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한부 선고, 그 끝자락에서_바다

그 끝자락에서

by Frank

#영정사진

2018년 08월 06일. 월요일



통영을 다녀온 후, 영정사진을 알아봐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엄마와 동생과 대화를 한 후 영정사진은 내가 준비하기로 했다. 우선 핸드폰 사진첩을 쭉 훑어본다.

‘아, 이렇게 가족사진이 없구나.’

‘우리 이렇게 살았었구나.’

아쉬움이 입 밖으로 나왔다. 몇 천장이 있는 내 사진첩에서 아빠의 사진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내가 군대 생활을 하며 이라크 파병을 가기 전에 찍은 사진이 보였다. 아직도 그때가 기억난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동생은 경기도 광주까지 면회를 왔었다. 준비해온 음식으로 함께 점심을 먹고 난 후 독수리 동상 앞에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이다. 그리고 밥을 먹으며 찍은 사진이 몇 장 더 있기는 하지만 그 사진이 그나마 나았다. 내가 군대에 있을 적 면회를 와서 찍은 사진들이 우리 넷의 마지막 가족사진이었다. 그 이후 함께 사진 한번 찍은 적이 없었다. 그 사진에서 아빠의 얼굴만 캡쳐를 했다. 얼굴에 살이 어느 정도 있고 혈색이 좋아 보인다. 하지만 더 이상 그때의 모습은 지금 아빠에게 남아있지 않는다. 평소에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는 아빠였다. 병을 알게 된 후, 아빠에게 아프지 않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던 아빠가 이제는 아프다는 말을 한다고 한다. 오죽 아프면 그럴까. 얼마나 아팠을까. 그 고통을 가늠하지 못하겠다.


지난 주말 아빠를 만났을 때, 아빠는 안락사 얘기를 했었다. 이렇게 고통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난 이런 아빠를 보며 내게도 이런 날이 오면 고통받으며 생명을 끈을 잡고 있기보다는 놓아버리는 선택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건강했던 아빠의 모습을 오려내어 엄마와 동생에게도 보여주고 회사 근처에 있는 사진관을 찾아 영정사진 제작을 의뢰했다. 액자부터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하나씩 결정하고 가장 빠른 방법으로 요청을 했다. 빠르면 이번 주안에 된다고 하여 금요일에 찾아가기로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

2018년 01월 17일. 수요일



어릴 적, 우리 가족 모두 함께 저녁을 먹어본 기억. 어딘가로 추억을 만들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그런 일이 적었다. 아니 없을지도 모른다. 내 기억속에 아빠는 밖에서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가정에서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아빠는 동네에서 부동산 사무실을 운영했었다. 하지만 언제인가 사무실이 사라지고 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아빠는 뚜렷한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아빠에게는 용돈 한번 받아 본 기억이 없다. 그때부터 엄마는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여러 직업을 가졌었다. 그렇게 엄마가 가장이 되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인지 아빠는 변화하기 어려운 것 같았다. 아니, 아빠도 나름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이런 현실에서 변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빠와 대화를 여러 번 나눴었지만 매번 아빠의 답변은 같았다. 무엇을 하겠다는 말만 했고 늘 결과도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니 안타까우면서도 걱정이 된다. 시간이 더 흘러 움직일 수 없는 때가 오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런 대비가 없다.


이런 아빠의 모습 때문에 우리 가족은 깨진 유리 조각이 되었다. 아빠 때문만은 아니지만 엄마와 동생은 새로운 삶을 위해 통영으로 떠났다. 일 년 중 명절에는 가족이 모였는데 이제는 그것 마저도 사라지게 되었다. 앞으로 가족이 모두 모이는 일이 있을까. 경조사에는 함께 할 수 있을까. 그때가 아니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얼마 전, 고향에 갔을 때 아빠와 저녁을 함께 했다. 친구들 모임에 고향을 찾았는데 안 보고 그냥 돌아가는 게 마음에 걸렸고 아들로서의 도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은 아빠의 현실과 경제적 요구에 아파지기 시작했다. 난 군대에서 고생하며 벌었던 돈 중 반 이상을 아빠의 빚을 갚는데 썼다. 어린 나이에 큰돈을 처음 벌었고 아빠를 위하고 믿는 마음에 엄마 몰래 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엄마가 알게 되었고 아빠가 내 날개를 다 꺾었다며 내 앞에서 미안하다고 펑펑 울었었다.


아빠의 경제적인 문제로 엄마와 난 고생을 여러 번 했었다. 아빠가 갚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빠에게 다시 돈을 받을 마음도 없다. 그저 지금 이런 현실이 싫었다. 추운 겨울에 연탄 살 돈 얼마가 없다는 말이 내 가슴속을 너무 아프게 만들었다. 결국 난 처음으로 아빠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참아왔던 그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졌다.




#조금만 더

2018년 08월 08일. 수요일



매일 엄마와 통화를 한다. 우리의 대화는 아빠가 어떤지 묻고 답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얼마 전 아빠를 도와주는 사람을 구했다고 한다. 엄마가 매일 저녁마다 병원에 가고는 있지만 엄마가 없는 평상시에도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해질 만큼 상황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병실도 옮겼다고 한다. 3인실에서 더 적은 사람이 쓰는 방으로 옮겼다.


