오전 반차를 쓰고 우선은 휴식을 취했다.
한시름을 놓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빠가 엄마와 함께 있기에 당분간 걱정을 안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엄마와 동생에게는 부담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먼 거리를 오느라 몸이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한 것이 훨씬 나았다.
다음날 아침, 곧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예감
2018 07월 20일. 금요일
그동안 나는 내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회사 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운동을 하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리고 2주 만에 다시 가족들이 있는 통영에 간다. 퇴근 후, 용인에서 작은 외삼촌과 외숙모를 만나 같이 통영으로 향했다. 저녁 8시쯤 출발하여 12시를 넘겨 도착하게 되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집으로 가면 아빠가 불편할 듯하여 우리는 큰 외삼촌 집에서 자기로 했다.
가볍게 맥주 한 잔을 하며 삼촌들과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주제는 역시나 아빠였다. 아빠가 통영으로 온 후 예전보다 엄마와 통화를 자주 했다. 대화를 하며 어느 정도 느꼈지만 아빠의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아빠는 엄마와 동생이 출근을 한 후에 집에 혼자 남아있다. 엄마가 중간에 와서 잠시 본다고는 하지만 아빠 혼자 보내는 시간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 새벽에 아빠가 혼자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쓰러지는 일이 있었다. 아빠는 이제 혼자서 오롯이 움직이는 게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 상황을 마주한 엄마와 동생은 얼마나 놀랐을까.
여러 대화를 나누며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아빠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을 때가 되면, 요양병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엄마와 동생에게 더 큰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시간이 빨리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다.
#어금니를 꽉 깨물다
2018년 07월 21일. 토요일
2주만에 만난 아빠는 생각보다 더 안 좋아져 있었다. 이제 혼자서는 거동이 힘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아빠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철렁하는 순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제 삼촌들과 대화를 했던 그 상황이 벌써 내 앞에 다가온 것이다. 빨리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그 상황을 눈 앞에 마주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다짐했던 걸 해야 했다. 엄마와 외숙모가 미리 알아봤던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어떤 곳인지가 궁금했다. 요양병원은 통영에서 그리 멀지는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건물을 전체적으로 둘러보며 이 곳에서의 생활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상담을 받았다. 필요한 서류나 약, 이것저것 자세히 설명을 해 주셨다. 그리고 이 곳이 알아본 곳 중에는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월요일에 수속에 필요한 절차를 진행하고 다음날 입원이 가능한 것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그날 밤 아빠가 잠든 후, 엄마와 동생과 함께 집 앞에 있는 바닷가를 거닐며 산책을 했다. 그리고 바다를 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이렇게 우리 셋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대화가 많지 않았던 가족이었다.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상황과 그때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등에 대해서 서로의 의견을 얘기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말하지 못했던 말들도 나누었다. 짧지 않은 대화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 이 상황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의사의 말을 듣고 아빠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6개월은 남아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3개월, 추석을 아빠와 함께 보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기대조차 쉽지 않음을 느끼고 있다.
마음이 추스러지지 않는 날이었다. 하루 종일 흐르려는 눈물을 참기 위해 이빨을 꽉 깨물고 또 깨물었다. 너무 꽉 물어서인지 통증이 느껴졌다.
#잔인한 서명
2018년 07월 24일. 화요일
벌써 때가 되었다. 아빠는 요양병원에서 전문적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아빠의 병을 알게 된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이 상황은 빠르게 다가왔다. 일을 하고 있는 엄마와 동생이 없는 시간 동안에 아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그 뒤를 따르는 불안감이 우리를 너무 힘들게 했다. 무엇보다 집에서 아빠 혼자 있다가 떠나는 일이 생기는 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빠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이것저것 챙겨 우리 가족은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아빠는 우리의 부축을 받으며 요양병원 안으로 한 걸음씩 들어갔다. 입원 수속을 위해 아빠는 기본적인 검사를 받으러 가고 아빠의 보호자인 난 여러 서류들을 작성하며 담당 의사와 대화를 나눴다. 서류를 작성하는 중에 담당 의사가 해당 항목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이 항목은 아빠에게 응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연명을 위해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입니다.”
