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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전락』

권력에의 본성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 참회와 심판

by 책 읽는 호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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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심판함 없이 남을 심판하기란 불가능한 일인즉, 남을 심판할 권리를 얻기 위해서 우선 자신을 통렬히 비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판자는 모두 마침내는 죄인이 되고 마니까, 길을 반대로 잡아서 죄인의 직책을 다하여 나중엔 심판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했어요.


138p




이토록 인간의 이중성을 통렬히 비판하며, 이해하기 어렵게 쓴 책은 흔치 않으리라. 고전에 어느 정도 내공이 쌓였고, 무거운 문체들도 꽤 읽어봤음에도, 카뮈의 『전락』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카뮈를 이해하려고 한 과거의 내가 참 오만하지 않았나 싶다.



우린 모두 자유를 원한다. 어떻게 보면 자유가 삶의 목표일 수도 있다. 자유롭다는 것은 그 어느 것에도 거리낌이 없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유로운 처벌은 원하지 않는다. 그것도 타인에게만. '자유'에 정반대 격인, 대립한다고 볼 수 있는 '법률'을 우리는 원한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자유를 막는 법률을 채택한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선택적인 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은 법률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인간은 이렇게 이중성을 가진다. 자유와 법률 두 가지를 동시에 원하기도 하고, 평등을 주장하기 위해 자신이 얻는 이익을 외면하기도 한다. 인간의 생존본능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이중성을 카뮈는 맹렬하게 비판한다. 주인공 클라망스와 대중들을 통해서 말이다.



클라망스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변호사에다, 온갖 긍정의 껍질로 뒤덮인 사람이다. 그의 냉담함은 미덕에서 오는 태도가 되며, 그의 무관심은 되려 사람들의 호감을 샀으며, 극도의 에고이즘은 너그러움이 되곤 한다. 클라망스는 이 점을 십분 활용해 대중에의 권력을 획득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간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의 삶의 태도가 올바르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어떻게 됐든 이유 없이 보이는 것은 없기에, 그의 행적에 참됨을 논할 의무는 없다. 결국 그는 타인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사람'으로 비치는 게 사실이니까. 그의 이런 사고에는 하늘을 뚫을 듯한 자기애와 믿음이 바탕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권력을 잡고 있었다.




마침내, 그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뒤흔들리게 되면서, 그는 같지만 다른 방향으로 권력을 잡기에 이른다. 자신의 죄를 스스로가 심판함으로써, 타인을 심판할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참회함으로써 심판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권리'를 가진 '심판자'가 되는 것이다.



'참회함으로써 심판자가 되는 것'에 대한 클라망스의 논리를 미친 자의 개소리로 치부한다면, 아마 이 책은 지루하기 짝이 없지 않을까 싶다. 독백체에, 계속 이 주장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나열하니까.



결국 클라망스는 그 어디에서도 위에 있어야 하는 인간인 것이다. 자기가 100의 위치에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99이하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고, 자기가 0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절하해가면서라도 모든 사람들이 마이너스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가능했다. 확실한 자기애와 굳은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그는 어디서나 군림해야만 하는 인간인 것이다.



철저히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군림하고자 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 권력을 위해서라면 진실과 거짓 그 어느 것에도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 그 모습이, 심판자라는 이름 하에 모든 이들이 죄인이 되는 그 모습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삶의 태도에 찬성하진 않지만, 왠지 모르게 남들보다 위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의 방법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해서, 클라망스에게 화살을 향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에게 화살을 향하는 즉시, 나 역시도 클라망스가 말하는 자유를 등지고 심판하려고만 하는 대중이 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책의 사유에서 벗어나서, 개인적으로 자극을 받은 부분은, 그렇게 자기애가 충만하고 대중의 심리까지 꿰뚫는 내면이 튼튼한 클라망스가 다리 위에서 강으로 투신하는 여자를 지나침으로써 그 자신이 추락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일상적일 수도 있고, 자기랑 관련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클라망스는 그 사건을 계기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하게 된다. 그로 인해 스스로에게 깊은 죄의식이 생겨, 참회함으로써 심판관이 되는 클라망스가 구축된 것인데 참 의아했다. 한 가지 사건으로 인해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충격은 제각기겠지만,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봄으로써 인생이 추락할 수 있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클라망스의 내면이 허울뿐이었다는, 그가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혹은 잘나가는 한 사람의 인생이 보편적이지 않은 단 한 번의 경험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인생의 변화무쌍함을 말하고자 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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