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대기업을 그만두고 개발자로 전향하기까지 거침없는 여정 이야기
옛말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이 말은 테크페미에서는 이렇게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테크페미 #bookclub 채널을 보면 은정님의 세심함과 배려심을 알 수 있다.’ 테크페미에는 매달 책을 읽고 인증을 하는 ‘북클럽’이 있는데, 매달 북클럽이 끝나는 날이면 북클럽 장인 은정님이 각 회원이 읽은 책에 대한 내용과 다정한 문구들을 남겨주신다. 이처럼 든든하고 다정한 테크페미의 북클럽장이자 5년 차 웹개발자로 활동 중인 ‘은정’님을 <여성개발자 인터뷰집>의 두 번째 인터뷰 주자로 만나보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웹 개발자 은정이라고 합니다. 서버, 프론트엔드 개발 둘다 하고 있고요. 만 4년 정도 일했습니다. 서버 개발할 때는 파이썬을 썼고 프레임워크는 django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요즘에는 node.js로 서버 개발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비전공자에 순수 문과 출신입니다. 사회과학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했어요. 들어나 봤나 인류학과… 졸업 후 글로벌 IT기업의 마케터로, 이후에는 미국 신문사에서 에디터로 일하다가 뒤늦게 개발자로 전직했습니다. 비개발 직무로 일을 할 때도 항상 개발자를 꿈꾸었기에 회사 생활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개발을 공부해서 개발자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IT 업계에 관심이 많아서 막연하게 ‘네이버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대학교 때도 전공이 문과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공학 수업을 여러 개 듣기도 했고요. 취직 준비를 할 때 IT 회사를 위주로 알아보았고 운 좋게 게임 회사 인턴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인턴이 총 8명이었는데 저를 제외한 7명 모두 전자/컴퓨터 공학과이고 저 혼자 문과더라고요. 그 후에도 계속 IT 업계로 입사 지원을 해서 글로벌 IT 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비 개발 직군으로 일했습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회사였는데, 입사해보니 당시 한창 떠오르고 있던 모바일 분야에 대한 사업은 미진한 편이었어요. . 모바일 쪽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기에 회사를 그만두고 지인들과 스타트업을 창업했습니다. 아쉽게도 일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아서 스타트업을 접고 언론사에 취직했어요. 일을 하면서도 IT와 개발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았고 ‘더 늦으면 개발을 못 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독학으로 다시 개발을 공부해 개발자로 전향했습니다. 현재는 프리랜서로 개발을 하고 있어요.
현재 실력이 아주 뛰어나지 못하더라도 구직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저는 독학으로 약 3개월 정도 파이썬을 공부하다가 아는 개발자분의 소개로 어느 외주개발 팀의 코딩 테스트를 볼 기회를 얻게 되었고요. 운 좋게도 코딩테스트에 통과해 해당 팀에 참여하게 되면서 개발자 인생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3개월 독학으로 제가 얼마나 잘 할 수 있었겠어요. 당시 제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았냐 하면, 재귀(recursion) 개념을 코딩테스트 날 처음 본 정도였어요. 코딩테스트 시간 제한이 2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당시 테스트를 내주셨던 분이 ‘제한시간이 지났지만 더 풀고 싶다면 24시간까지는 주겠다’라고 하시더라고요. 23시간 58분을 채워서 제출했어요. 밤새워서 겨우 얼추 풀었어요. 모든 문제를 대충이라도 풀어서 제출했고요. 완전히 못 풀었던 문제는 며칠 뒤에 다시 풀어서 또 이메일로 제출했어요. 다 못 푼 문제들도 어떻게 접근했는지 풀이 과정을 남겨두었는데 그 흔적들에서 뭔가 접근해가려는 노력이 보였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이런 노력을 좋게 봐주셔서 붙은 게 아닌가 생각해요.
본인 전공이 뭐였냐에 따라 장점이 달라질 것 같기도 해요. 예를 들어 경영학 출신이라면 비즈니스 지식 같은 게 강점이 될 수 있겠죠.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개발 실력이 정말 뛰어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 좋아하는 서비스를 만들면 그 서비스를 아무도 안 쓸 수도 있습니다. 비즈니스 감각이 있고 트렌드를 캐치하는 능력이 있다면 좀 더 많은 유저에게 사랑받는 서비스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업무 커뮤니케이션을 어려워하시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협업 능력이 부족한 개발자분들도 종종 계신데 비전공자분들이 이런 점에서 전공자분들보다 더 감각이 있으신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제가 생각해서 구현한 것이 잘 동작할 때 뿌듯함을 느끼고요, 두 번째로는 성능을 드라마틱하게 개선했을 때 기쁩니다. 최근에 쿼리 속도를 10배 이상 빠르게 개선한 적이 있는데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세 번째로는 사람들이 잘 쓰는 것을 볼 때 즐겁습니다. 제가 만든 서비스를 이용하는 유저가 더 많아지고 트래픽이 올라가는 것들을 보면 정말 기분이 좋아요. 일례로 예전에 제가 만든 제품을 쓰고 매출이 올랐다는 사장님을 뵌 적이 있는데 정말 뿌듯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이 일 년에 몇 번 안 되거든요. 긴 시간에 걸친 노력의 결과물이니까 자주 오는 순간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기면 그동안의 고통을 보상받는 느낌이에요.