연명을 위한 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이미 마음속으로 했지만 내 손에 쥔 펜은 쉽사리 서명을 하지 못했다. 내 이름 세 글자를 적는 이 서명이 살면서 해왔던 그 어떤 서명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무게가 되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마침 아빠가 검사를 받다가 돌아와 담당 의사와 난 대화를 잠시 멈췄다. 잠시 후 아빠가 다시 추가 검사를 받으러 나갈 때 난 엄마를 불렀다. 지금 이런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알려주고 서명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했었지만 내 행동은 쉽게 따라오지 못했다.
그래도 난 다시 펜을 잡아야 했다. 어느새 내 눈에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었고 펜을 잡은 내 손 끝은 떨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그 서류에 내 이름 세 글자를 적었다. 아빠가 먼 길을 떠날 때 잡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하는 아들의 이름이었다. 지금 이 서명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살면서 해왔던 어떤 서명보다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이렇게 잔인한 서명이 또 있을까.
#울고 싶었나 보다
2018년 07월 28일. 토요일
다시 강원도 고향집을 찾았다. 나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 하지만 이제 나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텅 빈 집에 홀로 있는 내게 여러 감정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감정 중에 가장 내게 많이 들어온 것은 슬픔이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2주에 한번씩 통영을 가려고 했지만 아빠의 상황이 예상보다 빠르게 안 좋아지고 있었기에 이젠 매주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고 어느 때가 되면 한동안 머물려 했다. 아빠의 마지막만은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통영에 가지고 갈 짐들을 챙긴 뒤 난 서울로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런 저런 핑계로 명절에나 찾고 평소에는 마음만으로 찾았던 곳, 할머니와 작은 아빠가 있는 속초로 향했다. 혼자 간 건 처음이었다. 납골당에 도착하기 전부터 내 눈물샘은 차오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던 난 아마 한번쯤 속 시원하게 울고 싶었나 보다.
가족의 죽음을 처음으로 직접 마주한 건 작은 아빠 때문이었다. 고3으로 올라가기 전 방학이었다. 그날따라 아침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었다. 하루 종일 뭔가 일이 안 풀리는 느낌이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난 영문도 모르고 집에서 혼자 TV를 보고 있었다. 외할머니의 전화를 받고 아니겠지 하며 작은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은 초상집이 되어 있었다. 사춘기가 되면서 친구들과 노는 재미가 더 커지면서 잘 안 찾아갔었지만 어릴 적 난 작은 아빠를 많이 따랐었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작은 아빠 앞에서 3일간 울다가 눈물이 마른다는 것을 느껴보았다. 난 분명히 울고 있는데 내 눈에서는 아무것도 흐르지 않고 있었다. 그 이후 가족이 떠나는 때가 되면 꼭 옆을 지키고 싶었다.
그 약속은 내 마음과 같지 않았다. 군 제대 후,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전날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러 갔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주무시고 계셔서 제대로 인사를 못했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한번 들러 할머니를 뵙고 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전화 통화는 했지만 할머니는 내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섭섭함을 말했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할머니는 나와 통화하는게 힘들어졌고, 할머니의 주무시던 모습이 내게는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납골당에 걸려있는 사진으로 마주하고 있다. 오랜만에 찾았는데 아빠에 대한 이런 소식밖에 전할 수가 없어서 너무 죄송했다. 많은 말보다 많은 눈물로 내 마음을 전했다. 지금 현실이 안타까웠다. 할머니의 아들, 작은 아빠의 형이 곧 따라갈 것 같다는 소식에. 지금 내게 내리는 비는 금방 그치지 않았다. 차라리 폭우처럼 내리기를 바랐다.
그렇게 홀로 차디찬 납골당에서 한참을 주저 않아 있었다.
#당분간 술은 마시지 말자
2018년 08월 04일. 토요일
2주만에 다시 통영을 찾았다. 그 사이 아빠는 걷는 것뿐만이 아니라 작은 움직임도 어려워진 상황이 되었다. 혼자 화장실을 가거나 몸을 씻는 것도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할 수 없었다. 그런 아빠를 씻기기 위해 부축해서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아빠는 전혀 몸을 가누지 못한다. 아빠는 하루를 침대에서만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가 엄마가 오면 필요한 것 하나하나를 해주었다.
이제는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언제 연락이 와도 놀랍지 않은 순간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한 동안 난 여러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으며 종종 술로 달래고 있었다. 하지만 연락이 왔을 때 술을 마셨다면 운전을 해서 통영까지 갈 수가 없다. 술 때문에 그런 상황을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다짐했다. 당분간 술은 마시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