췌장암이면 고통이 다른 암보다 크다고 한다. 별말이 없던 아빠는 얼마 전부터 아프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불안과 걱정은 더해지고 있었다. 주말에는 작은 아빠와 통영을 가기로 했다. 그때까지만이라도 별일이 없기를 바란다.


제발 아빠가 조금만이라도 더 기다려 주기를 빌었다.




#따뜻하게 손이라도 잡아줄 수 있었다면

2018년 08월 10일. 금요일



하루하루를 불안한 마음으로 보내고 있었다. 너무 빨리 다가오고 있는 그때를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아직 마음은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그때가 되었을 때 난 감당할 수 있을까.


오후 4시쯤 사진관에서 연락이 왔다. 영정사진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잠깐 사무실을 나와 찾으러 가고 있었다. 사진관을 향해 걸어가는 중에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에게 가고 있다는 다급한 동생의 목소리. 순간 직감하였다. 그리고 난 사진관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사진관에 도착해서 무슨 설명을 해주는데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고 기억나지 않았다. 빨리 결제를 하고 사진관을 나오면서 통영으로 가는 버스 시간을 확인한다. 가장 가까운 시간은 1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더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확인을 하려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아빠의 영정사진을 찾으러 가고 있을 때, 아빠에게 가는 동안 아빠는 내 곁을 떠났다.


다시 사무실로 전력을 다해 뛰었다. 사무실에 복귀하여 짐만 챙겨 나와 서둘렀더니 겨우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통영으로 가는 4시간 동안 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시간이 빨리 흘러가길 바랐다. 참아보려 했지만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유난히 맑은 날이었지만 내게는 그렇지 못했다.


내일 새벽에 작은 아빠와 같이 가기로 했는데. 조금만 더 참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조금만 더 참지, 하루만 더 기다려주지’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나는 홀로 이 말만 되풀이하였다.


터미널에는 사촌 형이 마중 나와있었다. 형은 나를 데리고 요양병원 아래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도착 후, 영정사진을 놔두고 엄마와 동생과 함께 아빠를 만나러 갔다. 아빠는 햇살이 들어오지 않는 차가운 곳에 누워있었다. 처음으로 아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온기가 없는 아빠의 얼굴, 지금도 아빠의 볼을 만졌던 그 느낌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빠는 쓸쓸하게 우리 곁을 떠났다. 떠나는 그 순간 우리는 아빠 옆을 지켜주지 못했다. 이번에 통영에 내려가면 금방 서울로 못 돌아갈 것 같은 예감을 하고 있었다. 아빠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어서 당분간은 병원에 머무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 계획은 소용이 없게 되었다.


‘하루 아니 몇 시간만이라도 기다려줬다면 떠나는 순간 따뜻하게 손이라도 잡아줄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에 슬픔은 끊임없이 밀려 들어왔다.




#바다가 되었다

2018년 08월 12일. 일요일



고향에서 먼 통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해주러 왔다. 아빠와 함께 했던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 아빠가 떠나게 된 이유. 남아있는 우리는 아프지 말고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조심하자는 대화들을 나누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배웅 속에서 아빠는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아빠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한 줌의 재가 된 아빠를 품에 안고 버스에 올랐다. 따뜻했다. 아빠의 마지막 온기가 남아있는 듯했다.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와 마지막까지 아빠를 함께 배웅했던 친척들, 아빠의 친구분들에게 인사를 했다. 모두에게 조심히 올라가라는 인사를 했다. 떠나기 전, 작은 아빠는 마지막으로 아빠를 꼭 안았다. 지금까지 형을 이렇게 안아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은 아빠도 형의 마지막 온기를 담았다. 이제는 고향에서 가까이 살지 않기에 언제 볼지 모른다. 그래도 가족이니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우리는 아빠를 어디에서 보낼지 다시 얘기했다. 엄마와 동생과는 대화를 이미 나눴었지만 동생은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아빠를 아빠가 평생 살아온 고향에서 보내야 할지. 엄마와 동생이 살고 있는 이 곳, 통영에서 보내야 할지 한번 더 대화를 나눴지만 처음에 함께 얘기했던 통영으로 정했다. 살면서 고향을 떠나본 적이 거의 없던 아빠. 가족과 가깝지 못했던 아빠지만 이제는 엄마와 동생의 곁을 지켜주고 보고 싶을 때 쉽게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돌이켜보면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30년 이상을 함께 지냈지만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주지 못했던 무뚝뚝한 우리 가족. 표현이 참 서툴렀던 우리 가족. 엄마는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하면서 살았지만 통영에서 아빠와 함께 했던 그 짧은 시간이 행복하다고 했다. 출근하기 전에 꼭 안아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던 그 시간들이. 아빠에게 다가온 죽음이라는 끝자락에서 우리는 다시 가족이 되었다.


그날 밤, 우리는 집 근처에 있는 바다에서 아빠를 떠나보내주었다.

그렇게 아빠는 바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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