마지막으로는 동료에게 칭찬받았을 때 뿌듯함을 느낍니다. ‘이거 잘 짜셨네요’ 같은 사소한 칭찬이라도요. 더 효율적인 방안을 고민하고 개선점을 찾는 직업이다 보니 개발자들이 칭찬에 다소 인색한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질문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저는 개발자끼리 잘한 것을 충분히 칭찬해주는 문화가 정착되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언젠가 여성을 타깃으로 한, 여성에게 도움이 되는 서비스를 만들고 싶어요. 여성들이 지식을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나 혼자 사는 여성들을 위한 치안/보안 서비스, 혹은 여성들끼리 운동 메이트를 찾을 수 있는 서비스 같은 걸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저는 개발 공부를 할 때 “재미를 유지하는 것”이 되게 중요해요. 이제 성인이니 학생 때처럼 공부하라고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재밌어야지 계속할 수 있어요. 재미가 없으면 계속 꾸준히 혼자서 못해요. 아니면 거금을 내고 학원 등의 사설 기관에 등록해서 강제로 하는 수 밖에 없겠죠.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하면 재미를 유지할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해요. “재미 driven 공부”라 할 수 있겠네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어떤 책을 읽고 '이 책 되게 재밌다'라고 생각했다면 관련된 분야나 책을 더 찾아보면서 깊게 파고 들어가 봅니다. 얼마 전에 『그래서 컴퓨터는 어떻게 동작하나요?』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운영체제 안에서 CPU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동작하는지, 메모리에서 어떻게 데이터를 가져오고 동작하는지 원리를 쉽게 설명해놓은 책입니다. 너무 재밌어서 관련 분야를 찾아보며 공부하게 되었어요. 비슷한 예로, YouTube에 서울대 컴공과 민상렬 교수님의 <컴퓨터 개념 및 실습> 강의 전편이 올라와 있거든요. 내용이 유익하면서 상당히 재밌어서 푹 빠져들었어요. 이런 강의를 찾아보며 실마리를 얻어 해당 분야를 공부하기도 해요.
‘지금은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빨리빨리 배우면 되지’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압박감은 모두가 가지고 있으니까 ‘나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생각을 늘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IT 회사의 기술 블로그들을 보면 보통 성능을 혁신적으로 개선한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올리잖아요. 그 뒤의 엄청난 삽질들은 자세히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글을 보고 주눅 들기 쉬운 것 같아요. IT 업계에는 천재 개발자들만 모여 있는 것 같이 느껴지고 나만 빼고 다 잘하는 것처럼 느껴지고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몇년 간의 삽질과 고통 끝에 깨달은 것인데 운영체제와 이산수학, 자료구조 공부가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컴퓨터공학과 1, 2학년들이 배우는 전공필수 수업들은 비전공자들도 개인적으로 독학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 컴퓨터공학을 공부할 때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개발을 조금 하다가 다시 컴퓨터공학에서 배운 이론들을 보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아, 이게 그거 때문에 그런 거였어?' 하는 순간들이 오기 때문이죠. '이것 때문에 내가 짠 코드가 느린 거였구나!'라던지 '메모리를 적게 쓰는 게 이렇게 중요한 거구나!' 하는 순간들이 와요. 처음에 짤 때는 성능을 고려하지 않고 돌아가기만 하게 짜기 마련인데요. ‘와! 돌아간다!’ 이러면서 좋아하고 거기서 만족하고 끝! 다음 기능으로 넘어가는 식이죠. 그런데 컴퓨터공학 지식이 있으면 내가 기존에 만들었던 프로덕트의 성능을 개선하는 방법을 알 수 있어서 실제로 유용합니다.
개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물어볼 사람이 많이 없었던 게 힘들었어요. 제가 개발을 시작했던 때만 해도 요즘 많이 생긴 개발 부트캠프 같은 게 거의 없었습니다. 주변에 여성 개발자도 전혀 없었고 몇 안되는 남자 개발자 지인분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물어봐야 했는데요. 지인들의 풀 자체가 적기도 했고 아무리 친하더라도 성별이 다르니 약간의 벽은 있더라고요. 개발 입문자의 입장에서 배움에 대한 갈증이 크고 이것저것 붙들고 물어봐야 할 것들이 끝없이 이어졌기 때문에 당시 굉장히 막막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개발자로 일하면서도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비슷한 배경의 동료가 부족한 환경에 지속적으로 놓이다보니 정서적으로 움츠러든 적도 자주 있었습니다. 의견을 말하기 전에 자기 검열을 숱하게 하는 태도도 생겨났구요.
그런 고립감을 꽤 오래 겪었기 때문에, 같은 여성 개발자들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줄곧 강했습니다. 이직할 회사를 알아볼 때에도 여자 개발자가 한 명이라도 있는지 여부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여자 동료를 찾기 위해 이런 저런 커뮤니티도 찾아봤구요. 그러다 발견한 곳이 테크페미 커뮤니티에요. 현재 이곳에는 여성 개발자분들이 많이 모여 재밌는 일을 다양하게 같이 하고 있는데요. 개발 공부도 하고, 취업/이직 팁도 나누고, 책도 같이 읽고 운동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시국 탓에 실제로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심리적으로 큰 의지가 되더라구요. 고독한 여성 개발자/ 개발지망생 분들이라면 여기에 꼭 와보세요.
그래도 요즘에는 개발 업계의 저변이 확대되고 여성분들의 개발 업계로의 진출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저도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여성 개발자 동료분들이 앞으로 더욱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어 후기
테크페미의 #bookclub 채널을 리딩하고 계시는 은정 님의 인터뷰를 마치며, 나 또한 개발을 시작하면서 느꼈던 것들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공감도 되고 말씀해주시는 것들에서 위안을 얻기도 했다. 앞으로 좀 더 많은 여성이 개발 직무에 유입되어서 여성 개발자가 더 흔해지기를, 더 많은 분들과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테크페미 이수진 (Li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